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백고좌] 조계종 가사 명장 무상 스님

“정진하는, 화두 드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라” 가사장삼 수한 스님 모습에 반해 출가 1960년대 선원서 수행하며 가사 지어 “가사 수하기만 해도 공덕이 있다지만 사문 도리 못하면 지옥행인 무서운 옷” 40년 가사 제작 “道통했던 시간” 술회

2024-10-15     문윤정/ 작가
무상 스님은… 1963년 동화사에서 월담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1965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했다. 1965년부터 범어사, 동화사를 비롯하여 제방선원을 돌면서 10안거를 성만했다. 40년을 조계종 가사 도편수로 가사 전승에 힘썼다. 2022년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2023년 법주사 율사로 법주사 보살계 산림과 교수아사리 율사로서 전국 불사를 증명하고 있다. 2024년 조계종 가사 명장으로 지정됐다.

오랜만에 법주사로 가는 길인데 비가 제법 내렸다. 법주사 입구의 정이품 소나무는 처연하게 내리는 비를 맞고 있다. 세조의 행차에 예를 다하느라 가지를 번쩍 들어 올린 소나무는 그 공로로 ‘정이품’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무심한 마음으로 임금의 행차를 도운 소나무의 보시행을 떠올린다. 법주사의 오리 숲길은 언제 걸어도 힐링 되는 길이라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데, 오늘은 한가하다. 

조계종 가사 분야 명장으로 지정된 무상 스님의 인터뷰는 주석처인 보은 법주사에서 진행되었다. 스님의 거처는 작은 불상을 모신 불단이 있고, 몇 가지의 물품만이 있다. 출가 수행자의 검박한 삶을 보여준다. 

“이 우중에 늙은이 인터뷰한다고 예까지 뭐하러 왔어요? 산중에 핀 향기있는 꽃은 숨어 있어도 향기가 백리 천리를 가는데, 그런 분들을 취재해야지요.”  

무상 스님께 ‘조계종 명장’으로 지정된 것을 축하한다는 인사를 드렸다. 스님들의 가사가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가사 한 벌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노고에 관심을 가지는 이가 많지 않았다. 무상 스님은 40년 넘게 법의(法衣)라고 부르는 가사 만들기에 전념했고, 조계종의 가사를 전승하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가사불사도 큰 원을 세워서 진행하는 불사이기에 옛말에 ‘가사는 바느질 세 뜸만 떠도 복이 있다’고 했다. 필자 역시 가사불사에 참여한 적이 있어서 “가사불사에 참여하면 공덕이 크다고 하여 경주 흥륜사의 신심있는 많은 불자들이 모여 도편수 스님의 지도 아래 한 달 정도 가사를 지었는데, 고요하면서도 경건한 분위기였습니다”라고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무상 스님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번졌다.

“천을 재단하는 사람은 재단만 하고, 다림질 하는 사람은 다림질만 하고, 바느질 하는 사람은 바느질만 해야죠. 예전엔 많게는 백 명이 모여서 했는데, 모두 일념으로 해야 만이 온전한 가사가 탄생합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가사 만드는 그 시간만큼은 도(道)통하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무상 스님께 가사 도편수가 된 인연을 여쭈었다. 

“가사 도편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가사 한 벌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법장 스님 절에 놀러갔다가 배우게 되었지요. 그런데 법장 스님이 안거가 끝나면 나를 불러 가사 불사를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다니다 보니 도편수가 되었어요.”

요즈음은 수서에 있는 가사원에서 조계종단의 가사 만드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그전까지 무상 스님은 동안거, 하안거를 뺀 나머지 날에는 가사 만드는 일에 고스란히 시간을 바쳤다. 

무상 스님은 동화사에서 월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사미계를 수계했다. 1965년에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계했다. 그 후 제방선원을 돌면서 안거수행했다. 

이내 무상 스님의 출가 인연이 궁금했다. 무상 스님이 풀어놓은 출가 이야기는 마치 엊그제 일처럼 생생했다. 

“13살, 초등학교 6학년 때 속리산 법주사로 수학여행을 왔는데, 법주사 도량에서 가사장삼을 입은 스님 한 분을 만났어요. 가사를 수한 스님의 모습이 어찌나 좋아 보이던지 ‘꼭 스님이 되어야 겠다’고 결심했어요. 중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하고 싶어 전화번호부에 나온 주소를 보고 큰 절의 스님들께 출가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어디에서도 답장은 오지 않았어요.”

13살의 소년이 가사에 반해 출가를 결심한 것도, 출가를 간절히 원해 여러 절에 전화를 한 것도 불가와 몇 생을 이어온 지중한 인연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 아닐까 싶다.  

어린 마음에도 스님이 되려면 한문을 많이 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당에서 2년 동안 한문 공부를 하였단다. 스님을 출가하게 만든 또 하나의 인연은 〈금강경〉이다.

