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연의 수행 다이어리] 진심 담긴 의문…화두타파 첫걸음
1. ‘이뭣고’ 의문 던지기 화두 향한 간절한 의심 ‘의단’ 삼매 향한 초입, 점점 키워야
나이 40대를 진입할 무렵, 나는 심신이 매우 지쳐있었다. 과중한 업무에 밤낮없는 육아, 안팎으로 콱 막힌 삶. 어느 순간 건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살았다. 매일 가까스로 버틴다는 위태로운 시간이었다. 아픈 몸에 쉬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어느 순간, 살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일었다. 온갖 진료과목을 다 도는 병원 순례를 하였으나, 딱히 이상은 없다는 말에 ‘만신창이인데, 그럴 리가’ 했다. 결국, 정신과 쪽으로 접수해 보라는 의사의 말에 ‘아! 내가 지금 뭔가 잘못되고 있구나’라는 각성이 왔고, 일단 모든 걸 멈추었다.
‘진심’으로 화두 들기
분명 부처님께서 ‘자유와 해탈’이 있다고 하셨는데, 과연 있는 걸까. ‘업’이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인가. 존재에 대한 의문과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 병들어 죽건, 늙어서 죽건 어차피 죽을 몸인데 ‘수행하다가 죽자’라는 생각에 난데없이 벽을 보고 앉았다. 하지만 어떻게 좌선해야 할지 몰랐다. 운 좋게도 화두 지도에 능통한 귀한 인연이 찾아와, ‘보는 것은 무엇인가, 주인공을 찾아라’라는 화두를 받았다. 평생 ‘밖으로만 향하던’ 마음이 생전 처음으로 ‘안으로 향하는’ 순간이다. 눈이 보는가, 아니 눈알이 보는가? 인식이 보는가, 아니 마음이 보는가? 보고 있는 ‘나’의 실체는 무엇인가?
화두 숙제를 받은 기간은 2주. 그 기간 뒤에 장시간 좌선하기로 약속했다. 그동안 열심히 답을 찾아 법사님께 점검받는 족족 그것이 답이 아니라 하신다. 그러자 가슴의 특정 부위가 갑갑해 왔다. 뭐가 뭉친 것처럼 갑갑해서 어쩔 줄 모른다. 어디가 아픈가? 병원을 가야되나? 허리도 아프고 비염도 심한데 심장 부위의 갑갑함까지. 장시간 좌선할 수 있을지 겁을 먹고 호소하니, 법사님은 빙그레 웃음 짓는다. “됐네 됐어! 잘하고 있어!” 뭐가 됐다는 거지? 가슴이 갑갑해 죽겠는데, 뭘 잘하고 있다는 거지?
‘의단(疑團)’ 만들기
화두 들기의 첫걸음은 의단 만들기이다. 의단이란 화두(존재에 대한 의문)가 풀리지 않아 심장 또는 가슴 부위에 에너지가 뭉쳐 덩어리지는 현상을 말한다. 의단을 다른 말로 의심(疑心) 또는 의정(疑情)이라고도 한다. ‘이 뭣고’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간절한 의문에 답을 찾지 못해, 마음이 생겨나는 심장 부위에 의문 덩어리가 생기고 극심한 갑갑함을 느끼게 된다. 이 느낌이 덩어리진 것을 ‘율극봉 또는 금강권’이라고도 임제종 양기파에서는 말한다. 율극봉은 가시 밤송이를 말하고 금강권은 쇠뭉치를 말한다. 밤송이 같은 것이 목구멍이나 명치에 걸려, 뱉을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는 갑갑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을 앞뒤가 막힌 은산철벽에 비유하기도 한다.
가슴 부위에 ‘의단 덩어리(율극봉)가 생기느냐 안 생기냐’는 ‘화두를 타파하냐 못하냐’의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 이유는 의단이 만들어진 지점이 ‘집중점’이라는 중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들어졌다면 일단 50%는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머지는 이 집중점을 놓지 않고 지속으로 집중하는 것만 남았다. 이 ‘집중점의 확보’가 삼매로 가는 초입인 셈이다.
‘화두’ 어떻게 드는가
똑같이 화두를 받더라도 의단이 생기는 사람이 있고 안 생기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이 뭣고’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을 ‘진실로 성심으로’ 들었냐 아니냐에 따라 나뉘게 된다. 건성으로 아무리 오래 화두를 들어봤자, 그 안에 진정한 의구심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효과를 보기 힘들다. 그래서 인생의 코너에 몰려 도대체 삶이 무엇인지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간절함에 압박받는 사람일 수록 유리하다. 이렇게 화두를 들면, 밖으로만 향하던 마음이, 드디어 안으로(근원인 ‘나’로) 향하게 된다. 여기서 화두를 들 때 ‘진정한 의문’의 중요성을 말했는데, 진심으로 궁금해하면 머리가 아니라 심장 부위에서 에너지가 발동하게 되고 의단이 형성된다. 우리가 정말로 억울하거나 답답하거나 화가 날 때, 가슴을 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뭣고’ 화두를 왜 받는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의 시작’이다(①스스로에 대한 자각의 불을 밝힌다) → ‘진실로 이것이 무엇인가’ 의문을 품는다(②의문을 진실되게 품는다) → 심장 또는 가슴 부위에 에너지 덩어리(갑갑한 지점)가 형성된다(③의단, 집중점의 확보).
강소연 중앙승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