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경전에세이] 24 반야심경 ③
가자 건너가자 완전한 피안으로 ‘반야심경’을 지극한 마음 봉독 이유는 수행자-보살-붓다 과정을 밝히기 때문 언제까지 구도자로 살아야 할 것인가 ‘아제아제~’ 외우는 이유 여기에 있어
대중목욕탕 같은 공의 경지
대중목욕탕에 가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값비싼 옷을 걸치고, 또 제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다해도 발가벗고 욕탕에 들어오면 그 누구라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 속에서는 바깥에서의 온갖 가치들이 무의미해집니다.
그와 같이 공(空)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사람들이 그토록 애착하거나 미워하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관세음보살이 인생을 또는 인간을 진지하게 살펴보니까 세속 사람들에게는 절대적이라 여기던 가치들이 “사람 하나만 놓고 보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사람이 그렇게 나뉘는 건 아니더라”라는 것을 알아차렸단 것입니다. 사리자를 또 부릅니다. 그동안 인간 존재를 분석하며 공부해온 덕분에 공(空)의 경지에까지 도달했고, 그 공의 차원에서 그동안 공부해온 교리들은 전부 아무 것도 아닌 것, 없는 것이라고 일러줍니다. 그런 까닭에 〈반야심경〉에서는 ‘~없고, 없고’라는 말이 그렇게나 많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물론 주의해야 할 것이 있으니 ‘선’도 없고 ‘악’도 없으니 그냥 되는 대로 살라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악을 끊고 선을 추구하며 바르게 사색하고 수행하며 살아온 사람(수행자, 아라한)에게 이제는 그 선(善)과 바름(正)에 얽매지 말고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나만 해야 해?
아라한 중에 아라한인 사리자를 불러서 자신의 깨달음 경지에 머물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주는 관자재보살, 그가 살짝 걱정이 되었나 봅니다.
‘지금까지 죽도록 고생하며 수행해서 온갖 번뇌를 없애 열반의 경지에 안착했는데 또 나아가야 한다고? 왜 나한테 이러는 거지?’
어쩌면 사리자의 얼굴에서 이런 표정이라도 읽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에게 이렇게 말하며 다독입니다.
보살도 바로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수행하기 때문에 그 마음에 조금도 걸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걸림’이란 차별심, 분별심이라 생각합니다.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차별과 분별, 성자와 범부의 차별과 분별…. 이런 분별심이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으면 그야말로 속 시원한 대자유의 행복을 만끽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분별심마저 마음속에서 시원하게 제거하면 두려울 것도 없고 착각도 완전하게 사라지게 될 터이니 바로 이것이 진짜 열반(구경열반)이라고 일러줍니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 정체를 완전히 파악해서 넘어서야 옳겠지요.
결국 우리는 부처가 되어야 한다
〈반야심경〉을 왜 읽을까요? 법회 식순 앞자리에 〈반야심경〉 봉독이란 순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야심경〉을 지극한 마음으로 읽는(봉독) 이유는, 수행자(아라한)-보살-붓다의 과정을 밝히는 내용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런 불자님들이 읽었던 〈반야심경〉은 부처의 경지인 아뇩다라삼약삼보리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의식하지 않았지만 부처님 앞에서 불자님들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반야심경〉을 읽으면서 맹세한 셈이 됩니다. 어떠신가요? 받아들이시겠어요?
“어휴! 부처가 된다고요? 성불하라고요? 됐습니다. 됐어요. 난 그냥 불교신자로 살다 갈 거예요. 무슨 부처씩이나?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아요.”
많은 불자들은 이렇게 손사래를 칩니다. 사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우리들 보통 사람들에게 너무 막연하고 너무 멀고 너무 힘든 길의 끝에 있는 목표 같아서 대부분 이렇게 사양합니다.
