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년 대홍수 구제자, 청호 선사 조명하다

[주목! 이 논문] 이병두의 ‘청호 선사 활동과 일제강점기 봉은사 역사’ 전국 포교당 설립, 전법도생 주도 現 봉은사 불교의례 기틀 닦기도 1925년 대홍수에 앞장서 구호활동 “불교계, 대선사 알리기 나서야”

2024-10-22     정리=김가령 기자

한반도 역사상 가장 큰 홍수였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당시 봉은사 주지였던 청호 선사(1875년~1934년)는 사중 재산을 투입하고 구조대를 이끌어 이재민 708명의 목숨을 구했다. 이후 전국의 지성인들과 사부대중은 봉은사 경내에 ‘나청호 대선사 수해구제 공덕비’를 건립하고 <불괴비첩(不壞碑帖)〉을 발간해 대선사의 공덕을 기록했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은 10월 9일 봉은사 교육관에 진행된 ‘을축년 대홍수 100주년 나청호 대선사 학술세미나’에서 ‘나청호 선사의 활동과 일제강점기 봉은사 역사’를 주제로 발표해 재난에서 구제행을 베푼 청호 선사의 업적을 조명했다. 이를 정리해 게재한다. 

청호 학밀 선사의 진영.


1925년에 전국을 처참하게 했던 을축년 대홍수 때 봉은사 주지 청호 선사가 수많은 목숨을 살려내 온 국민의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현재 많은 사람들, 심지어 불교인들도 이 일을 모르는 이들이 많고 봉은사를 오가는 사람들 중 입구에 서 있는 청호 선사 비석의 의미를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2025년, 을축년 대홍수 100년을 앞두고 청호 선사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청호 학밀(晴湖學密) 선사의 생애
청호 선사는 1875년(고종12년) 경기 고양에서 아버지 나윤천(羅允天)과 어머니 원씨(元氏) 사이에서 태어나 세수(世壽) 60세, 법랍 49세 되는 1934년 7월 입적했다.

속납 12세인 1886년 강원도 양양 명주사(明珠寺)에서 월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5세인 1889년 득도(得度)하고, 9년에 걸쳐 경·율을 두루 공부해 23세 되던 1897년에 구족계를 받았다. 다음해인 1898년(24세) 개당해 법문하자 학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성황을 이뤘다고 전해진다.

10여 년간 후학 교육에 힘쓴 대선사의 이판(理判) 능력은 전 불교계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1908년(34세) 서울의 조선불교원종(圓宗) 총무원 창설에 참여해 감사부장을 맡았고, 서울 조계사의 전신인 각황사(覺皇寺)에서 본격적인 포교 활동을 펼쳤다. 이후 1912년 가을, 당시 봉은사 판사 이보인(李普仁)의 초빙으로 봉은사의 제1대 주지로 취임, 제2대(1915년)와 제4대(1924년) 주지를 역임했다.

주지 재임 당시 청호 선사는 함경도 안변 삼방인천관동현저동옥천동 등 전국에 봉은사 포교당을 설립해 전법도생에 앞장섰다. 대선사의 법문이나 어록은 〈불괴비첩(不壞碑帖)〉, 〈불교〉지, 당시 신문 ‘모임난’에 소개된 것이 전부다.

대홍수 1년 뒤 편찬된 〈불괴비첩〉에 실린 글에서 대선사는 “적극적으로 불타의 가르침에 의해 계로써 몸을 닦아 10악을 짓지 아니하면, 우리의 중생계에는 자연히 병고액난(病苦厄難)과 같은 일체의 재앙이 그칠 것이다”며 “이는 곧 개인이 육체상의 구제를 받는 것이 되지만 동시에 이 우주 간의 뭇 생명이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스님이 지계와 ‘일체 악한 행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힘써 행하라’는 불교의 기본 가르침에 따른 자비보살행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선사는 1914년에 수륙공계의 전망장졸들의 혼백을 위로하고 극락왕생 시키려는 자비심에서 한강에 배 수십 척을 띄워 초혼제와 수륙재를 올렸다. 또한 사찰 근처 산림 20여만 평을 매입해 경내의 각종 전각을 중수, 창건해갔다.

청호 선사의 보살행
청호 선사는 봉은사 취임 이래 수륙공계의 혼백을 위로하는 초혼제와 수륙재를 지내고 법회를 열었으며 사찰 소유지를 확장하는 등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에 걸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가 전국을 뒤덮었을 때 대선사의 보살행이 두드러졌다.

1925년 7월 8일부터 시작된 장마가 19일에 그쳤는데, 특히 16일과 17일에 집중호우가 내려 용산제방이 모두 붕괴되고 강남 지역이 침수됐다. 잠실, 신천, 부리도 지역 약 1000호, 4000여 명의 주민이 모두 지붕에 올라 대피했다. 이때 잠실 5단지에 있던 큰 느티나무 두 그루에 700여 명이 올라 구조해 달라고 아우성쳤다. 당시 신문에서는 긴박했던 을축년 대홍수를 이렇게 서술한다.

