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원의 불교미학산책] 3. 혜화문-〈연화면경〉 사천왕과 발우
면면히 계승된 붓다의 행지만이 영원할 뿐 가사 입고 가져야할 몸가짐 있고 발우 펼친 이상 법식 베풀어야 불불조조로부터 내려온 가사와 발우가 행지이면서 불법의 전부
결국 어떠한 것이 기특한 것일까? 그것은 정자의 발우가 지금 천동산으로 옮겨왔으며 오직 밥을 먹을 뿐이다.
도겐 〈정법안장〉 ‘발우’
우리는 동대입구 6번출구역을 나와 공자의 세계가 아닌 붓다의 세계를 오르기로 했다. 그대로 언덕을 올라가도 좋지만, 옆으로 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대뜸 우리를 맞아주는 건 사명대사 상이다. 육환장을 진 훤칠한 스님을 보니 전쟁이라는 시대의 한복판에 나타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지남이 저 지팡이였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반대로 육환장을 지고 시대의 한복판이 아니라 산 중으로 들어간 여러 스님이 생각난다. 설잠 스님이나 성철 스님과 같은 분들이다.
성철 스님이 육환장을 짚은 건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고 결심한 봉암사 결사부터가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때 여러 가지 변화 중에 가사, 발우 그리고 육환장의 소지가 있다. 가사는 지눌 스님의 것을 본받아 비단과 같이 좋은 옷감이 아니라 괴색의 광목으로 소박하게 했다고 하며 육환장과 삿갓은 탁발을 위해 다시 도입한 것이라 한다. 발우는 목발우에서 쇠발우로 바꾼 것이라고 하는데, 색이 바래버린 가사나 탁발을 위한 육환장은 청빈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더라도 발우를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동국대학교의 중문인 혜화문에 다다른다. 사명대사 상으로부터 50보가 좀 넘을까 말까 하는 사이에 성철 스님의 발우까지 생각의 꼬리가 물고 물어진다. 혜화문은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이름이 남아있는 곳으로 사찰로 말하면 일주문에서 사천왕문에 해당한다. 단지 솟아있는 기둥 두 개에 철문이 달려 아무런 내용이 읽히지 않는 모양새이지만 어떤 가람의 공간을 결정짓는 경계선이라는 의미에서 사천왕문이라고 해야할 듯 하다.
사천왕은 동남서북의 각각 네 방향을 지키는 신으로 붓다께서 성도하시자 찾아와 그분을 수호하고 보필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특히 깨달은 이에게 어울리는 식사에 발우가 필요함을 알고 하늘에 보관 중이던 과거불의 발우를 가지고 와 붓다께 전달하는 역할을 했음이, 사명대사 상으로부터의 짧은 생각 속에서 자연스럽게 기억나게 된다. 그 발우는 이후 정법의 상징으로 불교도들의 성물이 되어 오랜 시간 전달되게 된다.
언젠가 선종이 불립문자를 표방한 이후 교종의 경전에 대한 안티테제로 가사와 발우가 불법의 상징물로서 채택된 것이란 설명을 본적이 있다. 정밀한 논증도 아니었고, 이미지의 극적 대조를 위해 붙여진 이론 같아서 설득이 되지는 않았다. 차라리 저번부터 계속 인용하고 있는 도겐의 〈정법안장〉에서 ‘행지(行持)’를 읽었을 때 어렴풋이 가사와 발우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가사와 발우는 의식주의 생활을 규범지어 버리는 도구들이다. 가사를 입은 이상 가져야할 몸가짐이 있고, 발우를 펼친 이상 법식을 베풀어야 한다. 이는 가깝게는 현세의 붓다인 석존, 멀게는 여러 과거의 붓다로부터 내려온 것으로 이런 붓다들로부터 면면히 계승되어온 행위들을 그대로 받들어 지니는 것, 이것을 행지라고 한다. 불불조조로부터 내려온 것은 사실 이 가사와 발우의 행지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경전을 들지 않더라도 가사와 발우는 불법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인도든 중국이든 붓다의 정법안장을 이어 받아온 상징물은 경전보다는 이 가사와 발우였다. 잘 들어보지는 못했을 경전이지만 〈연화면경〉이라는 경전에서 붓다께서 열반한 이후 중생들이 의지할 사리와 발우의 내용이 나타난다. 여기서도 사천왕들은 다시 나타나 붓다께서 열반하시는 모습에 슬퍼하며 무상함에 대해 노래한다.
그런데 붓다께선 이런 사천왕의 게송을 들으시고 갑자기 발우 얘기를 꺼내신다. 붓다께서 사용하신 발우는 앞으로 북인도에 해당하는 카슈미르, 경전 상에서는 계빈에 이르게 되며, 이 발우와 함께 계빈에서는 불법이 융성하게 피어난다고 예언하신다. 즉 정법의 기간이 계빈을 중심으로 연장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앞서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듯이 계빈의 융성한 불법도 연화면이라는 외도가 불법을 파괴하고자 세운 원으로 그 나라 왕으로 태어나 붓다의 발우를 깨버릴 것이라고 하며, 이 깨어진 발우가 우리가 사는 남섬부주를 돌면서 불법을 유지시키다가도 어느 날엔가 사라져 버린다고도 예언하신다. 이때가 바로 말법의 시작이다.
여기서 남섬부주에서 자취를 감춘 발우는 홀연히 용궁에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이어 수미산 중턱의 여러 하늘세계를 거쳐 다시 용궁으로 돌아와 미륵불이 나타나실 때를 기다린다고 한다. 이 발우는 어떻게든 현재의 붓다에서 미래의 붓다를 연결하는 도구로서 과거칠불로부터 미륵불로 이어지는 불불조조의 일이며, 붓다와 붓다만이 아는 유불여불의 일인 것이다. 발우는 공양받는 그릇이 아니며, 가사를 두르는 것도 옷을 입는 일이 아니다. 그저 내려온 행지일 뿐이다. 붓다의 육신은 덧없다. 붓다의 행지만이 영원할 뿐이다. 행지를 채우는 발우의 깊이는 손가락 세 마디보다는 더 깊을 것이다.
깊이에 대한 질문은 예술가들에게 깊은 멜랑콜리를 자아내게 한다. 〈향수〉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단편인 ‘깊이에의 강요’에서 주목받던 신인 작가가 깊이가 부족해 보인다는 평론을 듣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고통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파괴해 가면서 깊이를 찾아 내면 속으로 들어가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깊이가 없다는 사실 뿐이고, 그 끝은 죽음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의 작품만은, 혹은 표현하려 했던 나의 심상만은 자신의 고유성을 갖기를, 남이 생각해보지 못한 저 깊은 숙고와 사색이기를 바라지 않는 예술가는 없겠지만, 하늘 아래 새로운 것도 사유되지 않았던 것도 표현되지 않았던 것도 없을 것이다. 이 무한한 고통의 굴레 속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하나인데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꽉찬 고유성과 깊이에 대한 자만은 그 자체로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의 짧은 견해로 25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붓다께서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자아의 부재를 명확히 하셨다. 이런 누구보다도 깊은 숙고와 사색을 사성제로 표현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견해로 그 분께서는 스스로가 우쭐해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시간을 뛰어넘어 오직 과거불의 행지를 떠올리셨을 뿐이다. 모든 과거불은 이렇게 행하셨다. 석존께서는 이를 받아 지닌다. 행지는 무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