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 경주 남산에 오르다] 22. 동남산 소재 석탑들

남산 불국토 불사 이루니 해동이 흥하리  1금당 1탑의 창림사지와 천룡사지 남산 구릉 위의 대표적 평지사찰들 부처님 치아사리 모셨던 창림사지 신라 국운 함께 할 것이란 천룡사지 천룡사 복원이 이뤄지니 ‘국운융성’ 

2024-11-11     무진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경기 광주 빛고운절 회주
경주 남산 천룡사지와 천룡사지 삼층석탑. 천룡사는 신라의 국운을 함께한 사찰로 전해진다.

보통 동남산의 불국토 순례는 통일전 앞 주차장에 버스를 세우고 시작한다. 칠불암과 신선암을 참배하는 왕복 코스다. 주차장에서 몇 걸음 움직이면 삼국시대 연못인 서출지가 바로 보인다. 여름에는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며, 가을에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연못에는 조선시대 지은 이락당(二樂堂)이 있다. 서출지에서 ‘양피 저수지’를 향해 걷다 보면 거의 다다를 무렵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오산곡 제1사지)이 남산 능선을 배경으로 우람하게 서 있다. 여기가 <삼국유사〉 사금갑(射琴匣)에 나오는 ‘양피사’로 보인다. 이름이 양피사 동·서 삼층석탑이면 더 멋지지 않을까! 명확한 근거가 없다면 (전)양피사 동·서 삼층석탑이면 될 것이다. 이름이 명확하지 않으면 전하고 있다는 (전)을 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찰은 산에 있다고 보통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평지에 있던 사찰들을 거의 모두 없애버려서 산지의 사찰만 남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사찰은 산에 있다’라는 생각이 고정된 것이다. 도심 근방의 평지에 있던 사찰은 산지 사찰과 비교할 때 더 크고 웅장했다.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오산곡 제1사지)이 있던 사찰도 그렇다. 서탑 옆에는 최근에 창건된 불탑사가 있는데 내부에는 옛 사찰의 초석과 장대석이 있다. 금당 자리 더 뒤에도 최근 창건된 문수암 법당이 있다. 이 일대 전체가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이 있던 사찰 터다.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은 서로 다른 모습의 쌍탑으로 특이한 모습이다. 동탑은 높이가 7.04m이고 서탑은 5.55m로 동탑이 높다. 1916년 해체되었는데 서탑의 1층 몸돌에 빈 사리공이 있었다. 동탑은 2층 지붕돌 상부에 사리공이 있었는데 청동불감파견과 여러 가지 사리물품이 발견됐다. 

동탑은 모전탑의 형식으로 조성했다. 모전탑은 벽돌 탑처럼 만든 석탑을 말한다. 지붕돌의 밑과 위가 각각 똑같은 5단으로 조각된 삼층석탑이다. 2중의 지대석 위에 잘 다듬은 돌 네 개를 다시 이중으로 겹쳐서 8개의 다듬돌이 하나의 기단석을 이룬다. 기단석 위에는 3단의 받침돌이 1층 몸돌을 받치고 있는 것도 특이한 모습이다. 남산의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과 선도산 오르는 길에 있는 서악동 삼층석탑과 함께 경주 지역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전탑 형식의 석탑이다. 

서탑은 2층 기단의 삼층 석탑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삼층석탑 양식이다. 2층 기단에는 각 면에 2구의 신장을 둘러서 양각했는데 총 8구의 팔부신장이 새겨져 있다. 팔부신장은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천룡팔부라고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팔부신장이 삼층석탑에 조성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8세기 말부터이다. 경주 남산에는 창림사지 삼층석탑과 남산동 서탑이 있다.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에서 칠불암 쪽으로 가다가 작은 개울 다리를 건너면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봉구곡 제1사지)이 보인다. 2009년 복원된 동탑은 1963년에 불국사역 광장으로 옮겨 (전)이거사지(移車寺址)의 탑재와 섞어 서 있었다. 이거사지는 청와대에 모셔져 있는 ‘경주 방형 석조여래좌상’이 있던 사지다. 한쪽에는 이거사지에서 나온 석탑 부재가 쌓여 있다. 2003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한 결과 회랑지와 중문지 등이 확인됐다. 8세기 초 창건돼 12세기에는 폐사된 사찰이다. 

두 탑은 이층기단과 지붕돌의 5단 받침 등 전형적인 신라의 삼층 석탑이다. 동탑의 전체 높이는 5.85m으로 서탑과 거의 같다. 금당 자리에는 최근 지어진 염불사가 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염불사의 유래이다.

남산의 동쪽 기슭에, 피리촌(避里村)이 있고, 마을에 절이 있는데, 이로 인하여 이름이 피리사(避里寺)라고 하였다. 절에 특이한 스님이 있었는데,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항상 아미타불을 염송하며, 그 소리가 성 안에까지 들렸다. 죽은 후에 흙인형으로 진영(眞儀)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안치하고, 그 본래 살던 피리사는 이름을 고쳐서 염불사(念佛寺)라 하였다.

