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붓다를 만나다] 1. 장엄한 불교문화유산서 만나는 옛 여성들 이야기

연재를 시작하며 전통사회 속 여성 압제서 벗어나 평등 세계 가고팠던 절실한 마음 불교 가르침 실천하고 지탱하며 붓다의 딸로 살고자 했던 여성들

2025-01-04     이승혜 큐레이터
상궁 최혜원 필 〈묘법연화경〉(2권 1책) 발원문, 조선, 1626년, 대한불교조계종 원효사. 사진출처=국가유산청

원컨대 이 몸이 이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남자로 변하여
부처님 도량에 들어 부처님을 뵈옵고
듣지 못한 법문을 듣고 보지 못한 진리를 보아
영원히 번뇌에서 벗어나서
마침내 부처를 이루게 하소서

원컨대 이 공덕으로 
불교는 붓다를 이루는 것, 즉 성불(成佛)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종교이다. 한 번 질문을 던져보자. 여성의 몸으로 부처가 될 수 있는가? 여성은 과연 성불할 수 있는가? 불교는 무차무등(無差無等)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대답은 “가능하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리적 이상과 실제 현실 사이의 차이는 매우 컸다. 남성 출가 수행자들의 주도로 전개된 불교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그 대답은 부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여성에게는 다섯 가지 문제가 있어서 여성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는 ‘오장설(五障設)’과 여성은 먼저 남성으로 변한 연후에야 성불할 수 있다는 ‘변성성불(變性成佛)’ 등의 사상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비록 이 사상들이 석존이 남기신 가르침과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의 가치에 모순되긴 하지만, 여성의 몸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출현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이러한 가르침이 불교 교단 안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이후에도, 여성 불자들은 ‘법을 담는 그릇’[法器]으로서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좌절하고 고뇌하는 일이 빈번했다. 

상궁 최혜원 필 〈묘법연화경〉(2권 1책) 본문,, 조선, 1626년, 대한불교조계종 원효사. 사진출처=국가유산청

붓다를 만난 여성들
성불을 목표로 하는 종교 전통 안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불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부정당한다는 것. 이는 신앙의 주체이자 불교 공동체의 일원인 여성의 종교 경험에 분명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번 연재의 주제는 아니다. ‘그녀, 붓다를 만나다’에서는 이 같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도대체 왜 불교에 맹렬히 귀의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는 여성에게 어떤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여성은 불교를 위해 무엇을 실천했을까? 

여성과 불교라는 테마로 기획 전시회를 준비하던 무렵, 큐레이터인 필자는 이에 관해 여러 석학들의 자문을 구했었다. 그때 필자에게 돌아온 것은 불교미술 중에 여성이 발원하고 후원하지 않은 것이 있겠냐는 웃음기 어린 대답이었다. 오히려 여성이 관련되지 않은 것을 찾는 게 더 빠를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불상이나 불화를 조성하며 그 과정과 동참한 이들의 소망을 적은 기록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여성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불교의 전래에 대해 기록한 공식적인 역사서나 불교 문헌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여성들이다. 어쩌면 불교 전통 속 여성의 자리를 되새겨보는 작업은 불교미술과 불교문화의 조명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겠다는 깨달음이 이때 필자에게 왔다. 

