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테크놀로지, 불교로 읽다] 12. 바이오테크놀로지와 ‘공교명(工巧明)’

바이오테크놀로지에 불교적 성찰을 불교 五明 중 ‘工巧明’ 적용 가능 기술, 공예, 음양 등 익히는 과정 스님들 바이오테크놀로지 학습을 4차산업혁명 기술 관련 논의 필요

2025-01-06     공일 스님/ 봉은사 포교국장

바이오테크놀로지를 불교로 읽어보려 한 것이 벌써 12번째가 되었다. 한 고비를 정리하며 숨고르기를 할 때이다. 변명이라면, 바이오테크놀로지의 화려함과 장밋빛 미래를 어설프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합리화라면, 물질만능 시대의 휘황찬 영광의 뒤안길을 파헤치며 정작 살펴야할 본질은 무엇인지 생각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대관세찰(大觀細察)의 균형있는 시각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성찰로 과학만능의 신화가 합당한 것인지 점검하였다. 정작 연장치료, 성적자기결정권, 안락사, 생명복제 등 첨예한 문제는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한편으로는 당연시하며 지나쳐 온 상식들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 과정에서 생명과 질환 등의 개념들을 짚어 보았다. 일상화된 질병들의 배후에 어떤 인식적 토대가 놓여 있는지 두드려 본 것이다. 이로써 생명현상과 관련된 사항들을 과학철학의 입장으로 문제 제기한 것이다. 

우리시대의 과학 철학은 인식론으로 전향하였다. 이에 반해 바이오테크놀로지 분야는 첨단기술의 영역이기에 철저히 현장의 기술로 치닫고 있다. 향후 논란의 중심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높음은 물론 위험한 상황에 봉착하고서야 성찰의 시선을 찾을 것이다. 그때는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철학적 시선은 뒤늦게 회복할 사인이 아니다.

불교의 다섯 가지 지혜인 오명(五明) 가운데 바이오테크놀로지는 공교명(工巧明)에 배속시켜 검토할 수 있다. 공예(工)적 정교함(巧)을 뜻하는 공교한 지혜(明)는 기술, 공예, 음양, 역수 따위에 관한 학문으로 불교 수행자들이 익혀야 하는 덕목이었다. 바이오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와 기술 습득으로 해석하기에 적합한 개념이다. 위에서 설명한 것들은 이 공교명과 바이오테크놀로지의 상관성을 인식의 전향으로 읽고자 에둘러 설명한 것이다. 

〈굉지선사광록〉(宏智禪師廣錄)에는 인식의 전향과 관련지어 다음과 같은 선적 표현이 있다. 

경계를 빼앗는 것은 당나귀가 우물을 들여다 보는 것과 같고
사람을 빼앗는 것은 우물이 당나귀를 보는 것과 같다.
삼천 세계와 백억의 몸이 있다고 하여도
별도로 안배할 필요 없이 단지 존재하는 것이 옳으니!
(奪境也如驢井 奪人也如井驢 三千世界百億身 不用按排只者是 ; T48. 39a25-27)

인식대상과 인식주체로 이분화시키는 탈경(奪境)과 탈인(奪人)의 문제는 선의 이해라는 주제로 제한시켜 적용할 것만은 아니다. 당나귀가 우물을 보는 것(驢?井)과 우물이 당나귀를 보는 것(井?驢)은 이항대립되어 진영의 논리로 흐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현상계를 긍정하고자 별도로 어떤 것을 안배할 필요는 없다. 

공일 스님/ 봉은사 포교국장.

 

이제 우리 사회는 다시금 원칙을 돌아볼 때이다. 신체는 불국토의 기호에 해당한다. 가려움과 통증은 우리 몸에서 벌어지는 분할적 증상이 아니라 동일한 선상의 문제이다. 신체적 자극이 미약하면 가려움이고 역치 이상의 자극은 통증으로 파악하는 것이 감각이다. 이항적 구조는 사회와 정치로 확장시켜 한반도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활용하기에도 좋다.

공일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