그런데 이거 아세요? 불교라는 종교는 바로 이렇게 ‘부처 된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겸손한 듯 보이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참으로 교만한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요. 너무나 뜬금없게 느껴질 정도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렇습니다. 교만이라는 말을 부처 되겠노라 나서는 사람에게 쓰지 않고 어찌 감히 부처 되겠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는 사람에게 쓰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교만 중에서도 가장 교만한 것을 증상만(增上慢)이라고 합니다. 부처 될 생각은 아예 없고, 내가 부처 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증상만자(增上慢者)’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야기를 자신 있게 글로 쓸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묘법연화경〉 ‘방편품’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대법회를 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은근히 대중에게 들려주는 말씀이 ‘붓다의 경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중생들이 왜 번뇌가 있고, 왜 괴로움에 시달리고, 왜 악업을 저지르는지, 어떻게 하면 번뇌를 모두 없앨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은 하지 않고 ‘붓다의 경지’를 찬탄하는 말씀을 하고 있지요.
다소 뜨악했을 것입니다. 사실 붓다의 경지는 깨달아서 붓다가 되기 전에는 제대로 알지 못할 텐데 왜 법회에서 굳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법회에 모인 대중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모든 대중들의 궁금증을 한 몸에 짊어진 사리자가 부처님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를 묻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에구, 그런 것 물어보지 말라. 내가 대답해 주어도 그대들이 알 수가 없다.”
삼세번을 청하고 대답을 거절하는 부처님과 사리불입니다. 결국 부처님이 사리불의 청에 못 이겨 본격적으로 법문을 하려 하시는데, 이때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집니다. 그 자리에 모인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5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리기 때문입니다. 경전에서는 말합니다. “이들은 죄업이 무겁고 교만하여 얻지 못한 것을 얻은 척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은 척하는” 자들입니다.
부처님 앞에서 법문 듣기를 거부하고 물러났는데 부처님은 그들을 붙잡지도 않고 오히려 사리불에게 말씀하시지요.
“(저들이 떠나고 나서 남은) 여기 이 대중은 가지나 잎은 하나도 없고 순전히 열매만 남아 있다. 사리불아, 그와 같은 교만한 사람들은 물러가는 것이 오히려 마땅하다. 너는 이제 잘 들어라. 너를 위하여 말하리라.”
아제아제의 뜻
수많은 불자님들이 오늘도 아주 정성스레 〈법화경〉을 사경하고 봉독합니다. 틀림없이 두 번째 품인 ‘방편품’도 수없이 읽고 쓰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 품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라는가라며 붓다의 경지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사람은 정작 얻어야 할 것은 얻지도 못했으면서도 다 얻은 척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법화경〉을 사경하면 집안에 평화와 행복이 온다는 믿음을 지니신 분들은 사실 〈법화경〉의 메시지는 이것이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경전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전 속 메시지처럼 나도 부처가 되겠다고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묘법연화경〉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대승경전들은 거의 다 부처가 되려고 마음을 낸(발심한) 보살들에게 들려주는 부처님 말씀입니다. 저 유명한 〈화엄경〉, 정확하게는 〈대방광불화엄경〉은 이런 보살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마음가짐과 수행내용을 일목요연하게 들려주는 경입니다. 〈화엄경〉을 읽으면서 범부중생인 내 마음속 번뇌를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하면 복을 받고 잘 살 수 있는지 이런 것에 관한 부처님 말씀을 찾아보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내용이 담긴 것은 대승경전이 아닙니다. 〈법화경〉이나 〈화엄경〉과 같은 대승경전은 ‘내 수행의 완성’을 목적으로 수행한 구도자에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과 세상 모든 이들의 행복과 그들의 성불을 목적으로 수행하도록 촉구하는 경이기 때문이지요.
니까야, 아함경과 같은 초기경전은 내 번뇌를 없애고 싶은 간절한 범부중생의 마음으로 읽어가시고, 〈금강경〉이나 〈법화경〉 〈화엄경〉과 같은 대승경전은 세상을 구제하려는 보살의 마음으로 읽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 구도자로 살아야 할지 답답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아서 힘들기만 합니다. 그럴 때 힘을 내라고 하는 주문이 바로 〈반야심경〉 속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입니다. 가니, 가니, 건너가니, 건너가서 완전히 피안에 도달하니 그곳에 보리(모지)가 있구나. 사바하~.
끝은 있으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도달할 때까지 쉬지 않고 “아제아제~”해야 합니다. 당신이 불자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이 쓰인 것이 경전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