예컨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제3 ‘흥법(興法)’편에는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왔던 시기와 이를 전래한 이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이에 의하면, 소수림왕 즉위 2년(372)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고구려에 사신과 함께 순도(順道) 스님을 보내 불상과 불경을 전했다고 한다. 이어서 소수림왕 4년(374)에는 진(晉)에서 아도(阿道) 스님이 왔다. 국왕은 이듬해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두 스님을 각각 살게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기록 속에서 여성들의 존재와 자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충주지역에서 발견된 높이 12.4cm의 광배(光背)에서는 6세기 고구려를 살아갔던 한 여성 불자의 염원과 실천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광배에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맑은 믿음을 실천하던 아엄(兒奄)이란 여성이 불상을 조성하며 남긴 기록이 남아 있다. 아엄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도 불법을 만나 듣기를 바라고, 일체중생이 이 고귀한 서원을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석가모니상을 정성껏 만들었다. 누구보다도 단단하게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갔던 고구려 여성의 삶의 단면이 이 작은 광배 안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역사는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는 기록이 인색하다. 대왕대비마마, 대비마마, 중전마마 등 극히 일부 여성들의 삶의 편린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조선의 제16대 임금인 인조(仁祖) 대를 살았던 상궁(尙宮) 최혜원(崔慧遠)도 마찬가지이다. 2004년에 세상의 빛을 본 경기도 의정부 원효사의 <법화경>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그녀에 대해 알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상궁 최혜원은 <법화경>을 손수 한글로 필사한 재가 수행자이자, 궁궐에서 왕실 가족들을 위해 복무하던 전문 직업인이었다. 표지 내부에 끼워져 있던 낱장의 별지에는 마치 약력처럼 상궁이라는 자신의 지위, 최씨라는 성과 혜원이라는 법명, 그리고 을축생(1565년)이란 생년을 한문으로 적어두었다. 법명으로 당당히 자신을 밝힌 그녀는 <법화경>·<참경(懺經)>·<약사경(藥師經)>·<장수경(長壽經)>·<지장경(地藏經)> 등은 각 1건, <금강경(金剛經)>은 3건을 봉헌할 정도로 깊은 불심을 지녔다. 

단정한 필체로 흐트러짐 없이 <법화경>을 써 내려갔던 그녀가 품었던 마음, 그것은 바로 이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남자로 다시 태어나 붓다가 되는 것이었다. 여성의 몸으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출현하고 천 년도 넘게 흐른 시점이었지만, 최혜원은 이 같은 번뇌를 가슴 깊이 품고 있었다.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과 차등을 상징하는 ‘82년생 김지영’ 전에 ‘1565년생 최혜원’이 있었던 것이다. 전통사회 속 ‘여성’이란 삶의 조건이 내포한 압제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평등한 세계로 가고자 했던 그 절실하고 뜨거운 마음, 그 마음이 상궁 최혜원이 자신이 지닌 재주와 정재(淨財)를 아낌없이 내어 불경을 꾸미는 동기가 되었으리라. 

우리가 만난 불교여성
여성들의 깊은 신심은 불사(佛事)의 후원으로 이어졌다. 이 나라 방방곡곡, 하늘의 별처럼 많은 절들과 기러기 떼처럼 줄지은 탑들의 태반은 여성들의 신앙심이 낳은 것이다. 백제의 왕실 원찰에 사리를 공양한 창왕(昌王)의 누이와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武王)의 정비 사택왕후(沙宅王后)에서부터 신라 수도 금성에 분황사를 창건하고 자장 대사를 후원한 선덕여왕(善德女王)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끊임없이 불교를 외호하고 후원하여 불교가 이 땅에 자리 잡도록 도왔다. 고려시대에도 왕실 여성들은 불화와 불상, 향완 등을 시주한 대단월(大檀越)이었다. 귀족 여성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경전을 염송하고 사경을 발원했으며, 부처님 뱃속에 들어갈 복장(腹藏)을 같이 공양하기도 했다. 지역사회의 여성들은 불교 공동체인 향도(香徒)를 결성해 함께 재를 올리고, 사찰의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불교 공예품을 공양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왕실의 최고 웃어른인 대왕대비부터 천민 여성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아무리 통제하려 해도 그에 굴하지 않고 불교를 믿고 따랐던 여성들의 기록이 즐비하다. 

‘그녀, 붓다를 만나다’는 서원(誓願)과 회향(廻向)의 주체로서 살아갔던 옛 여성들의 이야기를 장엄한 불교미술품을 통해 풀어보려는 시도이다. 뛰어난 붓글씨 솜씨로 부처님께 지극한 공양을 올렸던 상궁 최혜원처럼, 불교를 믿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며 지탱했던 이 땅의 ‘불교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시대가 정해 놓은 한계를 벗어나 붓다의 딸로서 살고자 했던 옛 여성들을 지금 다시 만나보자.

 

▶ 이승혜 큐레이터는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 시카고대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삼성문화재단 리움미술관 큐레이터로서, 전시와 연구 그리고 강연을 통해 한국 불교미술과 불교의례를 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4년에는 동아시아 불교미술 속 여성의 자리를 재조명한 특별전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