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의  불교미학산책] 5. 대각전2-〈화엄경〉 연화장세계

불교, 21세기 우리에게 꼭 맞는 종교 불교는 신화 등에 현대적 해석 필요 없어 내면서 비롯된 고통의 원인과 해방에 집중 구원 목적 초월적 존재 아닌 현실서 찾아 

2025-03-07     서정원 박사
수전 손택과 그의 저서 ‘Against_Interpretation(해석에 반대한다, 1966)’ 표지.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저번 회에 이어 동국대학교 대각전의 연화장세계에 머물러보고자 한다. 지난 호에서 나는 대각전에 봉안된 만 분의 부처님이 서로를 장엄하는 세계, 즉 부처님이 부처님을 장엄하는 불화엄의 세계를 〈화엄경〉의 연화장세계라고 하였고 이를 〈법화경〉에서 말하는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시는 경계인 유불여불의 경지라고 하였다. 다만 이런 부처님과 부처님의 관계에 대해서 너무나 위대해서 그 위가 없는 분, 그렇기에 한 세계에 두 분이 계실 수 없는 부처님이 한 공간 안에서 서로를 장엄하시는 이중적 상태라고 하였고, 이를 이해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것에 대한 회의감을 말하다 멈추게 되었다.

이어서 말하자면 나는 이해 자체에 대해서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 이해는 머리 속의 소화작용이다. 머리 속에서 소화가 다 되어버린 철학과 내용은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혹자는 소화를 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이 되어 자기를 풍족하게 만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만, 요즘은 비만이 질병이라 하는 시대이다. 자아의 살을 채우는 것도 정신적 비만이다. 꼭 무아를 말하는 불교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종교에서 이 자아의 살을 채우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종교인이라면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에 우리는 부처님을 그들은 신을 채우는 것이 바로 믿는다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언젠가 얘기한 행지의 일이다.

물론 이해는 필요하다. 도대체 문자 그대로의 내용을 읽어가는 일이 이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 나아가 내가 대각전의 만불을 보고 이를 〈화엄경〉의 연화장세계로 이미지를 중첩시켜 가는 것도 사실은 이해의 한 갈래이다. 니체는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고, 이는 내가 종교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반증이 되는 것 같다. 물론 모든 지적작용을 이해라고 광범위하게 부를 때, 나도 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거부감을 가지는 이해는 바로 해석학이다. 이해를 다른 말로 하면 해석이다. 해석을 다루는 학문인 해석학 자체가 이해의 과학이라고 불리운다. 내가 계속 종교적이지 못하다고 말하는 이해가 바로 이것이다.

20세기 중후반 미국의 예술평론에서 여왕이라고 불린 수전 손택(그녀의 부고기사 명이 ‘여왕이 영면하다’였다)은 해석은 번역작업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을 겨냥했을 때, 해석은 작품 전체에서 일련의 요소(X, Y, Z 따위의 요소)를 뽑아내는 것을 뜻한다. 해석의 의무는 일종의 번역작업이다. 해석자는 말한다. 보시오, X가 정말 A인 것­혹은, 사실상 A를 뜻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Y가 사실은 B요, Z가 실은 C라는 것을?”(〈해석에 반대한다〉, 22) 여기서 원래 예술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X, Y, Z의 요소들은 X로서 Y가 진행되고 X와 Y로서 Z가 완결되는 작품 안에서의 완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작품에 나타나지도 않은 A, B, C를 가지고 와서 해석을 해야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수전 손택의 말을 더 빌려보자. “도대체 어떤 상황이 원문의 변형이라는 이 별스러운 짓을 부추기고 있는가? 이에 답이 될 자료는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해석은 과학적 계몽주의의 ‘사실주의적’ 세계관이 신화가 지녔던 권능과 신화에 대한 믿음을 깨부숴버린 고대의 후기 고전주의 문화에서 처음 나타난다. 신화 이후 시대의 의식에 이 의문 ­종교적 상징의 고상함에 대한 의문- 이 들어서자, 더 이상 옛 형식 그대로 옛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됐다. 그러자 옛 텍스트를 ‘현대적’ 요구에 일치시키기 위해 해석이 필요하게 됐다.”(같은 책, 22-3)

즉 문제는 창작의 시점과 감상의 시점이 갖는 시간적 격차이다. 옛날 마을 어귀에 지아비가 죽으면 따라서 죽은 아내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세웠다는 열녀문은 세울 당시에는 아주 숭고한 의미를 가진 조형물이었겠지만,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아주 혐오스러운 일이 된다. 수전 손택은 이런 예시로 그리스 철학을 받아들인 중세 기독교 교부(철학자)들이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야만적이고 비윤리적인 일련의 사건들, 하지만 서사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사건들에 대해서 해석을 하면서 이를 그들의 현재였던 중세의 기독교 윤리에 맞추어 갔음을 들었다. 이를 그리스 예술이라는 X, Y, Z에 기독교 윤리라는 A, B, C를 가져다 해석한 예시가 될 것이다. 아마 그리고 수전 손택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해석된 작품은 거의 대부분이 비윤리와 야만적 사건으로 이루어진 구약이었을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불교는 이런 신화나 비윤리적 사건, 야만적인 일상에 대해서 번거로이 현대에 맞추어 해석할 필요는 없는 최대의 장점이 있다. 부처님께서 관심이 있으셨던 건 석가족의 위대함과 정복의 역사도 아니고, 신들의 기상천외한 드라마도 아니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과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에 이르는 원인에 대해서 고민하셨고, 이는 거의 전적으로 자신 내면의 일로만 이루어졌다. 심지어 형이상학적 체계에 있어서도 이를 구축하는 초월적 존재를 전혀 상정하지 않으셨다. 서구 불교학의 여명을 연 후라우발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영혼 혹은 최고 존재를 고려하는 일 없이, 모든 심리적 과정을 오직 심리적 요소로 돌렸다.”(〈불교학리뷰 8〉, 367) 이런 면에서 불교는 처음부터 형이상학적 체계 없이 세계를 깔끔하게 설명하고 또 구원의 목적을 신비가 아니라 현실에서 찾는 종교로 성립되었다. 불교는 처음부터 현대적 요구를 가진 21세기의 우리에게 꼭 맞는 종교인 것이다. 즉 현대적 요구에 의해 해석될 필요가 없이 그 자체로 현대적인 종교가 바로 불교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21세기의 사람에게 맞춤으로 만들어진 듯한 불교에 있어서 현대인이 ‘해석’해야 하는 일들이 생겨버렸다. 바로 대승의 영역이다. 초기불교와 아비달마불교의 원리적 세계에서 부처님은 한 우주에 한 분만 계셔야 했지만, 대승에서는 원리를 무시한 채 수천 수만분의 붓다가 서로를 중첩하며 이 우주를 광명으로 채우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법계에 가득찬 옥호광을 보고 있는가? 이 보이지 않는 광명에 대해서 아직 말을 다하지 못했음으로 우리는 아직 대각전에 머물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