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 경주 남산에 오르다] 23. 칠불암과 마애불상군
칠불암, 인도 영향 받은 석굴사원 아니었을까 숲 따라 1시간여 가면 칠불암 도착 남산 대표 마애불상군, 순례자 맞이 법당 마애불상 모두 동쪽 향해 조성 초기불교 전래됐음을 보여주는 증거
염불사지 삼층석탑에서 과수원들을 옆에 두고 칠불암을 향해 숲길을 900m 정도 걸어가다 보면 오른편에 승소곡(僧燒谷)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계곡의 이름을 해석하면 스님들의 다비장이 있는 골이라는 뜻이 된다. 500m 정도 올라가면 승소골 절터(승소속 제1사지)가 있는데, 다비를 한 후 스님들을 위해 기도를 하던 절터라고 전한다. 이곳에는 참으로 예쁜 승소골 삼층석탑이 있었다. 지금은 경주박물관 정문을 들어서면 나타나는 왼편 작은 소나무 언덕의 맨 위에 세워져 있다.
1930년에 승소골 절터 서북쪽의 언덕 위에 무너진 채 발견되어, 1935년 경주박물관에 옮겨졌다. 이후 1975년 현재의 소나무 언덕 위에 세워 놓았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2층 기단의 삼층석탑이다. 상륜부는 없어진 상태이며 높이는 356cm이다. 상하 기단에 모두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삼층석탑 가까이에 다가서지 못하기에 1층 기단의 안상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괜찮다. 각 면에 두 개씩 새겨진 멋지고 예쁜 2층 기단의 안상이 멀리서도 잘 보이니까. 무엇보다 멋진 석탑인 것이 1층 몸돌마다 하나의 큰 안상이 새겨져 있는데 안상의 안에 양각의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안상의 문양을 보고 조성 시기를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연구한 적이 있다. 그래서 여러 안상 문양을 살펴보다가 갑자기 ‘왜 명칭이 안상이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안상은 코끼리 눈이라는 뜻인데 코끼리 눈일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를 보면서 ‘명칭이 잘못 됐구나’ 했다.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밑 기단은 입체적인 상다리다. 이 상다리의 무늬가 석탑에 새겨진 안상과 같은 모양이었다. 감은사지 동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상다리의 공간 안에는 신장이 있었다. 갑자기 승소골 삼층석탑 일층 몸돌에 새겨진 안상 안의 사천왕상이 생각되었다. 입체적인 상다리 무늬를 돌에 새기면서 안상이라고 하는 명칭의 문양이 된 것이다. 안상이란 명칭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이름 지은 명칭이라고 한다.
경주박물관 승소골 삼층석탑 안내판에는 안상을 ‘상다리 무늬’라고 명칭하고 있다. 나는 경주박물관에 있는 승소골 삼층석탑의 안내판에 있는 명칭인 상다리 무늬가 안상보다 정확인 명칭이라고 생각된다. 박물관에 전시된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처럼 입체적인 불상의 기단 받침도 입체적인 상다리 무늬인 것이 확인된다. 안상이 아니라 상다리 무늬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일제강점기 일본사람에 의해 시작된 안상이라는 명칭을 상다리 무늬라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층석탑 상층기단의 한 면마다 2개의 상다리 무늬(안상)를 새긴 석탑은 8세기 말∼9세기 초 조성된 경주 무장사지 삼층석탑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무장사미타전조(藏寺彌陀殿條)’와 ‘무장사지 아마타불 조상 사적비’를 통해 확인된다. 〈삼국유사〉 는 원성왕(재위 785~798)의 아버지 효양이 무장사를 세웠다고 하며, 사적비에는 소성왕(재위 799~800)의 명복을 위해 아미타불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8세기 말∼9세기 초에 삼층석탑도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후 9세기 전기가 되면 석탑의 상층기단 한 면에 2개의 상다리 문양을 새기는 양식은 사라진다. 승소곡 삼층석탑은 기단에 2개의 상다리 문양을 새기는 양식을 따르면서, 1층 몸돌에도 상다리 문양을 새기고 양각으로 사천왕상을 새기는 새로움을 더했다. 종합해보면 승소곡 삼층석탑은 9세기 전기 조성된 삼층석탑이 된다.
사천왕은 동쪽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에는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에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에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있다. 사천왕은 불법을 지키는 하늘의 신으로 수미산에 악신이 다가오는 것을 막는다. 사천왕의 손에 든 지물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라서 누가 무엇을 들고 있다는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다. 다만 탑을 들고 있으면 신라부터 현재까지 변함없는 북방의 다문천왕이다. 다문천왕은 사천왕의 대장으로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도 한다.
