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섭의 불교, K-드라마로 만나다] ‘나’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4. '나의 해리에게'(2024) 육체와 정신이 화합한 상태가 ‘정체성’ 상처 스스로 치유하며 어른으로 거듭나 불자라면 애초부터 상처 없음 깨달아야

2025-02-14     최원섭 대행선연구원 연구원
ENA·지니TV '나의 해리에게'

마음의 병 중에 기억상실증과 다중인격만큼 영화나 드라마에 많이 등장하는 소재도 없다. 특히  단순히 기억을 못하는 기억상실증에 비해 한 사람 안에 둘 이상의 인격이 사는 다중인격은 훨씬 강렬한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작품만 꼽아봐도 영화 〈장화, 홍련〉(2003), 〈킬미, 힐미〉(2015), 〈하이드 지킬, 나〉(2015), 〈3인칭 복수〉(2022)을 비롯한 여러 영화와 드라마들이 있었다. 이번 지면에서는 최근작 〈나의 해리에게〉(2024) 이야기를 해보자.

PPS 방송국 아나운서 주은호(배우 신혜선)는 14년 차 아나운서다. 짧지 않은 경력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으면서 까칠하기만 한 캐릭터로, 8년을 사귄 동기 아나운서 정현오(배우 이진욱)와는 4년 전에 헤어지고 떨떠름하게 지내고 있다. 한편 미디어N서울 방송국 주차관리소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주혜리(배우 신혜선)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다정함과 항상 앞머리를 내려서 얼굴을 가리는 소심함을 동시에 지녔다. 미디어N서울 아나운서 강주연(배우 강훈)에게 호감이 있지만 나서지 못하고 피해 다니다가 결국은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둘의 관계가 호전될수록 혜리는 점점 얼굴을 드러내는 용기를 얻는다. 

이쯤에서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혜리는 은호의 또 다른 인격이다. 새벽방송을 하기 위해 오전 4시에 일어나는 아나운서 주은호가 잠들었다가 오후 4시에 다시 일어나면 주차관리소 직원 주혜리가 된다. 은호와 혜리는 각각의 인격일 때 겪은 일들을 그저 꿈이라고 생각한다. ‘은호’이자 ‘혜리’로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은호. 그렇다면 진짜 은호는 누구인가? 또는 은호에게 진짜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무엇으로 ‘나’를 규정할 수 있을까? 아침에 길을 나설 때의 마음과 저녁에 집에 들어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 이 사람을 대할 때의 나의 말과 행동이 저 사람을 만나면 또 다른 말과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짜 ‘나’인가? 어떨 때는 마냥 너그럽다가도 또 어떨 때는 한없이 엄격한 나를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다양한 가면을 숨기고 있는 사회적 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다섯 가지 덩어리로 되어 있다고 한다. 다섯 가지 덩어리는 육체적인 요소 한 가지와 정신적인 요소 네 가지인데, 일반적으로 육체보다는 정신이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여기는 것과 달리 불교에서는 육체와 정신이 ‘화합’한 상태가 바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너그러울 때의 ‘나’도 나이고 엄격할 때의 ‘나’도 나이며, 아침과 저녁의 다른 마음 역시 모두 ‘나’의 마음이다. 그렇게 늘 변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바로 나의 정체성인데, 변하지 않는 나를 찾으려고 하니 진짜 ‘나’를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다중인격’의 정확한 표현은 ‘해리성 정체성 장애’라고 한다. 은호의 다른 인격인 ‘혜리’는 사실 은호의 동생 이름이다. 은호와 혜리는 어릴 때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친척들도 마다하는 자매를 먼 친척 할머니가 거두었다. 활발한 은호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나운서가 되었지만 워낙 소극적인 혜리는 세상에 나서지 못하고 점점 외톨이가 되어갔다. 보다 못한 은호가 사회성을 익히라며 혜리를 억지로 졸업여행에 보냈는데 그만 실종되고 만다. 언니밖에 모르던 동생이 최종 실종선고를 받아 사망처리가 되면서 그동안 쌓였던 은호의 죄책감이 동생의 인격으로 나타났고, 동생의 일기장에 적혀 있던 소망대로 은호는 혜리가 되어 주차장에 취직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드라마의 제목은 〈나의 ‘혜리’에게〉가 아니라 〈나의 ‘해리’에게〉이다. 그러니 은호의 ‘나의 혜리’는 동생을 지칭한다기보다는 해리장애를 겪고 있는 은호의 ‘나의 해리’를 가리키는 셈이다. 

이 드라마에서 또 하나의 축을 이루는 것은 남자주인공들의 사연이다. 은호가 동생 혜리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듯 은호의 연인 정현오와 혜리의 남자친구 강주연에게도 과거의 깊은 상처가 있다. 

현오의 아버지는 도박중독자였다. 어릴 때 어머니가 도망가고 아버지는 도박 빚 갚는 심부름을 늘 현오에게 시켰다. 그러다가 집에 불이 나면서 아버지는 죽고 고등학생이었던 현오는 보육원에 가야 할 처지에 놓인다. 이때 아버지가 돈을 빌리던 도박장 전주가 현오에게 아버지의 빚을 탕감해줄 테니 자신의 집에 와서 살라고 제안한다. 조건은 단 하나, 전주 자신과 동료들이 늙으면 돌봐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처럼 도박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힘들게 살던 남매들도 데리고 오면서 현오의 집은 ‘가족 아닌 가족’ 여덟 명이 사는 대가족이 되었다. 이와 같은 과거 때문에 현오는 결혼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반면 주연은 세상을 떠난 아버지처럼 군인이 되고 싶어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한다. 그런데 집안의 자랑이던 형이 어릴 때부터 꿈꾸던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하고, 주연의 임관식을 보러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린다. 형에게 큰 기대를 걸고 살았던 어머니는 모든 책임과 비난을 주연에게 쏟아내었고, 결국 정신이상이 생겨 병원에 있으면서 주연을 형의 이름으로 부른다. 주연은 형의 길을 걸으면 죽은 형이 행복해질까 싶은 마음에 전역해서 아나운서가 되었다. 형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한 것이다.

제작사에서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를 소개하는 문구는 이렇다. “마음속 깊은 상처로 새로운 인격이 발현된 아나운서 ‘은호’와 마음의 상처를 꼭꼭 감춰 둔 구남친 ‘현오’의 새로고침 치유 로맨스.” 소개 문구대로 은호는 현대의학의 힘을 빌려 혜리를 향한 죄책감을 씻으며 ‘원래’의 은호로 돌아가고, 은호와 현오는 사랑의 힘으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살아간다.

드라마에서도 표현되듯 누구나 마음속에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어릴 때 상처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주체하지 못할 만큼 큰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사는 것은 아니다. 사유를 통해서든 종교를 통해서든, 또는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든 상처를 극복하며 어른이 된다.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상황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다. 그러니 ‘철이 든다’는 아마도 이런 치유의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지. 


 최원섭 대행선연구원 연구원 

 

그런데 불자라면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변하지 않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상처받는 내가 있고 치유하는 내가 있다. ‘나’에 대한 관찰을 치밀하게 하면 ‘나’라는 것이 있을 자리가 없는 동시에 모두가 바로 ‘나’이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 치유가 아니라 애초에 그런 상처가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임을 기억하자.

 최원섭 대행선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