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령의 경전에세이] 21. 니까야 건너가기 ②
장대 꼭대기서 한 걸음 내딛어라 나는 장대 끝에 오르고픈 제자요 부처님, 그 기술 가르쳐주는 스승 대승경전은 중생의 마음이 아니라 보살심으로 읽어야 제대로 느껴져
아파트 11층 높이로 올라가기
‘백척간두진일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척이나 되는 장대 꼭대기에서 한 걸음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힘을 내어보라는 뜻에서 이런 말을 건넵니다. 〈무문관〉이라는 선승들의 이야기책에 수록된 이 구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입니다.
1척(尺)은 대략 30cm입니다. 그러니 백 척(百尺)은 30×100=3000cm 정도 즉 30m에 달하며 우리나라 아파트 11층 높이에 달합니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것도 다리 아프니 이 정도 높이면 당연히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 우리들 보통 사람들의 사정입니다.
그런데 이런 높이의 장대를 아무런 도구의 도움 없이 타고 오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려서부터 장대를 타고 올라가 본 사람이라면 모를까…. 웬만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훌륭한 스승이 곁에서 올라가는 방법을 잘 일러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아무튼 저 높은 장대 끝까지 꼭 올라가고픈 사람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 온갖 고생 끝에 마침내 꼭대기에 도달했다고 하지요. 그는 지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것입니다.
“마침내 해냈다!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 나는 정점에 도달했다!”
이렇게 온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싶을 것입니다. 힘들게 산 정상에 이르러서 “야호”를 외치는 기분일 것입니다. 저 아래에서 제자가 장대를 타고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스승도 대견한 마음이 들 것이며, ‘이제 저 아이가 내게서 배울 것은 없구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아래에서 그 제자의 용기를 부러워하며 올려다보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를 향한 무한한 부러움과 존경심이 가득 차오를 것입니다.
스승의 외침
백 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온 세상을 내려다보며 성취감에 흠뻑 젖어 있는 제자를 스승은 잠시 내버려 둡니다. 그 성취감을 만끽할 시간을 주어야 옳지요. 스승은 그렇게 한동안 제자가 더할 나위 없는 충만한 행복감에 젖어 있게 내버려 둔 뒤 그에게 이렇게 한 마디 외칩니다.
“자, 이제 그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내디뎌보거라.”
헉!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여기서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딛는다면 허공으로 걸어가야 하는 건데 그건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금까지 스승의 가르침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에 몸과 목숨을 걸고 꼭대기까지 도달했다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내디뎌보라는 스승의 다음 가르침까지도 믿고 따라야 한단 말일까요?
여러분이 만약 천신만고 끝에 장대 꼭대기에 올라서 성취감에 젖어 있는 제자라면 스승의 이 외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한 발 내딛겠습니까? 아니면 “됐거든요!”라면서 그냥 그 자리에서 조금 더 성취감에 젖어 지내겠습니까?
경전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에 잠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는 장대 끝까지 올라가고픈 제자요, 부처님은 그런 제자에게 친절하고 섬세하게 장대 오르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스승입니다.
“자, 먼저 손바닥의 땀을 잘 닦고, 이제 두 손으로 장대를 단단히 움켜쥐어라. 그렇지, 그렇지, 아주 잘 했다. 그렇게 두 손의 손가락을 서로 교차해서 꽉 잠그듯 장대를 움켜쥐었으면 이제 몸의 긴장을 풀어버려야 한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면 장대가 네 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됐지? 그렇다면 이제 한쪽 다리를 들어서….”