천왕이 들고 있는 병장기는 이해하기 쉽다. 악을 물리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면 밀교의 영향으로 병장기인 지물이 변한다. 동방의 지국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다. 전투를 준비하는 신장이 비파를 들고 있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이것은 음악을 즐기는 건달바라는 신을 지휘한다는 의미다. 또한 용을 손에 쥐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광목천왕이 있다. 이것은 용이 아니라 이무기다. 용이 아닌 해답은 한 손에 이무기를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여의주를 들고 있는 것이 힌트다. 이무기는 여의주를 물고 있어야 용이 된다. 그렇기에 여의주를 뺏어 힘 빠진 이무기를 잡은 모습인 것이다.
다문천왕이 탑을 들고 있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 수 있겠다. 사천왕의 대장인 다문천왕이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을 어깨 위로 들고 있는 것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것이다. 불교의 신앙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면 된다. 어떤 전쟁에서도 승리할 것이란 믿음의 상징으로 탑을 들고 있는 것이다. 또한 탑이 아니라면 쥐라고 착각하는 입에서 보물을 토해내는 몽구스를 들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다문천왕을 재물복을 주는 신으로 섬겼던 옛 문화의 흔적이 남은 것이다. 다문천왕이 탑이 아니라 허리에 손을 대고 있다면 손에 몽구스가 있다. 이러한 몽구스를 잡은 모습은 구례 화엄사, 여수 흥국사, 순천 송광사, 양평 용문사, 홍천 수타사의 다문천왕에서 확인된다.
이제 칠불암(봉화곡 제1사지)을 향해 걸어보자. 탁 트인 풍경이 펼쳐지는 남산의 다른 코스에 비해 칠불암 가는 길은 숲속 안을 걸어서 1시간 반 정도 가야 하기에 지루함이 있다. 가다가 작은 개울가에 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명상에 들기도 하며 쉬엄쉬엄 걸으면 대나무 숲길이 나온다. 여기서 계단을 오르면 칠불암이다. 칠불암을 오를 때마다 느낀다. 길을 좀 다듬으면 어떨까 하는. 칠불암까지 다듬은 조금만 좀 넓고 편한 길이었으면 참 좋겠다.
칠불암은 암석 바위산이 시작되는 중턱에 축대를 쌓아 터를 만들어 조성되었다. 남산을 대표하는 마애불상군으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조형성과 규모가 순례자를 맞이한다. 지금의 건물은 1930년대에 세워졌다. 그러나 그 이전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사찰의 터에 세운 것이다. 경내 대지는 산 중턱이라 경사가 있기에 북쪽과 동쪽에 축대를 쌓아 지금의 터를 만들었다. 법당과 마애불상 모두 동쪽을 향해 조성되어 있다. 동쪽을 향한다는 것은 초기불교가 전래 됐을 때의 모습이다. 부처님께서 동쪽의 샛별을 보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하여 인도의 불상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초기 시대인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절터나 불상이 동쪽을 향하고 있는 이유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이 되면 거의 모든 사찰은 남쪽을 향하게 된다. 이유는 인도불교 문화에서 중국불교 문화의 전통으로 바뀐 것이다.
중국불교 문화에서 부처님은 황제나 왕의 존칭으로 표현된다. 그렇기에 부처님 계신 건물을 황제나 왕이 있는 건물처럼 전이라 명칭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황제나 왕은 남쪽을 향해 앉는다. 그렇기에 중국불교의 문화에서 불상은 남쪽을 향하는 것이 전통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초기 불교문화에서는 동쪽을 향해 조성되던 불상이 조선시대가 되면 남쪽을 향하는 불상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상식 하나 더. 불상의 수인도 인도불교의 영향과 중국불교의 영향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인도는 오른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중국은 좌상우하라 해서 왼편을 숭상한다. 그렇기에 아미타불상이나 비로자나불상의 수인에서 오른손이 올라오면 인도불교의 영향이고 왼손이 올라오면 중국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찌 되었건 동쪽을 바라보는 칠불암의 불상은 인도불교 문화를 보여주는 초기의 한국불교의 특징이다.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7구의 불상이 있는 칠불암은 경내에서 석경의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총 4점이 일제강점기부터 출토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석경은 화강암에 새긴 〈금강경〉으로 8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창림사지에서 수습된 〈법화경〉 석경이나 구례 화엄사 각황전 내벽에 세운 〈화엄경〉 석경처럼 칠불암은 〈금강경〉을 새긴 석경을 건물 내부에 두른 것으로 추정된다.
칠불암 법당 옆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길이는 8.4m이고 높이는 2.15m의 반원형이다. 이 바위의 중앙 면에 아미타 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삼존불 정면으로 1.5m의 간격을 둔 앞에 사각인 방형의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가로 1.8m에 높이가 1.9m 정도 되는데, 각각의 면마다 불상을 새긴 사방불이 있다.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의 뒤쪽과 측면에 목조 건축의 흔적인 사각의 홈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방불의 바위 윗면에도 기둥을 세운 흔적이 남아있어서 건물이 칠불을 감싸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상상해본다면 칠불암은 인도 석굴사원을 모델로 지어진 경주 남산의 석굴사원이 아니었을까. 특히나 내부에 석경을 두른 석굴사원으로 얼마나 멋지고 경이로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