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배의 24번의 계절] 2. 대한 _ 제주 길을 걷다

겨울 끝자락, 新生의 봄을 기다린다 

2025-01-17     장보배 작가
한라산과 함께 제주를 상징하는 아름답고 신령한 산, 성산일출봉. 거대한 성과 같은 그 모습에 ‘성산(城山)’, 해가 뜨는 모습이 장관이라 하여 ‘일출봉(日出峰)’이라 했다. 

반복되는 하루를 한 걸음 한 걸음 넘어가며 한 해를 채워가는 것. 차곡차곡 쌓이는 그 성실한 여정만큼 고귀한 삶의 반석은 없다. 하지만 새로이 돌아오는 절기를 가늠하다 보면 시간의 흐름을 조금 더 친밀하게 체감하는 기분이 든다. 

다음 목적지에 들어서기 전 언제 코너를 돌아야 하고, 비록 지금 조금 숨이 차고 고되어도 며칠 뒤엔 저 고개 넘어 햇살 가득한 땅으로 들어설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 말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그 절기와 절기 사이의 틈새에서 시작한다. 한해의 마지막 절기가 저물고, 다시 새로운 문이 열리는 희망과 가능성의 시간. 푸른 바다와 검은 돌, 그리고 1만 8천 신들의 고향. 저 아름다운 탐라의 땅에만 허락된 ‘신구간’을 찾아 떠난다. 

신구간이 돌아온다
혹시 이 땅의 신들이 모두 부재해 버린 세상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지? 그 어떤 것도 허락이 필요치 않고, 무슨 일이라도 탈 없이 이루어지는 시간. 바로 제주의 ‘신구간’ 문화다. 

‘신구간’은 ‘신구세관교승기간(新舊歲官交承期間)’의 줄임말로, 대한이 시작된 후 5일째부터 입춘 2일 전까지 7일간의 시간을 말한다. 이 시기는 세상의 모든 신이 옥황상제께 보고를 올리기 위해 하늘로 오르고, 또 아직 새로 임명받지 못한 신들은 내려오지 않은 공석의 시간. 말 그대로 신구 교체가 이루어지는 찰나의 ‘프리 패스’ 기간인 셈이다. 

제주의 신구간 문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737년(영조 13)에 지백원이 지은 <천기대요(天機大要)>의 ‘세관교승’이라는 항목에도 신구간과 비슷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선조의 신주를 옮겨도 흉상을 꺼리지 않아도 되고, 집을 짓거나 묘를 옮기는 것을 마음대로 해도 나쁠 것이 없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제주에서의 신구간 문화는 육지의 그것보다 더욱 강하고, 견고하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제주 민간에서는 집수리, 이사 등은 언제나 이 ‘신구간’에만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외의 기간에 이러한 일을 벌이면 큰 ‘동티’가 난다고 말이다. 

하지만 신구간을 마냥 민간 신앙적인 측면으로 보는 것도 곤란할 듯하다. 기온이 따뜻한 제주에서 평균 5도 이하인 날은 한해 8일이 채 되지 않는데, 바로 그때가 신구간의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

영하의 날씨가 드문 제주에서 세균 번식이 잦아드는 신구간에만 통시(화장실)와 외양간의 수리, 묘소 이장, 벌목, 이사 등이 주로 이루어진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변소 관련의 동티가 대개 눈아피〔眼病〕로 나타났다는 것은 세균 감염을 무시할 수 없다.

‘오뉴월에는 아진 방석도 못 고쳐안나(오뉴월에는 앉은 방석도 못 옮겨 앉는다)’는 제주 속담은 고온다습한 날씨에 더위를 먹거나, 질병을 막으려는 이른바 ‘동티 예방’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따지고 보면 제주를 넘어, 뭍에서도 유념해야 할 필수 수칙인지도 모를 일이다.

‘제주해녀박물관’에는 이 땅의 역사를 온몸으로 일궈온 제주 여성들의 발자취를 볼 수 있다. 섬과 바다, 가정을 지킨 초인적 삶의 바탕에는 기도가 있었다.

어머니 여신에게서
신들의 고향이라고 일컬어지는 섬. 그 수가 하도 많아 에둘러 1만 8천. 제주는 이 땅의 신화와 민간신앙의 원형이 가장 생생히 남아있는 보물창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칠고 예견할 수 없는 자연, 그보다 더 혹독했던 이 섬의 설움 많은 역사 속에서 제주의 사람들은 세상 모든 신에게 의지하고 또 위로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을 지킨 것이 어디 1만 8천 신뿐이랴. 

제주시에 자리한 ‘설문대여성문화센터’와 구좌읍에 자리한 ‘제주해녀박물관’에서는 제주를 대표하는 신화, 그리고 이 땅의 역사를 온몸으로 일궈온 제주 여성들의 발자취를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이는 제주섬 탄생 신화의 주인공인 설문대할망. 설문대할망은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우면 한 발은 성산일출봉에, 또 한발은 관탈섬에 걸쳐질 만큼 거대한 여신이었다. 하지만 아들들인 오백장군을 먹이기 위해 밤낮 죽을 끓이다가 가마솥에 빠졌다는 이야기에선 고단한 제주 여성들의 삶과 닮아있는 ‘어머니 여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제주 사람들에게 오곡 씨앗을 전해준 농경의 여신 ‘자청비’, 여성을 향한 차별과 한계를 이기고 자신의 운명을 멋지게 개척한 ‘감은장아기’, 바다 건너에서부터 오곡과 가축을 전해 탐라의 개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벽랑국의 세 공주. 제주 여성의 강한 생명력은 태고의 여신에게서부터 전해진 자질일 것이다. 

