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붓다를 만나다] 4. 백제 왕후 ‘여신성불〈女身成佛〉’ 발원 담아 사리 공양하다
부처님 사리를 공양한 선근으로: 백제 사택왕후의 발원 미륵사지 에 고스란히 담긴 사리 장엄구 면면 아름다운 그릇에 사리 모셔 ‘현생성불’ 기원 백제 왕후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산 아래 평탄한 대지 위에는 미륵사지 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미륵사는 고대의 다른 사찰과는 달리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창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전하고, 사지의 서쪽 영역에 거대한 규모의 석탑이 남아 있어 일찍부터 학계의 관심을 받았다.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미륵사지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고, 해방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 전면적인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그중에서도 2001년에서 2010년까지 행해진 미륵사지 서탑 해체보수 조사는 백제의 역사와 미륵사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2009년 1월, 미륵사지 서탑의 해체보수 조사 중 탑 1층 내부의 심주석(心柱石) 안에서 사리공(舍利孔)이 발견된 것이다. 사리공은 탑 안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마련한 공간을 뜻한다. 그 안에서는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이하 〈봉영기〉), 삼중 사리호 세트, 수많은 공양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그중 가장 큰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은 바로 〈봉영기〉이다. 작은 금판의 앞뒷면에 가득 채운 명문 중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邈積德)의 딸로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라는 구절은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선화공주와 사택왕후
〈봉영기〉의 발굴 이전에는 백제의 제30대 군주인 무왕(武王, 재위 600-641)과 그의 왕비가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널리 믿어졌다. 바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러브스토리 중 하나인 서동요(薯童謠)의 두 주인공인 서동(薯童)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이다.
〈삼국유사〉 제2 기이(紀異) ‘무왕(武王)’ 조에 의하면, 한미한 출신의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서라벌로 향했다. 서동은 밤마다 선화공주가 남몰래 자기와 만난다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 소문을 들은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궁궐에서 쫓아냈고, 결국 서동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는 데 성공했다.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니다. 후일 무왕과 그 부인은 용화산 밑 연못에서 미륵삼존을 뵈었다. 부인의 청을 받은 무왕은 이 자리에 미륵삼회(彌勒三會)의 모습을 본떠 전(殿)과 탑(塔), 낭무(廊, 회랑)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했다고 전한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한 13세기 이래 이 이야기 속 왕비는 선화공주라고 믿어져 왔다. 이 때문에 〈봉영기〉는 발견과 동시에 학계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사찰과 탑의 건립을 주도한 주인공이 사택왕후라고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선화공주를 놓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40여 년이 넘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백제를 다스린 무왕에게는 여러 비(妃)가 있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선화공주가 무왕의 초년을 함께 한 왕비이고, 사택왕후는 선화공주 사후에 맞이한 후비란 것이다. 이와 맞물려, 미륵사의 삼원(三院)은 일시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순차적으로 조성되었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사택왕후는 미륵사의 삼원 중 마지막에 완공된 서원(西院)의 창건주에 불과하며, 선화공주가 중원(中院)이나 동원(東院)을 조성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사택왕후의 처지에서 본다면 억울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봉영기〉의 발굴로 인해 1370년 만에야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는데, 연구자들은 본인의 위상과 공헌을 자꾸 축소하려 드니 말이다. 비유하자면, 설화 속 첫사랑을 역사에 남은 부인이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랄까. 그렇다면 무왕의 왕비이자, 서탑을 세우고, 사리를 공양한 사택왕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봉영기〉의 내용과 사리장엄구의 면면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사리를 맞이해 모신 사택왕후
〈봉영기〉는 얇은 금판의 앞면과 뒷면에 각각 11행씩, 총 193자의 글자를 새겨 만들어졌다. 한 자 한 자 획을 따라 주사(朱砂)를 입혀 글자가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한 배려가 돋보인다.
〈봉영기〉는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된다. 첫째 단락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중생 교화와 열반에 드신 이후 중생들을 위해 남기신 사리의 신통한 힘에 대해 공경을 표하고 있다. 둘째 단락에는 사택왕후의 가람 설립과 사리 봉안에 대해 적혀 있다. 사택왕후는 과거 오랜 세월 동안 좋은 인연을 쌓았기에 이번 생애 왕후라는 좋은 과보를 받은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백성을 잘 돌보고 삼보(三寶)를 후원한 왕후였으며, 정재(淨財)를 희사해 가람을 세우고 부처님의 사리를 탑 속에 모셔 그 공덕이 먼 미래에도 끝없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셋째 단락은 사리를 공양하여 심은 선근(善根)으로 대왕폐하의 무궁한 수명과 왕과 왕후의 안녕을 빌고, 모든 존재가 다 같이 불도를 이루길 기원하는 내용이다.
