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마나의 시절인연] 詩, 언어의 사원
겨우 말문이 열린 손자가 할머니 집 현관에 들어섰다. 낯선 환경에 쉽게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거실에 놓인 서양란을 보고 오종종 걸어간다. 가는 꽃대 끝에서 옹기종기 피어난 예쁜 꽃 앞에서 “꼬, 꼬, 꽃”이라고 말한다. 둥글게 펼쳐진 붉은 꽃잎이 닭 볏을 닮아 닭의 소리, “꼬꼬”라고 말한 것인가. 아니, 어린아이가 벌써부터 시어(詩語)를 읊다니. 손자의 언어 사용이 미숙해서 완전한 단어를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원초의 말이 터져 나왔다고 믿고 싶었다.
문득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유명한 문구가 귓가를 맴돌았다. 우리 인간은 깨어 있을 때도 말하고, 꿈속에서도 말한다. 책을 읽을 때도 말하고,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말한다. 어떤 일에 몰두할 때도 말하고, 한가로이 멍하니 앉아있을 때도 말한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끊임없이 말한다. 인간이 말한다는 것은 특별한 욕구에서부터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언어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 아닌가. 인간이 말하기 전에 언어가 말한다. 인간은 말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언어가 말한다’고 할 때, 그 언어는 ‘존재의 언어’를 가리킨다. 인간의 발성기관과 청각기관에 의존하여 표현하거나 의사소통하는 것은 존재의 참말이 아니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존재를 팽개친 말은 헛된 말이며, 아무런 진리도 불러오지 못하는 말은 퇴락한 말이다. 언어란 인간의 존재 방식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 응집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순수하고, 강력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 존재의 언어는 근원의 언어, 생명의 소리다. 인간은 존재가 말을 걸어오면 그것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진리는 언어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고, 인간은 언어의 시원적 울림에 귀 기울이는 사유 속에서 존재에게 다가간다.
존재의 언어는 인간의 일상 언어와 달리 정적의 울림이다. 존재의 언어는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처럼 울려 나오지만, 그 은은한 울림소리는 우리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존재 언어의 울림을 알아들으려면 인간이 존재를 향해 깨어나야 한다. 이렇게 깨어나서 존재의 언어를 시어(詩語)로 가져오는 사람이 시인이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존재는 그 언어를 알아듣는 인간이 있어야 한다. 존재가 자신을 드러낼 터전은 인간이 아닌 어떤 곳일 수 없다. 존재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울려 나올 수밖에 없다. 그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순수한 언어가 시어다.
시(詩)는 말씀 언(言)과 절 사(寺), 두 단어로 이뤄졌다. 그렇다면 시는 언어의 사원, 부처님의 말씀이란 뜻 아닌가. 불법(佛法)이 바로 존재의 언어라는 것이다. 불성(佛性)은 삼라만상에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만 미혹에 잠긴 인간은 진여(眞如)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시인은 귀 기울여 부처님의 말씀을 시어로 드러낸다. 시인이 찾는 말은 사전에서 찾을 수 있는 낱말이 아니라 진리의 언어다. 부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언어다.
아이들이 말하기 전에 웃고, 울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침묵의 언어일 것이다. 어머니는 그 표정과 몸짓을 보고 아이의 마음을 헤아린다. 어린아이의 언어는 순수하다. 이윽고 아이는 말문을 연다. 태초의 언어가 시어로 터져 나온다.
“꼬, 꼬,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