남산에는 구릉 위의 대표적인 평지사찰이 두 곳이 있다. 1금당 1탑 형식의 삼층석탑이 있는 창림사지(장창곡 제3사지)와 천룡사지(천룡곡 제2사지)다. 창림사지는 <삼국유사〉에 박혁거세와 알영비가 태어난 곳에 궁궐을 지었는데 후대에 창림사가 됐다고 전하는 신라의 중요 사찰 중 하나이다. 서남산 길 오릉에서 나정을 지나 포석정으로 가기 전에 남산을 바라보면 구릉에 삼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오르면 너른 평지와 멀리 선도산의 멋진 풍경이 펼쳐져 보이는 창림사지 삼층석탑이다. 창림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불국사와 같은 경사지마다 층별로 독립된 공간이 확인됐다.

‘경주 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를 보면 창림사에는 <법화경〉을 돌판에 새긴 석경의 파견이 24점 발견됐다. 남아있는 석경 파견으로 추정해보면 높이 150cm, 너비 100cm의 판석에 1행 30자 42행의 글자가 새겨진 19매의 석경이 있었다. 법당의 내벽에 세웠을 것이다. 또한 ‘사자문 비석받침석’과 ‘석등하대석’ 그리고 두 구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경주박물관에 있으며, 쌍귀부는 삼층석탑 밑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 고분조’에 보면 신라 최고의 명필 김생이 쓴 비문도 있었다고 한다.

창림사의 삼층석탑을 조선 순조 24년인 1824에 한 석공이 탑을 깨뜨렸다. 탑을 깨뜨렸을 때 발견된 탑지를 추사 김정희가 입수해 탁본한 명문의 내용이 1940년 간행된 ‘경주남산의불적’에 있어 조성과정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경주 창림사 무구정탑지〉로 신라 문성왕 17년인 855년의 조성 연도가 확인된 탑이다.

국왕 경응(慶膺)께서 무구정탑(無垢淨塔)을 만들고 바람을 기록한 글. 당나라 대중(大中) 9년 을해년 4월 윤달일에 세우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흩어져 있던 것을 1979년 복원했다. 높이는 6.5m이다. 2, 3층 몸돌과 상층기단 팔부신장 중 4면의 석재 그리고 기단의 석재가 일부 교체됐다. 석탑은 2단 기단에 3층의 석탑을 이루는 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이다. 상단 기단의 면석에 8부 신장상을 양각으로 튀어나오게 조각했는데 남면 1구, 서면 2구, 북면에 1구만 복원되어 있다. 나머지 부분은 새로 만들어서 복원해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주위에 흩어진 탑재로 보면 복원한 탑 이외에도 2기 이상의 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 보면 1021년 고려 현종 12년에 가뭄이 심하게 들었었다. 그러자 경주의 창림사에 봉안된 부처님 치아사리(佛牙)를 개경의 궁궐 내전에 봉안하고 기도했다. 그러자 다음날 비가 내렸다고 전한다.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셨던 지금은 잊힌 신라 경주에서 귀하고 귀했던 사찰이 창림사였다.

천룡사지는 고위산 아래 400m쯤 높이의 평평한 중턱에 넓게 자리하고 있다. 차를 타고 서남산 길에서 용장골을 지나서 와룡사 쪽으로 올라갈 수 있다. 와룡사까지는 좁은 비포장길이다. 이후 1km 정도 비탈길을 걸어 오르면 어느 순간 탁 트인 하늘이 보이며 넓은 구릉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천룡사지 삼층석탑은 높이가 7m이다. 1990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해 쓰러져있던 석탑을 중심으로 주변을 발굴 조사하였다. 이때 1층 몸돌 위쪽에 깊이 15cm, 둘레 15cm의 사리공을 확인하였다. 1991년 진신사리 4과를 봉안하여 복원한 단층 기단 위에 세운 9세기 삼층석탑이다. 사찰 터에는 건물의 초석과 귀부, 석조 등이 있다. 1996년 발굴조사에서 3차에 걸쳐 중수된 금당과 총 11개의 건물지를 확인하였다. 

<삼국유사〉에 천룡사는 신라의 국운과 함께한다는 기록과 1040년 고려시대 최제안이 중건한 기록이 나온다. 이후 조선 후기까지 유지되다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천룡사는 신라의 국운과 함께한 사찰이었다.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계림(鷄林)의 땅에는 객수(客水) 두 줄기와 역수(逆水) 한 줄기가 있는데,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천재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무너지는 재앙에 이른다.” 속전(俗傳)에 중국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을 파괴하면 며칠 안에 나라가 망할 것이다”고 하였다.

신라 말에 파괴된 지 이미 오래됐다.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대성이 젖을 먹여 기른 최은함(崔殷)의 아들 승로(承魯)가 숙(肅)을 낳고, 숙이 시중(侍中) 제안(齊顔)을 낳았는데, 제안이 바로 절을 중수하여 다시 일으켰다.

고려 최제안의 중건 기록은 천룡사가 폐사돼 신라가 망했지만, 최제안이 다시 천룡사를 중건하여 고려가 번영할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이다. 지금 천룡사지에는 최근 불사를 한 천룡사가 넓은 부지에 세워져 있다. 천룡사 삼층석탑 옆에 앉아 현 천룡사 법당을 바라보며 든 생각이다. ‘경주 남산의 불국토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대한민국이 흥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