“누님 집에 가다가 어느 골목에서 누가 책을 읽는데 하도 듣기가 좋아 무슨 책인냐고 물었더니 〈금강경〉이라고 해요. 좀 빌려달라고 했더니 자기도 원적사 사중스님께 빌려와서 안된다는 거요.” 

〈금강경〉을 얻으려 원적사에 잠시 머물고 계시는 서암 스님을 찾아간 것이 출가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서암 스님은 〈금강경 오가해〉를 건네주면서 서문의 한 구절을 읽어 보라 하였다.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둥글지도 않고 모나지도 않고 밝기는 태양과 같고 검기로는 옻칠과도 같다. 한 물건이 무슨 물건인고?’ 

무상 스님은 한문 풀이는 했어도 뜻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한 물건은 바로 마음’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속가에서 원적사가 가까웠기에 소년은 〈금강경 오가해〉를 들고 서암 스님 문하에 드나들었다. 

그러다 정월 초삼일에 서당 선생에게 세배 간다고 하면서 집을 나와 그 길로 몇날 며칠을 걸어서 대구 동화사로 갔다. 방사가 좁아서 행자로 받아줄 수 없다고 해도 소년은 막무가내로 출가하고 싶다고 버티었다. 그렇게 해서 동화사에서 국 끓이는 갱두 소임을 맡아 행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동화사의 한 사중스님이 왜 절에 왔느냐고 물었다.

“도 통하러 왔습니다.” 

그러자 사중스님이 “도는 뭐 아무나 통하나” 하기에 어린 무상 스님이 “뭐 3년이면 도통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당돌하게 말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3년 갈 것 뭐 있어? 지금 당장 통해 버려라”는 그 말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무상 스님은 1960년대 중반, 선방에 방부를 들이며 수행하다가 가사불사에 동참했다. 당시는 가사 한 벌조차 쉬이 구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대전 심광사의 가사불사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그때 가사불사의 도편수는 1930~40년대 법주사 주지를 역임한 장석상 스님 손상좌인법장 스님이었다. 법장 스님이 만든 가사를 최고로 여기던 시절이다. 

가사와 발우는 출가한 스님들이 가장 먼저 받아 지니는 물건이며, 수행자와 일생을 함께 하는 도반과 같다. 가사는 출가자들에게 계율의 상징과 같으며, 외도들과 구분하는 불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이유를 무상 스님께서 말씀해주셨다.

“부처님 당시 외도들이 잘못을 저지르고는 누구 제자인지 물으면 무조건 ‘부처님 제자’라고 했어요. 그래서 외도들과 구분하기 위해 화장터에 버려진 천을 주워 몸에 두른 것이 가사의 시작이 되었지요. 버려진 천으로 만든 것이니 얼룩도 있고 깨끗하지는 않았을 것, 그래서 분소의라고 해요.”

가사를 ‘분소의’라 부르는 것은 수행자의 하심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복전의’라고 하는 것은 불자들에게는 복을 짓는 터전이 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면서 무상 스님은 〈화엄경〉에 나오는 가사공덕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커다란 날개를 지닌 금시조는 용의 새끼를 먹고 산다. 용의 권속이 점점 줄어드니 임금용이 부처님께 하소연을 하였다. “금시조가 우리 용들을 다 먹어치우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다. 부처님께서 “수행을 열심히 한 스님들 가사를 얻어다가 3치정도의 크기로 잘라서 모두 몸에 붙이라”고 하였다. 용은 스님들의 가사를 얻어다가 모든 권속들에게 붙여놓았다.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으려고 보니 가사 입은 스님들뿐이어서 잡아먹지 못하였다. 

“용들의 목숨을 구할 정도로 가사의 위신력은 굉장하네요”라고 말했더니 무상 스님은 “가사를 수하고 있기만 해도 공덕이 있다고 하지만, 출가자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그대로 지옥행이니 우리 수행자에게는 무서운 옷”이라고 말했다. 

‘가사를 존중하면 오덕(五德)이 있다’는 말이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자비심을 길러주고 구도심을 심어주는 옷이요, 치열하게 수행하는 출가자들의 옷이기에 사견을 가진 자들이 두려워하는 옷이요, 출가 수행자들에겐 인욕의 옷이요, 계율의 옷이다. 

조계종 가사 명장 무상 스님이 합장하고 부처님을 예경하고 있다.

“웃는 얼굴로 응대하세요…복 짓는 일입니다”

‘無財七施’가 복 짓는 데는 제일 좋아
“말 한 마디로 상대 기쁘게 할 수 있어
버스 자리 양보하는 것으로 보시 가능
이를 일상에서 실천하면 저절로 복 지어”

가사에 새겨진 문양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여쭈었다. 

“가사에 새겨진 것은 한국의 논두렁이지요. 부처님 당시의 가사에 대해 기록으로 남은 것은 없고 논두렁이 새겨져 있는 것 같더라고 전해져 오는 말이 있어요.”

