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배의 24번의 계절] 4. 우수 _ 여주 길을 걷다

‘강의 절’ 앞에서 우수〈雨水〉를 맞이하다

2025-02-20     장보배 작가
이른 새벽 신륵사에 들어서자 저 멀리 강 건너 황학산 봉우리 사이로 태양이 솟아올랐다. 하늘도, 땅도, 강도 온통 붉게 물드는 것은 찰나의 순간이다.

꽃샘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린다 해도, 기온이 서서히 오르며 눈과 얼음이 녹고 온 대지에 수기가 차오른다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아니다. 순리라고 하는 것, 이치대로 산다는 것.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인 것 마냥 툭, 하고 내던져지는 것들이 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이다.

해와 달이 번갈아 하늘을 오르고, 바람이 불고, 더위에 가쁜 숨을 내쉬다 보면 다시 새싹이 돋아나는. 그 별일 없는 세상이야말로 우주의 비범함이 빚어낸 선물인지 모른다. 그러니 또다시 비가 내린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그 기쁨을 이름에 모두 담아낸 절기가 있다. 온 세상이 비의 이름으로 다가오는 계절, 우수(雨水)가 내린다. 

두 번째 계절, 우수
입춘에 이어 올해의 두 번째 절기가 열렸다. 바로 우수(雨水)의 시간이다. 

우수(雨水)의 한자를 풀면 글자 그대로 ‘빗물’을 뜻한다. 비록 꽃샘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린다 해도, 기온이 서서히 오르며 눈과 얼음이 녹고 온 대지에 수기(水氣)가 차오르기 때문이다. 

“우수 경칩에 대동강 풀리더니 정든 님 말씀에 요 내 속 풀리누나.” 서도민요를 대표하는 ‘수심가(愁心歌)’의 한 구절에도 우수의 풍경은 담겨있다. 서도는 평안도와 황해도를 말하는데, 남쪽보다 춥고 바람 찬 그곳에도 우수경칩이면 꽁꽁 얼어붙은 대동강이 녹아 흐르는 것이다. 

옛 중국 사람들은 우수가 된 후 15일을 5일씩 나누어 그 특징을 전했다. 첫 5일은 수달(水獺)이 물고기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다음 5일간은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가며, 마지막 5일간은 초목에 싹이 튼다는 것. 

얼었던 강이 흐르기 시작하면, 겨우내 굶주렸던 수달은 이때를 놓칠세라 물 위로 뛰어오르는 물고기를 한껏 잡아 바위 위에 펼쳐놓는다. 어쩌면 옛사람들은 누구보다 빨리 절기의 변화를 누리는 수달의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속내를 투영했는지 모를 일이다. 길고 혹독했던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다시 새봄을 맞을 수 있다는 감사와 안도의 마음을. 

이윽고 기러기들도 미묘한 대기의 변화를 감지하고, 다시 북쪽을 향해 긴 여행을 떠나는 시간. 이제 인간에게는 그만 지워져 버린, 자연과 하나 된 생명만이 누릴 수 있는 우주의 나침반이 그들을 가야 할 곳으로 무사히 안내해 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물기를 머금어 폭신해진 땅의 틈으로 새싹이 고개를 내밀면 절기는 그렇게 완성되어 간다. 

남한강을 내려다 보고 있는 다층전탑. 물살 거센 절벽 위에 세워져 삼존의 터와 강을 지친 수호의 화신이다.

백만 번의 기적
봄이 당당히 서기 시작하고(입춘), 개구리가 놀라 깨어나고(경칩), 곡식을 여물게 하는 비(곡우)가 내린다는 여느 절기의 이름과 달리, 우수의 뜻은 너무나 담백하고, 직접적이다. 

‘빗물’ 

그러나 이만큼 이 절기의 이치를 오롯이 담아낸 말이 또 있을까. 바다와 강, 호수, 인간, 식물의 잎까지. 지구상 뭇 생명 들이 뿜어내는 수분은 태양에 의해 증발하고, 이는 다시 작은 구름 알갱이들이 되어 구름을 이룬다. 이 구름 알갱이들은 분열과 결합을 반복하며 더 큰 물방울이 되는데, 이것이 어느 정도 무게가 되면 마침내 지상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비다. 지극히 당연한 자연 현상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구름 알갱이의 크기는 약 0.02mm, 빗방울의 크기는 직경 2mm~4mm. 한 방울의 비를 만들기 위해선 최소 구름 알갱이 백만 개가 응결핵 주변에 달라붙어야만 한다. 바다의 염분과 연기, 토양의 온갖 미세 입자로 생겨난 응결핵. 그 크기가 0.0001mm 밖에 되지 않아 육안으로는 확인조차 불가능하지만, 이 자그마한 핵에 최소 백만 개의 구름 알갱이들이 힘을 더할 때 비로소 빗방울 하나가 완성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기온과 바람도 이 빗방울을 도와주어야만 한순간 눈이나, 우박으로 변하지 않고 무사히 ‘빗물’이 되어 대지를 적신다.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담겨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 있다’는 오관게의 한 구절. 한 그릇 공양 앞에서 되뇌는 저 경구에 기적 같은 우주의 이치가 머문다.