“17일 밤 뚝섬과 왕십리 사이는 완연한 바다로 변하야 사면이 양양한 물천지요, 더욱이 전기까지 끊어져서 암흑세계를 이루었는데 비는 그대로 퍼붓고 밤은 더욱 깊어가고 구할 길이 없던 바 배를 부리던 사공조차 제 몸 위험을 느껴 출동을 거절하며 출동 하였던 백 명의 공병대도 사나운 물결에 어느 곳에 피난민이 있는 지 알 수가 없을뿐더러 나뭇가지와 전선줄이 장애가 되어 배를 운용하지 못하여 수재민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봉은사 주지 청호 선사는 뱃사람을 모으고 인명을 구조해 오는 사람에게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어 뱃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신천리까지 가서 노약자와 어린이부터 차례로 옮겨 총 708명을 구조했다. 구조가 완료되자 얼마 후 느티나무 한 그루는 뿌리 채 뽑혀 떠내려갔다. 당시 상황을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광주군 언주면 봉은사 주지 라청호씨는 목선(木船) 3척을 주선하여 부리도(浮里島)민 114명을 구호하여 자기 절에 수용하고, 18일에는 목선 두 척을 사서 잠실리(蠶室里) 주민 218인을 구하는 등 현재 봉은사에 수용된 자만 404인이라더라.”

이러한 청호 선사의 보살행이 알려지자, 당시 내로라하는 석학, 독립운동가, 예술가를 비롯해 타종교계 인사들까지 대선사의 공덕을 기리는 시와 그림을 전했다. 이것을 ‘후세에 영원토록 전하자’는 뜻에서 1926년 〈불괴비첩〉으로 엮었다.

“본래 그것(사람을 구한 일)은 불교의 진리이다. 다만 인연에 따랐을 뿐인데 유별나게 공덕이 있는 것이라 말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로써 세상 사람들을 감흥케 하였으니 만치 이 일을 드러내어도 좋을 것이라 생각되어 굳이 사양치 않고 이 글을 적는다.” (정인보)

“반야의 거룩한 배 가는 곳마다, 중생들 다 같이 살아나네.” (이상재)

이를 받은 청호 선사는 ‘괴사(愧事, 부끄러운 일)’란 글을 통해 소회를 밝혔다.

“여러 대인(大人)들은 그 포상이 실지에 지나쳐서 값진 시와 글과 글씨와 그림으로서 상자에 가득하니, 이것은 참으로 산승(山僧)을 편달하고 격려하여 장차 어떤 경우를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게을리함이 없이 더욱 분발하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돌이켜 보건대 어찌 얼굴 붉어지지 않을 수 있으리오.” (청호 선사)

929년 7월에는 수해 이재민 대표들의 발기로 청호 선사 수해구제 공덕비가 건립됐다. 비문은 훗날 동국대 총장을 지낸 퇴경 권상로가 찬하고, 성당 김돈희가 글씨를 썼다. 이재민 구제공로자들로 봉은사 스님들 법명을 새기고, 다음과 같이 공덕비 요지를 새겼다.

“을축년 7월 홍수로 선리부리잠실의 뽕나무밭이 큰물에 잠기고, 708인 다급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목숨을 구해 달라 외쳤다. 청호 선사가 자비로움으로 이를 구제하니, 그 덕을 잊을 수가 없구나.”

청호 선사가 대홍수가 있기 1년 전, ‘불타의 구제(救濟)를 구(求)하라’는 주제의 법문에서 “죽은 자를 구제하는 동시에 우리들 스스로도 구제해야 할 때”라고 설한 데서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구한 뜻을 확인 가능하다.

봉은사 청호 선사의 보살행, 그 의미와 과제
현재 봉은사는 영각(影閣) 안에 봉은사 역사를 지킨 스님 일곱 분의 진영과 함께 625한국전쟁 전후로 희생된 국군장병 영가 201위를 모시고 매년 호국보훈의 달에 위령제를 지낸다. 이는 청호 선사가 봉은사 주지 취임 2년 만인 1914년에 한강에서 초혼제를 봉행, 전쟁 중 목숨을 잃은 군장병들의 혼백을 위로한 보살행의 정신을 잇는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대선사가 초대 주지 재임 초기부터 전국에 봉은사 포교당을 세워 전법에 매진한 원력은 봉은사가 1960년대 대학생불교연합회 수도원을 창립해 현재까지 대학생 포교를 주도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을축년 대홍수를 전후한 시기는 불교와 출가 수행자에 대한 사회 전반의 예우가 매우 낮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1919년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 명 위창(葦滄) 오세창과 정부 수립 후 4대 국경일(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 노래를 작사한 위당(爲堂) 정인보, 기독교계 대표적인 민족운동가 월남 이상재 등 당시 지성인들이 청호 선사와 봉은사 사부대중의 보살행이 ‘사라지지 않을 기록’이 돼야 한다며 〈불괴비첩〉을 엮은 일은 청호 선사 개인과 봉은사를 비롯한 당시 불교계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준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당시 청호 선사의 보살행은 한국불교 전체가 자부심을 가질 귀중한 자산이자 기록으로 기억해야할 일이다. 불교계는 을축년 대홍수 100년을 맞는 2025년을 ‘나청호 대선사의 해’로 정해 대선사의 보살행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관련된 글, 그림,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개발을 유도해야 한다. 또한 봉은사가 ‘한국불교 중흥을 주도한다’는 사명을 갖고 1925년 봉은사의 역할과 위상을 되찾는 역할을 한다면 청호 선사의 원력과 보살행의 뜻을 이어받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