[그녀, 붓다를 만나다] 6. 수만 개의 조각에 담긴 불심: 원나라 황후와 고려 나전경함
고려 공예 절정 ‘나전경함’…元왕후 불심에 보급 원나라 황후 불심으로 몽골에 확산된 티베트 불교 나전 장식된 경전함 완결된 아름다움 세계 보여줘
위로는 왕실에서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고려 사람들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불교를 숭상했다. 거란과 몽골 등 외적들의 잦은 침입은 고려 사람들이 불교에 절실하게 귀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처의 공덕으로 국난(國難)을 극복하려 한 것이다. 고려 현종(顯宗, 재위 1009-1031) 때에는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大藏經)을 최초로 판각하여 인쇄, 간행했다. 이 대장경판이 고종(高宗, 1213-1259) 때인 1232년에 몽골군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금 경판을 마련하여 대장경을 간행하는 국가적인 대불사가 거행되었다.
재조대장경의 경우 총 부수가 663함 1562부 6778권에 달한다고 한다. 국가가 주도한 대장경의 간행은 결과적으로 판각이나 인쇄는 물론, 경전을 두루마리 형태로 꾸미는 장황과 공예 등 관련 분야의 발전에 큰 자극이 되었다. 아마도 대장경과 관련된 여러 불사(佛事)에는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과 관리가 뒤따랐을 것이다. 유례없는 규모로 간행된 불경을 제대로 보관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경전함이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경전함의 생산은 곧 경패(經牌)의 제작을 가져왔다. 경패는 표면에 불경의 명칭과 번호를 새긴 소형의 패를 말한다. 이를 경전함에 달아 어느 함에 어떤 경전이 들어 있는지를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처럼 고도로 발달한 고려시대 경전 문화와 공예의 수준은 이웃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중국 원나라(元, 12791368) 황후가 고려 조정에 경전함을 보내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말이다.
원나라 황후와 고려의 나전경함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권27 원종(元宗) 13년 2월 15일 조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보인다. 바로 “갑진 전함병량도감(戰艦兵糧都監)을 설치하고, 또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황후가 대장경(大藏經)을 보관할 함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甲辰 置戰艦兵糧都監, 又置鈿函造成都監, 以皇后欲盛藏經而求之也)”라는 기사이다.
1272년이면 고려가 30여 년의 대몽항쟁 끝에 결국 원나라와 강화를 맺고 간섭을 받기 시작한 지 13년째 되는 해이다. ‘도감’은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된 관청을 뜻한다. 요즘 말로 바꾸자면 일종의 ‘태스크 포스(task force, TF)’라고 해도 좋겠다. 기사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도감인 ‘전함병량도감’은 원나라의 일본 원정을 위해 전투함을 건조하고 군량미를 조달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한편, ‘전함조성도감’은 나전으로 장식한 함을 만들기 위해 설치된 관서의 이름이다. 기사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듯이, 이 함은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요청한 이는 쿠빌라이의 황후였다.
이 기록 속의 황후는 차부이(Chabi 혹은 Chabui, 察必, 12251281) 카툰으로 생각된다. 카툰은 북부 유목민족의 왕비, 황후를 일컫는 칭호이다. 차부이는 몽골의 제5대 대칸이자 원나라를 건국한 세조(世祖, 재위 12711294) 쿠빌라이의 두 번째 황후였다. 차부이의 어린 시절과 초년의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사서에 의하면 태어날 때부터 성품이 어질고 밝았다고 한다. 또한, 사랑받는 아내이자 통치에 관해 간언하는 충실한 조언자였다고 한다.
