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배의 24번의 계절] 3. 입춘 _ 부산 길을 걷다

‘희망’의 다른 이름 ‘봄’…봄이여 어서 오라

2025-02-07     장보배 작가
해동용궁사는 손을 뻗으면 닿을듯한 푸른 바다, 수변 바위와 해변을 따라 자리한 이국적인 모습으로 사랑받는 부산의 명소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해수관음대불은 매일 아침 도량을 가득 채우는 장엄한 일출과 함께 더욱 현현히 빛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 
고운 봄의 향기(香氣)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 푸른 봄의 생기(生氣)가 뛰놀아라.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시인 고월(古月) 이장희(1900~1929)의 시 안에서 봄은 이토록 살아있다. 고운 향기로, 금방울 같은 눈동자에 흐르는 미친 불길처럼, 포근한 졸음 뒤에 끝내 푸른 생기가 뛰어노는. 
일제강점기, 짧은 생을 우울과 부조리에 대한 결벽 같은 투쟁으로 살았다는 한 슬픈 시인에게도 봄은 이토록 어여쁜 것이다. 길고 긴 겨울의 문이 지루하게 닫히는 동안, 저 멀리 빛으로 열리는 또 다른 문이 있다. 마침내 시작되는 새로운 계절의 여정, 바야흐로 ‘입춘(立春)’이다. 

사계절의 시작, 입춘(立春)
1년 365일 지구는 스스로 자전(自轉)하고,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시간과 계절의 변화를 맞이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저 저마다의 자리에서 땅을 굴리는 이들의 노고야말로 새 계절을 부르는 동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엄혹한 계절을 이기고 피어나는 새잎의 앳된 기지개, 언 땅을 뚫고 우뚝 솟아나는 산야초의 기개가 그렇다. 또 매일 찬 바람을 이기며 삶을 일구는 보통의 사람들의 하루가. 봄은 그렇게 지구를 딛고 선 모든 생명의 인내와 함께 찾아오는 것이다. 

입춘(立春), 입하(立夏), 입추(立秋), 그리고 입동(立冬). 옛사람들은 한 해를 가르는 4번의 큰 절기마다 ‘立(설립)’자를 써서 우주에 새로운 기운이 북돋는 현상을 표현했다. 어쩌면 입춘은 모든 계절을 통틀어 그 표현에 가장 어울리는 절기인지도 모른다. 수 개월간 이어진 동장군과의 승부 끝에 끝내 승전고를 울리는 것은, 세상을 뒤덮을 듯 내리붓는 겨울의 눈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손 뻗는 자그마한 새순이니까. 

태양 황경(黃經) 315도. 바로 그 순간 진정한 새해는 시작되고, 세상은 다시 깨어날 준비를 시작한다.

봄을 만드는 사람들
농경사회를 이룬 우리 민족에게 입춘이란 한 해의 명운을 점치는 관문이었을 것이다. 

옛 왕실과 지방 관청이 주도한 많은 의례 행사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입춘에는 신하들이 왕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이 주요한 의식이었다. 왕은 주연과 함께 춘번자(春幡子)를 내리고, 또 관리들에게는 하루 휴가를 주었다.

춘번자는 입춘을 기념하는 비단 깃발로, 사대부들은 이날 관모나 옷깃, 머리에 춘번자를 꽂고 하루를 보냈다. 또 민간에서도 굿과 제를 지내고, 춘번을 만들어 나뭇가지마다 걸어 입춘을 축하했다. 봄을 반기는 마음이야 나라님부터 백성들까지 다르지 않았던 터다. 

경내를 가득 채운 참배객들의 소원지. 사람들에게 마음의 의지처가 되어준다.

하지만 작물을 일구고, 소출을 내야 하는 백성의 간절함을 어찌 가늠하랴. 입춘날 여러 씨앗을 볶아서 맨 먼저 솥 밖으로 튀어나오는 곡식이 그해 풍작이 든다는 것. 또 집을 깨끗이 청소한 뒤 체를 엎었다가 몇 시간 뒤 들어보면 곡식 한 알이 나오는데, 바로 그 곡식이 그해 풍년을 이룬다는 이야기까지. 내륙 지방부터 제주까지 이어지는 이 귀엽고도, 애잔한 속설들에는 한 알의 곡식에도 막연한 희망을 걸었던 옛사람들의 간절함이 머문다. 