제주를 지킨 힘 
제주의 세운 것이 여신들이라면, 제주를 지켜온 것은 바로 보통의 여성들이다. 

조선 시대부터 부역과 진상을 피해 수많은 남자가 섬을 떠나면서 급격히 줄어든 인구. 그나마 뱃일을 하던 남성들이 목숨을 잃는 것이 부지기수였던 과거. 사람이 줄어도 부역은 줄지 않았기에 육지에선 볼 수 없는 여성 군졸 문화가 생겨났고, 아무리 힘들어도 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출륙금지령으로 제주 여성들은 오롯이 이 섬을 먹이고, 지키고, 살려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크게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제주해녀박물관’에서는 그 생생한 역사를 더욱 체감할 수 있다. ‘평생 해녀로 살았다’는 것은 물질 하나로 우주를 살렸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제주의 여성들은 가정을 책임지고, 항일 운동가로, 전후 망가진 제주를 재건한 선구자로, 제주에서 독도까지 우리의 섬과 바다를 지키며 초인적 삶을 살아냈다.

아이를 낳고 3일 만에 바다로 돌아갔다는 어느 해녀 할망, 그리고 추운 겨우내 분화구에서 소 떼를 품고 지켜냈다는 성산일출봉의 역사는 왜인지 닮아있다. 

한라산과 함께 제주를 상징하는 아름답고 신령한 산, 성산일출봉. 거대한 성과 같은 그 모습에 ‘성산(城山)’, 해가 뜨는 모습이 장관이라 하여 ‘일출봉(日出峰)’이라 했다. 

성산일출봉에 앞에 다다르면 우거진 나무 뒤로 단정한 기와지붕 하나가 눈에 띈다. 바로 오랜 시간 성산의 곁에서 제주 사람들과 함께 한 사찰, 동암사(한국불교태고종)다. 

1934년, 일제의 칼날 같은 압제 바람 속에서 성산 마을 사람들은 성산일출봉 앞에 절터를 마련하고 불사를 시작해 동암사를 창건했다.

봄은 온다
가는 곳마다 절이 있고, 그만큼 불교와 토속신앙이 어우러진 당집도 많아 ‘절 오백, 당 오백’이라 했던 제주.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훼불’을 넘어 ‘멸불’에 가까운 탄압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4·3의 비극을 거치며 제주불교의 역사는 휘청거렸다. 하지만 제주 사람들은 결코 불교를 놓지 않았고, 스님들 또한 그 손을 놓지 않고 서로를 지켜낸 것. 

동암사는 1934년 성산 마을 주민들이 절터를 마련하고, 불사를 시작하여 창건된 사찰이다. 일제가 황국신민화 정책을 내세우며 제주의 땅과 바다를 헤집고, 저 성산일출봉을 참호 삼아 죽음의 무기들을 옮겨 나르던 시절. 하지만 그 칼날 같은 압제의 바람도 사람들의 불심을 꺽진 못한 것이다. 그 모든 영락의 계절은 지나, 지금껏 동암사는 성산과 제주의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머문다. 휘황하고 담장 높은 문대신, 겨울에도 푸르른 제주의 나무들을 대문 삼아 누구라도 반기며. 

소한과 대한 사이의 어디 즈음, 제주에 눈보라와 강풍이 몰아치던 날. 성산일출봉에는 관광객들이 바람에 몸을 휘청이면서도 삼삼오오 바다 전망대 앞에 모여 섰다. 그때 “저기 해녀가 있다!”하고 누군가 외치는 소리. 그것은 해녀를 만난 기쁨이라기보다, 놀라움과 경의에 가까운 외침이었을 것이다.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해녀의 삶.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신의 세계와 가장 맞닿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겨울을 마무리하고 새봄을 맞는 변화와 신생의 시간. 대한이 가면 입춘이 온다. 봄은 그렇게 이 아름다운 신들의 섬으로 돌아올 것이다. 바람을 타고, 저 바다 여신들의 숨비소리와 함께. 

▶한줄 요약 
그 어떤 것도 허락이 필요치 않고, 무슨 일이라도 탈 없이 이루어지는 시간. 바로 제주의 ‘신구간’ 문화다. ‘신구간’은 대한이 시작된 후 5일째부터 입춘 2일 전까지 7일간의 시간을 말한다. 신구 교체가 이루어지는 찰나의 ‘프리 패스’ 기간인 셈이다. 겨울을 마무리하고 새봄을 맞는 변화와 신생의 시간. 대한이 가면 입춘이 온다. 봄은 그렇게 이 아름다운 신들의 섬 제주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