신륵사 극락보전과 백색 다층석탑.

강의 절을 찾아서
우수에 앞서 여주 신륵사를 찾은 것은 가득히 넘실대는 물의 기운을 미리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겨울의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이면, 저 여강(남한강 여주 구간)의 물안개가 온 세상에 피어오른다는 강의 힘을. 

강을 지키고, 강이 지키는 천년고찰. 거대한 남한강 물줄기 곁에 자리한 신륵사는 그 어느 사찰보다 낮은 문턱으로 오가는 이들을 반긴다. 남한강 수변 산책로를 자분자분 걷다 보면 어느새 경내로 스며드는 이곳. 산중 사찰이 지닌 폐쇄적인 신비함 대신, 숲에서 강 자락까지 이어지는 완만한 대지와 드넓은 강의 풍광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만든다. 하지만 들어서는 문턱이 낮다 해서 이 천년고찰의 유구한 역사와 보물들마저 쉬이 생각해선 안 될 일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라는 청산가를 남긴 나옹선사의 입적 사찰로 알려진 신륵사. 억불 정책이 만연하던 조선 시대에도 이곳은 가치 높은 사적과 빼어난 경관으로 몇 번이나 훼손의 위기를 넘기곤 했다. 

여강을 마주한 채, 9마리 용이 물을 뿌려 부처님을 씻겨 드렸다는 전설이 담긴 저 구룡루의 담대함, 담박하지만 기품 어린 조사당(보물 제180호)과 도량의 중심을 지키는 극락보전의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 1791호). 그 앞에 선 백색 다층석탑(보물 제255호)의 섬세한 연화문양과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 시대 벽돌탑인 다층전탑(보물 제 226호)까지. 

특히 도량의 동쪽, 물살 거센 절벽 위에 세워진 저 다층전탑은 천년이 넘는 세월을 한 자리에 머물며 삼존의 터와 강을 지킨 수호의 화신이다. 그러므로 사람도, 강도 거친 생의 물살에 지칠 때면 이 탑을 보며 저마다의 길을 찾곤 하는 것이다. 

희망으로 돌아오라
마침 신륵사를 찾은 전날은 여주시의 정월 대보름 축제가 있던 날. 커다란 달빛 아래 거대한 달집이 타오르며 내뿜던 열기가 여강을 가득 메운 밤이었다. 세상을 향해 퍼져나간 그 온기가 어서 저 지난한 얼음의 시간을 녹여 주기를.

이른 새벽 신륵사에 들어서자 마침 저 멀리 강 건너 황학산 봉우리 사이로 태양이 솟아올랐다. 하늘도, 땅도, 강도 온통 붉게 물드는 것은 찰나의 순간이다. 

강은 어느새 녹아 있었다. 입춘을 지나 우수로, 절기는 흐르고 어느새 강도 그렇게 흐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첫 번째 얼음이 녹기 시작한 이래, 강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속도를 붙여 제 몸을 녹이며 흘렀을 터다. 피어오르던 물안개가 우우, 하고. 또 휴우우 휴우우 숨을 내쉬며 강변을 올라 자신들의 오랜 쉼터로, 탑의 땅으로 돌아온다. 

이제 강물은 다시 하늘로 오를 것이다. 제 품에 숨겨놓은 뭇 생명의 웃음과 눈물, 기원과 함께. 그리고 마침내 봄비라는 가피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니 저 그늘진 응달의 자그마한 새싹 하나도 희망이라는 이름을 더하지 않는가. 

▶한줄 요약 
우수(雨水)의 한자를 풀면 글자 그대로 ‘빗물’을 뜻한다. 비록 꽃샘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린다 해도, 기온이 서서히 오르며 눈과 얼음이 녹고 온 대지에 수기(水氣)가 차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