수행은 어렵다
하루 만에 이뤄낼 일은 아닙니다. 나는 수도 없이 미끄러질 테고 그럴 때마다 자책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려 들 것입니다. 스승은 이런 나를 옆에서 어르고 달래고 때로는 꾸짖으며 훈련을 시킬 것입니다. 그 과정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힘들 것이고, 웬만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장대에 오르는 일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거 하지 않고도 잘 먹고 잘 사는데 굳이 저 힘든 기술을 왜 익히려는지 모르겠다.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좋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굳이 수행하겠다고 나서지 않아도 한 생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없습니다. 배부르고 등 따숩고 욕심 덜 부리며 지내면 되니까 말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다 가지만 개중에 어떤 이들은 삶의 의미와 보람과 가치를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보기에 왜 저럴까 싶은 수행을 하면서 인생을 보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리 사셨고 그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구도자가 된 사람들도 그렇게 살았고 살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하나씩 일러 주시는 부처님 음성(聲)을 들으며(聞) 자기 수행을 이뤄나가던 제자는 뼈를 깎는 정진의 끝에 마침내 스승이 인정한 최고의 경지에 오릅니다. 부처님은 그 제자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이제 내게서 배울 것이 없다.”-이 말은 무학(無學)이란 단어로 정의됩니다.
“그대는 번뇌라는 도적을 완전히 죽였다.”-이 말은 살적(殺賊)이란 단어로 정의됩니다.
“그대는 세상의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존재이다.”-이 말은 아라한, 즉 응공(應供)이란 단어로 정의됩니다.
대승경전, 고개 내밀다
제자가 스승에게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더 이상 내가 가르칠 것이 없다”라는 말 아닐까요? 아직 스승이 살아 있으니 그 스승의 자리에 앉지는 못하지만, 이미 스승만큼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라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동안 이 지면을 통해 살펴봤던 초기경전인 아함경 또는 니까야는 스승이 제자를 이 정도 경지까지 끌어올리는 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스승으로서 제자를 달래고 꾸짖으며 제자가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 힘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라한이 도달한 그 경지는 바로 해탈열반의 경지입니다. 번뇌라는 불이 꺼져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입니다. 바로 이 경지를 얻으려고 제자는 세속의 온갖 부와 명예를 다 저버리고 수행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승에게서 인정받은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초기경전의 목적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수행이 필요하고 복도 짓고 덕도 쌓아야 합니다. 아무튼 치열한 정진 끝에 아라한이 되어 열반의 경지에 이르러 그 행복을 만끽하며 지내는데 돌연 스승이신 부처님이 입장을 바꿔버립니다.
“거기까지 오느라 정말 고생 많았구나. 잘 쉬었지? 자, 이제 일어나거라. 출발하자.”
‘대승경전’은 바로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아라한을 수행의 끝이라 생각하고 거기에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아라한이 되어 자기 번뇌를 없앴다면 또 다른 목적을 향해 새롭게 한 발을 내딛을 것인가. 아라한에 머물지 말고 그 자리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라는 경전이 바로 대승경전입니다.
경전이 애매모호한 이유
불교에는 경전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경전은 딱 두 부류로 나뉩니다.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이 그것입니다. 아함경, 니까야를 제외한 모든 경전은 다 대승경전입니다. 〈금강경〉 〈반야심경〉 〈천수경〉 〈법화경〉 〈화엄경〉 〈원각경〉 등.
불교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경전은 제각각이어서 어떤 사람은 〈금강경〉을, 어떤 사람은 〈법화경〉을, 어떤 사람은 〈천수경〉을 소개받고 읽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읽은 경전에 등장하는 교리가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고, 이 경전이 지금 범부중생인 자신의 자글자글 끓어 넘치는 속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지 전혀 와닿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냥 내 마음속을 잘 살펴보고 내 번뇌를 잘 다스리는 데에서 만족하겠다면 아함경과 니까야를 충실하게 읽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 번뇌를 없앴다면 이제 이웃과 세상을 위해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하기 때문입니다. 내 번뇌를 없애는 최고의 성자인 아라한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부처가 되는 데에 불교수행의 목적을 두라고 말합니다. 어떠신가요? 한 번 그렇게 마음을 내보시겠습니까?
그럴 마음이 나시나요? 그럴 ‘마음(心)이 난다(發)’면, 즉 발심한다면 그 사람은 이제 보살이라 불립니다. 대승경전은 중생의 마음이 아니라 보살의 마음으로 읽어가야 그 맛이 제대로 느껴집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니까야를 훌륭하게 건너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