하지만 이런 간절함을 되려 자비와 공생의 동력으로 승화시킨 것 또한 그 보통의 사람들이다. 입춘의 오랜 풍습 중 하나인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이 바로 그것. 적선공덕행은 입춘 전날 선행을 하는 것으로,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길가의 더럽고 위험한 것들을 치우거나, 냇가의 다리를 손보고, 또 거지 움막 앞에 밥을 한 솥 지어 몰래 가져다 놓는 것과 같은. 옛사람들은 대가 없이 좋은 일을 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액막이 방법이라 여겼다. 

동풍이 불고, 겨울잠 자던 애벌레가 눈을 뜨며, 물고기가 다시 물밑을 헤엄치기 시작하는 때. 옛사람들이 감지한 입춘의 모습은 이른바 해동(解凍)의 풍경이다. 그러나 정작 입춘 즈음은 한겨울에 지지 않는 한파가 맹위를 떨치는 시기. 어쩌면 세상은 덥히는 것은 계절보다 한발 앞선 사람의 마음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녹지 않은 성성한 눈발 속에서도 발아래 온기는 그렇게 퍼져만 간다. 

부산에서 만나는 ‘봄 설’
입춘의 순우리말은 바로 ‘봄 설’. 한해의 첫 절기이자, 따뜻한 봄을 여는 입춘은 설에 진배없는 의미를 지닌다. 

입춘을 맞아 부산으로 향한 것은 이 도시만의 생동하는 에너지를 만나기 위함이다. 세밑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국제시장, 길을 걷던 젊은이들이 홀린 듯 빨려 들어가던 보수동 책방골목까지. 오랜 불경기의 시름 속에서도 이곳을 지켜온 생의 불빛은 여전히 강하고, 건재하다. 그다음 목적지는 바로 기장군에 자리한 ‘해동용궁사’. 해동용궁사는 손을 뻗으면 닿을듯한 푸른 바다, 수변 바위와 해변을 따라 자리한 이국적인 모습으로 사랑받는 부산의 명소. 하지만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에게 마음의 의지처가 되어주었던 터다.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님은 바닷가 외딴 섬과 파도 몰아치는 험한 곳에 화현하여 중생을 구제하시는 분. 해동용궁사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해수관음대불은 이 순간에도 고통의 바다를 헤매는 이들의 등대가 되어 곁을 지킨다. 그리고 그것은 빛으로, 매일 아침 이 도량을 가득 채우는 장엄한 일출과 함께 더욱 현현히 빛나는 것이다. 

자비의 빛으로 
드넓은 동해와 천지를 가득 메우며 떠오르는 일출. 그 빛을 한 아름 받아안는 해동용궁사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엄하다. 이런 이유로 매년 새해면 이곳을 찾은 참배객들로 치열한 일출의 전장(戰場)을 이루곤 한다.

이른 새벽, 세상이 여명으로 물드는 시간. 해동용궁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마주한 광명전의 금빛 와불. 가만히 누워 미소짓는 그 모습으로 새벽의 고요한 사찰은 더욱 충만하다. 저 멀리 기장 앞바다를 가로지르는 고깃배와 그 뒤를 따라 날아오르는 새들의 모습.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어느새 말없이 바다를 향해 두 손을 모은다. 그리고 이윽고 떠오르는 붉은 태양! 지구의 역사와 함께 매일 반복되는 그 빛의 기적 속에, 어제는 지평선 너머로 저물고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달나라로 여행을 가는 시대가 되었어도 여전히 봄은 희망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오늘도 다시 이 지구별을 힘껏 굴리는 모든 이들에게 어서, 봄이여 오라. 

▶한줄 요약 
입춘의 순우리말은 바로 ‘봄 설’. 한해의 첫 절기이자, 따뜻한 봄을 여는 입춘은 설에 진배없는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