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불교생활] “엄마는 관세음, 친구는 부처님…불교, 멀리 있지 않아요”
신년기획 '찐불자' 인터뷰_김효승 작가 모태불교서 시작된 부처님 인연 지금껏 100여 불화·불상 조성해 재료·마음속 ‘부처님’ 찾는 마음 “佛畫 보고 모두가 편안해지길”
김효승 작가(15, 조치원중)는 불모(佛母)다. ‘부처님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진 불모는 불화(佛畫), 불상(佛像)을 조성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김 작가는 재료 속 부처님을 찾아내기 위해 오늘도 어김없이 붓을 든다. 그는 올해로 만 15살. 화실보다는 피시방과 노래방이, 부처님보다 친구들이 어울릴 법한 나이다. 그러나 김효승 작가의 붓은 언제나 부처님을 향해 있다.
김효승 작가의 불연(佛緣)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했다. ‘모태불자’인 셈이다. 어머니가 서울 도선사에서 종무원으로 일했던 것이 인연이 됐다. 세상에 나오고 나서도 자연스럽게 김 작가의 놀이터는 사찰이었고 부처님과 스님은 그의 친구였다.
가랑비에 옷 젖듯 불자가 된 그는 자연히 부처님을 그리는 것에도 관심이 갔다. 5살 때부터다. 그는 어릴 적 불교방송을 많이 봤는데, 자꾸 부처님과 보살님을 가까이서 친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곧바로 스케치북과 지점토를 집어 들고 한 분, 두 분 독학으로 부처님을 조성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김 작가는 100여 점에 달하는 불화와 불상을 탄생시켰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최근에 조성한 ‘소조석가모니불좌상’이다.
‘소조석가모니불좌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한 건 계룡 갑사를 찾았을 때였다. 장엄하게 앉아있는 부처님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렸다. 김 작가는 그 자리에서 불상을 만들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백방으로 불상 조성법을 알아봤다고 한다. 관련 책자는 탐독하는 것은 물론, 선배 불모 작가를 찾아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그는 1층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부처님을 조성해 나갔다. 그렇게 3개월의 시간이 지나, 개금불사까지 마친 여법한 부처님이 모습이 드러났다.
“석가모니 부처님 좌상을 만들 때, 누구든지 이 부처님을 뵙게 된다면 잠시라도 좋으니까 다친 마음이 치유되길 발원했어요. 그래서 이 부처님이 제일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그런 모두가 편안해지길 바라는 자비심을 가지고 만든 거니까요.”
다만 뭇 중생의 행복을 발원하기 이전에 그에 걸맞은 신심(信心)과 수행이 뒷받침해야 한다. 김 작가 역시 온전한 부처님을 찾기 위해 신행생활에 열심이다. 집에 작은 불단을 설치한 그는 매일 참선 수행과 <금강경> 독송으로 산란해진 마음을 가라앉힌다. 작품 조성에 진전이 없거나, 마음속 번민이 올라올 때는 집 근처 사찰인 세종 녹야원을 방문해 스님들과의 차담으로 마음은 물론 가끔 떨리는 손끝까지 다잡는다. 김 작가는 이 지난한 수행과 불모의 길 끝에는 완전한 괴로움의 소멸, ‘깨달음’이 있길 서원했다.
“부처님은 ‘모든 게 괴로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괴로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관통하는 진리가 담긴 ‘불성(佛性)’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성을 볼려면 업장을 녹이는 수행이 필요하죠, 제가 부처님을 열심히 조성하는 이유도 그 업장을 소멸시키기 위한 방편입니다.”
미술에 재능이 있지만, 김효승 작가의 꿈은 ‘출가’다. 정형화된 화법(畫法)을 배우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완성도 높은 부처님을 만드는 ‘수행자’가 되고자 하는 게 그의 인생 목표다.
“대학교에서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나면, 머리 깎고 출가자가 되고 싶어요. 스님이 되는 길이 가장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해요. 불모이자 출가사문으로 살아가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끝으로 그는 신년을 맞아 불교를 공부하고자 하는 초심자들을 위해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어렵고 난해해 보이지만, 어떤 종교보다도 삶과 맞닿아 있는 일상의 종교가 ‘불교’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불법(佛法)은 멀리 있지 않으니, 조금씩 알아가길 바랬다.
“불교는 일상에 있는 삶의 종교예요. 엄마가 ‘관세음보살’이고 친구가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불교가 어렵다고 겁먹지 말고 천천히 다가가 보면 삶 곳곳에서 깨달음의 맛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김민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