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연의 수행 다이어리] 집중의 사마타로 ‘나’ 없는 곳에 이르다
2. ‘전면의 집중점’에 머물기 사마타로 대상 집중하면 ‘초월의식’ 체험하게 돼
전면의 집중점에 지속으로 집중하면 빛이 발생한다.
존재에서 벗어나 자유롭기 위한 수행의 시작으로 받게 된 화두. 화두를 왜 받아야 하는지 또 화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지난 연재①에서 언급했다. 그 첫 단계를 ‘①(자기자신에 대한) 자각의 불을 밝힌다〔이 뭣고?〕 → ②진정한 마음으로 의문을 낸다〔화두의 지속〕 → ③갑갑한 덩어리의 형성〔의단 또는 율극봉, 집중점의 확보〕’로 정리하였다. 이렇게 집중점이 확보되면, 이제 오롯이 집중하는 것만 남았다.
오롯이 ‘계속’ 집중하기
가슴 한가운데에 갑갑한 느낌이 있는 곳(의단)에 마음을 두고 집중을 한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대로 다시 집중점으로 돌아온다. 망상은 끈질기게 일어나지만, 다시 끈질기게 집중점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한다. 나의 수행은 화두 타파라는 사마타 수행에서 시작했기에, 우선 여기서는 (망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과정 전체를 관觀하는) 위빠사나 수행과는 망상을 대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밝힌다.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붙여놓고 오롯하게 집중하는 수행을 사마타 수행이라 한다. 그 대상이 화두이건, 염불이건, 호흡이건, 아랫배의 느낌이건, 붓다 시대의 40가지 사마타 주제이건,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지속적으로 두는 방식이라면 모두 사마타 수행이다.
간화선의 경우, 화두를 통해 의도적으로 집중점을 만들어 그것을 집중 대상으로 삼는 방식을 택한다. 가슴 한가운데 형성된 의단에 마음을 한참 집중하다 보니, 그것을 기점으로 약 40∼50센티의 앞쪽 ‘전면에 집중점’이 자연스레 확보된다.
이 ‘전면의 집중점’에 계속 집중을 하니, 몸의 경계가 없어져서 그 집중점이 몸 안인지 밖인지 분별이 없어지고, 그냥 허공 속에 그 지점만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6차크라(가슴 차크라)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다. 계속 집중을 이어가니 ‘망상’과 ‘집중’을 왔다 갔다 하던 마음의 비례가 점점 ‘집중’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집중점 잡기’ 삼매로 가는 입구
좌선을 시작한 지 첫 8시간 정도는 불안정한 집중을 안착시키는 과정이었다. 중간중간에 다리를 풀기도 하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잠깐 새우잠도 잤지만, 중요한 것은 집중 대상을 놓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앉은 지 9시간을 넘어가니 마음이 잡도리하는 시간보다 대상에 집중된 시간이 많아지고, 집중력에 가속도가 붙어 밀도 높은 집중도를 이어가게 된다. 이렇게 집중도가 확 높아졌을 때는, 몸이고 뭐고 목숨마저 거추장스러운 듯, 단 1초도 집중을 놓치고 싶지 않아 가속 페달을 밟는다. 그러면, 좌선한 지 약 10시간째부터 12시간이 되는 사이에, 집중 대상과 하나가 되는 일련의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집중 대상에 지속으로 몰입하니 거기서 빛이 발생한다. 처음에는 불투명한 하얀 빛이었다가 이것이 점점 더 하얗고 투명해지고 또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빛은 몰입의 강도에 따라 그 밀도와 크기가 달라졌다. 마음을 계속 대상에 붙여두니, 대상은 빛이 되고 마음은 빛과 하나가 된다. 그리고 ‘나’는 없다. 가슴의 집중점 부위가 뻥 뚫려 빈 공간으로 느껴진다. 내가 없는 것이 신기해 잠깐 집중에서 나올 때 급히 몸을 더듬어 보기도 한다.
사마타의 메커니즘, 무(無)와 하나됨
붓다의 수행법은 ‘정(定)+혜(慧)’로 집약되는데, ‘정’에 해당하는 것이 ‘사마타’ 수행이고, ‘혜’에 해당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사마타 수행은,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므로서 온 ‘의식’을 그것에 지속으로 붙여 놓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나의 대상’에 ‘의식’이 머무름에 따라, 항시 ‘나’에게 붙어 있는 ‘의식’이, ‘하나의 대상’ 쪽으로 ‘분리’되어 떨어져 나가게 된다. 의식이 ‘내’게 붙어 있지 않고, 대상에 붙어 있으니, ‘내가 없다’고 느낀다. 대신, 마음은 집중 대상과 하나가 된다.
어떤 대상이건 계속 집중을 하면, 빛이 발생하고 투명하게 되고, 결국 집중하는 주체와 집중 대상인 객체, 모두를 넘어서는 초월의식(우주의식 또는 바탕의식)을 맛보게 된다.
평생을 ‘나, 나, 나’에게만 집착했는데, 갑자기 나를 담고 있는 광활한 허공(바탕 자리)에 눈뜨게 된다. 있는 것(有)만 보다가 없는 것, ‘무(無)의 이미지’에 눈뜨게 된다. 평생을 ‘내’게 붙어있던 ‘의식’이, 비로소 ‘나’와 분리되니 이렇게 자유롭고 시원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