이 같은 〈봉영기〉의 내용 중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셋째 단락에 나오는 ‘왕후즉신(王后卽身)’이란 구절이다. 이에 관해서는 ‘즉신’을 앞서 언급된 ‘폐하’의 존칭과 대구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한 의견이 제일 먼저 제기되었다. ‘왕후즉신’을 ‘왕후 당신’으로 해석한 것이다. 또한 ‘즉신’을 지금의 몸으로 본 해석도 있었다. 왕후가 현생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를 발원했다고 본 것이다. 한편, ‘왕후즉신’을 ‘즉신성불하실 고귀한 분’으로 이해하거나 ‘즉신성불’의 관점에서 풀이한 해석도 있었다. ‘즉신’이라는 단어를 이 몸으로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즉신성불’의 준말로 본 것이다. ‘즉신성불’은 여성성불론의 전개 중에서 가장 발전한 단계에서 나온 이론으로, 여성의 몸을 남성으로 바꿀 필요 없이 여성의 몸으로 곧바로 성불할 수 있다는 ‘여신성불’에 해당한다.
어느 해석이 옳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사택왕후가 탑을 건립한 공덕으로 무병장수나 극락왕생이 아니라 현생에서 성불하기를 기원했다는 지적은 울림이 크다. 우리 백제 왕후는 다른 무엇보다도 성불을 염원한 근기가 수승한 불자였던 것이다.
사리와 큰 서원을 담은 아름다운 그릇
미륵사지 서탑 1층 십자형 통로의 중앙에 서 있는 심주석은 방형의 석재를 삼단으로 쌓아서 만든 구조물이다. 사리를 안치하기 위한 사리공(舍利孔)은 맨 아래 석재 내부에 마련되어 있었다. 사리공의 바닥에는 먼저 두꺼운 방형 유리판을 깐 후, 그 위 네 모서리에 청동원형합 6개를 올려놓았다. 그 사이사이는 각종 유리구슬로 가득 채운 후 은제관식과 금제소형판, 직물에 싼 작은 칼 등 각종의 공양물을 놓았다. 그 위로도 각종의 구슬류와 직물류로 켜켜이 충전했으며, 가장 위쪽에 사리기 세트와 〈봉영기〉를 안치했다.
사리장엄구의 중심은 단연 삼중으로 된 사리기 세트이다. 금동사리외호, 금제사리내호, 유리사리병을 차례로 중첩한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유리사리병은 발견 당시 이미 파손되어 있어 형체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금동사리외호와 금제사리내호는 당대 동아시아 금속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외호와 내호는 다소간 구조적 차이는 있지만 모두 동체 부분을 돌려 열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같은 독창적인 구조는 외호 안에 내호를, 또 내호 안에 유리병을 안치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장인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사리호의 황금빛 몸체 위에는 소라고둥을 연상시키는 역동적인 소용돌이무늬, 연꽃잎무늬, 촘촘한 물고기알무늬 등을 새겨 빈틈없이 아름답게 장식했다.
금동사리외호 안에는 금제사리내호와 함께 금구슬과 모두 3892점에 달하는 다채로운 색상의 유리구슬, 향이 담겨 있었다. 또 사리내호 안에는 사리와 유리제사리병 파편을 비롯해 꽃 모양의 금제 구슬, 대롱옥, 청색 유리구슬, 자수정 등이 모셔져 있었다. 작은 사리내호 안에도 모두 257점에 달하는 많은 유리구슬이 들어있었다. 유리병과 내호 사이, 또 내호와 외호 사이에 작은 유리구슬을 가득 채운 것은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사리공과 공양구인 청동합 내부 역시 유리구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사리공, 사리기, 공양구 내부를 구슬로 가득 채운 이 같은 장엄 방식은 현재로서는 미륵사지 사리장엄구에서만 확인되는 백제 특유의 것이다.
사리를 공양한 공덕으로 마치 부처님처럼 법계를 비추는 깨달음과 금강과 같이 불멸하는 몸을 얻기를 발원했던 사택왕후. 그녀는 큰 서원에 걸맞게 자신이 지닌 재물을 내어 최고의 재료를 마련하고, 당대 최고의 역량을 지닌 장인들을 동원해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어 사리를 공양했던 참된 불자였다.
이승혜 리움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