〈원사(元史)〉에 실려 있는 차부이의 짧은 전기에는 그녀의 종교적 견해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고려사〉의 기록이나, 단편적이나마 여러 문헌에 전하는 내용들을 합쳐 보면 그녀가 열렬한 불자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차부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불자였던 것은 아니다. 몽골의 부족들은 전통적으로 샤머니즘을 믿었고, 그녀의 출신 부족인 옹기라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차부이는 일찍부터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티베트 승려인 팍빠 로되 걜첸(‘Phags pa blo gros rgyal mtshan, 八思巴, 1235-1280)으로부터 밀교의 수계 의식인 관정(灌頂)을 받을 정도로 불교를 숭신했다. 관정을 받은 차부이는 크게 신심을 발했으며, 쿠빌라이에게 이를 권했다고 한다. 이처럼 차부이는 쿠빌라이가 불교를 받아들이도록 애썼고, 불교가 몽골의 국가 종교로 확립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개인적 차원의 신앙 외에도 정치적인 판단이 개입되어 있었다. 차부이는 티베트 불교를 통해 원나라가 중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데 유리한 기반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그녀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에 티베트 불교는 몽골 왕실뿐만 아니라 귀족들 사이에서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깨달음과 불심을 담은 나전경함
원나라 황후의 요청에 대응해 만들어진 경전함은 나전으로 장식된 것이었다. 기실 고려 나전의 명성은 이미 훨씬 앞선 송나라 때에 중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고려사〉에 실린 몇 가지 기사들이 이를 입증한다. 고려 조정에서는 1080년(문종 34)에 송나라에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 나전장차(螺鈿裝車)를 진상하기도 했다. 또한 인종(仁宗, 재위 1122-1142)대에 요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공인(文公仁, ?-1137)은 나전기(螺鈿器)를 선물로 준비해 갔다고 한다. 고려 나전은 이처럼 황제에게 진상하고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선물할 만큼 진기한 물건이었다. 1123년에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의 나전 솜씨는 세밀하여 귀하다(螺鈿之工 細密可貴)”고 찬사를 남길 정도였다.
이처럼 국제적인 명성을 자랑했던 고려나전은 아쉽게도 20여 점밖에 전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전함조성도감에서 제작한 13세기 후반의 나전경함은 6점에 불과하다. 그것도 미국, 영국, 네덜란드, 일본 등 해외의 박물관에 흩어져 있어 직접 보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현존하는 유물들은 부처님의 말씀이자 깨달음의 결정체인 대장경을 담기에 더없이 적절한 장엄의 세계를 보여 준다. 이 같은 빼어난 나전 솜씨 뒤에는 전함조성도감이라는 제도적 뒷받침이 큰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국책 프로젝트였을 전함조성도감의 설치는 곧 작품의 제작을 뒷받침할 만한 조직의 정비, 재료의 안정적인 수급, 그리고 기술의 확립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 성과는 현재 알려진 일련의 나전경함이 보여 주는 규격화된 크기와 정교하지만 창의적인 문양 구성에서도 확인된다. 0.8cm도 되지 않게 세밀하게 다듬은 수만 개의 나전 조각은 때로는 서로 모여 국화꽃이 되고, 때로는 모란꽃이 되었다가, 잎사귀가 되기도 한다. 원래라면 그대로 버려질 조개, 전복, 소라 등의 속껍데기가 고려 장인들의 손끝에서 오색의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보석으로 다시 태어났다. 옻칠을 한 표면 위에 작디작은 나전 조각들을 아교로 하나하나 붙여 나가는 작업은 지극한 인내심과 극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지난한 작업이었으리라.
바야흐로 “세밀하고 정교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는 찬사도 모자랄 정도의 완결성이다. 나무와 조개껍데기라는 일상적인 재료로 만들어낸 눈을 홀리고, 마음을 사로잡는 완결된 아름다움의 세계. 다만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이겨내기 위해 벌인 팔만대장경 불사와 그와 관련된 불교 공예품 생산의 기술이 결국엔 몽골의 카툰이 요청한 경함을 만드는 데 동원되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이승혜 동아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한줄 요약
티베트 불교신자 쿠빌라이의 황후 요청으로 만들어진 대장경 보관함은 나전으로 장식된 것이었다. 국제적인 명성을 자랑했던 고려나전은 아쉽게도 20여 점밖에 전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유물들은 부처님 말씀이자 깨달음의 결정체인 대장경을 담기에 더없이 적절한 장엄의 세계를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