극락세계에 9품이 있듯이 가사에도 9품이 있다. 9조, 11조, 13조 가사는 하품이요, 15조, 17조, 19조는 중품이요, 21조, 23조, 25조는 상품이다. 가사에 극락세계를 새겨 넣은 것을 보면 출가자에게 있어서 가사의 의미가 얼마나 지중한지 알 수 있다. 

손으로 한땀한땀 바느질하여 가사를 만들 때는 한 벌 완성하는데 이십 일이 넘게 걸렸다. 가사는 조각과 조각이 만나는 조엽이 중요하여, 여기서 바느질 한 뜸만 어긋나도 전체가 틀어져서 안된다고 한다. 바느질하는 그 마음이 삼매에 들어야 할 정도로 일념으로 해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가사의 모서리에는 천왕문첩이 들어가고, 하품에 속하는 9조, 11조, 13조 가사는 기다란 조각 2개랑 짧은 것 1개가 이어져 1조가 된다. 9조 가사면 총 아홉 줄이 된다. 중품, 상품으로 갈수록 긴 것이 하나씩 늘어나고 늘어난 만큼 바느질하는 수공이 많이 들어가게 된다. 가사의 마지막엔 연봉을 달아 고리를 만든다. 

무상 스님은 2020년 법주사 선희궁에서 소장하고 있던 ‘가사 전시회’를 열었다. 스님께 그 취지를 여쭈었더니 “가사의 소중함을 알리고 싶었고, 가사에 담긴 소중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평생 가사를 만졌으니 한 번은 열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무문관〉에는 가사와 관련된 공안이 하나 있다. 〈무문관〉 16칙은 종성칠조(鐘聲七條)이다. 종소리에 칠조 가사를 입다는 공안이다. 

어느 날 운문 화상이 말했다. “세계는 이처럼 넓은데, 무엇 때문에 종이 울리면 칠조(七條)의 가사를 입는 것인가?”

종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뜻하는데 좀 더 넓게 해석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칠조 가사는 출가수행자의 옷이자 수행의 상징이다. 분별을 끊고 지극한 깨달음을 얻으라는 가르침이 담겨있다. 종소리와 칠조가사를 연결하면, 세상의 소리와 일에 흔들리지 말고 수행자의 본질에 충실하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무문 선사는 이 공안에 ‘선을 공부하는 사람은 소리나 형상을 쫓지 말아야 한다’라고 한 마디 일렀다. 수행하는 재가불자들도 새겨들을 공안이다. 

무상 스님께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늙은이가 무슨 계획이 있겠느냐”고 하면서도 “내년에 중국의 계족산에 있는 미륵도량에 갈 계획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갈 20명의 스님들께 가사 한 벌씩 드리고, 중국 가서 가사를 만들어 중국 계족산의 미륵도량에 있는 스님들 모두에게 가사 한 벌을 공양할 계획이란다. 중국의 사찰에서 한국식으로 의식을 올리려고 한다는 스님의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무상 스님은 출세간을 막론하고 말이 중요하다고 했다. 신도들에겐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남을 대하라고 하면서, 스님들이 보살들에게 하대하는 말버릇은 좋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노보살님이 남편과 자식, 며느리, 사위, 손주들까지 앞세우고 아는 스님한테 인사하러 왔는데 반말을 한다면 가족 앞에서 노보살님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스님들도 이젠 신도들에게 경어를 쓰도록 해야 한다고 거듭 힘줘 말했다. 

본지 독자들을 위한 좋은 말씀을 부탁드리자, 무상 스님은 〈잡보장경〉에 나오는 “무재칠시(無財七施)가 복 짓는 데는 제일 좋다”고 말했다. 재물이 없어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를 ‘무재칠시’라고 한다. 

일곱 가지 보시 중 첫째가 ‘화안시(花顔施)’라 하여, 부드럽고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다. 상대가 나를 웃는 얼굴로 대해주면 기분이 좋은데 이것이 바로 복을 짓는 것이다. 둘째는 언시(言施),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말을 생활에서 많이 쓰는 것도 보시이다. 셋째는 심시(心施)라 하여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돈이 없어도 말 한 마디로 상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잖아요. 착한 마음으로,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리를 양보하는 것으로도 보시할 수 있어요. 이것을 일상에서 실천하면 복도 짓고 좋겠지요.”

무상 스님은 공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일념으로 하는 것이 공부라고 하셨다. 스님은 가사불사를 이끌 때도 “정진하는 마음으로, 화두 드는 마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불자들에게 일렀단다. 그러면서 “집에서 밥을 짓더라도 가족들의 건강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서 하면 밥을 짓는 나도 행복하고 밥을 먹는 가족도 행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제록〉에서 가장 유명한 일구(一句)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주인공이 되라’는 경구는 ‘정진하는 마음으로 이 순간을 살라’는 무상 스님의 가르침과 맞닿는다. 가사를 짓든, 참선을 하든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을 사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