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경전에세이] 20. 니까야 건너가기 ①
붓다는 사람을 어떻게 나눴을까 초기경전 ‘앙굿따라 니까야’엔 ‘종기, 번개, 금강’으로 분류해 종기는 울화 많은 사람을 비유 모든 번뇌 부수는 현자는 ‘금강’ 당신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요
나는 어떤 부류일까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나눈다는 것 자체가 우열을 가른다는 것이고 이 일은 자칫 차별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란 것이 너무나 주관적이고 자의적이기 때문에 세상을 아주 편협하게 살아갈 우려가 큽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인 니까야에는 뜻밖에도 사람을 몇 종류로 나누는 문장을 자주 만납니다.
부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생명은 다 같이 소중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는 분이라 여겼는데 정작 경전에서는 사람을 어떤 기준으로 자꾸 나누고 있는 것이지요. 니까야 중에서도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해당 법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마음으로 나누다
세상에는 세 종류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종기와 같은 사람, 번개와 같은 사람, 금강과 같은 사람입니다.
첫째, 마음이 종기와 같은 사람은 화를 잘 내고 울화가 많아서 누군가 조금만 신경을 건드려도 이내 불처럼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상대를 공격하며 미움과 분노와 불만을 드러냅니다. 잔뜩 곪은 종기를 무엇인가 예리한 것으로 찌르면 고름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마음에 분노를 잔뜩 품고 있어서 누군가 스치기만 해도 불처럼 화를 내는 사람입니다.
둘째, 마음이 번개와 같은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만나는 여러 일들을 통해서 ‘아, 이것이 괴로움이로구나’,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집기)이로구나’,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구나’,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구나’라고 분명하게 압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 번개가 내리치면 사물들이 또렷하게 보이는 것처럼 고집멸도의 이치를 분명하게 보는 사람입니다.
셋째, 마음이 금강과 같은 사람은 번뇌를 완전히 부수어서 이 현세에서 해탈을 확고하게 이루는 사람입니다. 금강은 워낙 단단해서 세상 그 어떤 것도 거뜬하게 자르고 부술 수 있으니 이 사람의 지혜도 금강과 같아서 모든 번뇌를 완전하게 다 부숩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첫째 사람보다 둘째 사람이 더 훌륭하고 둘째 사람은 셋째 단계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단순히 인생이 고해라고 통찰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번뇌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자는 것이지요.
분노 앞의 세 사람
살아가면서 평생 화를 내지 않고 온화하고 상냥하게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보살 같은 삶’은 언감생심입니다. 하지만 다음의 세 종류 사람에 관한 법문을 보면 걸핏하면 화를 내는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이고 그래서 분노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바위에 새기는 사람, 땅 위에 새기는 사람, 물 위에 새기는 사람의 세 부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바위에 새기는 사람은 자주 화를 내는데 그 화가 아주 오래 지속하는 사람입니다. 바위에 글자를 새기면 쉽게 없어지지 않듯이 마음에 분노를 한번 품으면 아주 오래 갑니다.
둘째, 땅 위에 새기는 사람은 비록 자주 화를 내기는 해도 그 화가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땅 위에 글자를 새겨넣으면 바람이 조금 불거나 하면 이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지요.
셋째, 물 위에 새기는 사람은 누군가가 다가와서 사나운 말을 퍼붓더라도 쉽게 오해를 풀고 친절하게 대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입니다. 물 위에 아무리 길고 긴 문장을 써넣더라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듯 이런 사람은 누군가의 폭언이나 경멸을 당하더라도 제 마음에 담지 않습니다.
셋째 부류의 경우, 현대인들은 ‘자기가 멸시를 당하는데도 바보같이 항변하거나 맞서지도 못하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깥에서 근거 없이 내게 던지는 멸시나 분노에 일희일비한다면 결국 나는 상대방의 술수에 말려들게 됩니다. 그런 말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요.
말에 관한 세 부류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는 법문도 있습니다. 똥처럼 말하는 사람, 꽃처럼 말하는 사람, 꿀처럼 말하는 사람입니다.
첫째, 똥처럼 말한다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사람들 가운데서 증언을 해야 할 때 자기가 보았음에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보지 못했음에도 보았다고 말하고, 알고 있음에도 알지 못했다고 말하고, 알지 못하면서도 알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둘째, 꽃처럼 말한다는 것은 앞의 경우와는 반대입니다. 보았으면 보았다고, 보지 못했으면 보지 못했다고, 알고 있으면 알고 있다고, 알지 못한다면 알지 못한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경우입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고 적더라도 어떤 이익이 올 것을 생각하기 때문인데 꽃처럼 말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셋째, 꿀처럼 말하는 사람은 사실대로 말하는 일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거친 말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드러워서 상대방이 듣기 좋고 듣는 사람 마음에 와 닿는 상냥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실대로 말하고 진실을 말하되 그 표현법이 부드럽고 다정해서 누구나 그의 말을 들으면 마음이 활짝 열립니다. 심지어는 자꾸 그의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아무리 사실과 진실을 담은 말이라 해도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고, 들으면서 행복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꿀처럼 말하는 사람입니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과 같은 동북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말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말이 어눌하다는 눌(訥)자를 이름으로 쓰는 분도 계실 정도입니다. 그 유명한 보조 국사 지눌(知訥) 스님이 그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생각이 깊고 마음이 따뜻하다고 해도 말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말을 해야 알지요. 초기경전에서는 말을 하지 말라는 구절을 만나기 어려운 반면 ‘말을 잘하라’는 부처님 가르침은 도처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사람을 이렇게 여러 부류로 나누는 법문을 읽자면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몇 번째 부류인가’를 늘 생각하게 됩니다. 불자로서 살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런 부류 가운데 불자가 몇 번째에 해당하는지는 정해진 답이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것만으로도 마음공부가 이뤄진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수행 차원으로 방향을 돌리면, 네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몸은 빠져나왔지만 마음은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 두 번째는 몸은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마음은 빠져나온 사람, 세 번째는 몸과 마음이 다 빠져나온 사람, 네 번째는 몸과 마음이 다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몸이 빠져나온다는 말은 세속에서 사느냐 출가해서 수행자로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세속에서 빠져나왔으면 몸이 빠져나온 사람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몸은 빠져나왔더라도 마음은 지금 현재 어디에 놓여 있느냐입니다. 마음이 어디에서 탈출해야 무사히 빠져나왔다고 할까요? 그건 바로 번뇌입니다. 마음이 번뇌에서 빠져나왔느냐 그렇지 못하고 있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 차원에서 말하자면 일단 몸이 세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속이란 끊임없이 사람을 이런저런 잡다한 일과 사람 관계, 감정의 얽매임으로 마음을 쉬지 못하게 만드는 공간입니다. 그러니 수행하겠다면 과감히 세속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요즘 주말이나 휴가철이면 템플스테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몸은 세속에 묶여 있지만 제한된 짧은 시간이나마 그 몸을 세속에서 빼내 보는 것은 인생에서 아주 소중한 체험일 것입니다.
하지만 템플스테이를 하는 짧은 동안에도 손에서 스마트폰을 내려놓지 못하고 사진을 찍고 지체하지 않고 SNS에 올리며 반응을 살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는 가정과 직장의 일을 여전히 품고서 애면글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속에서 밤늦도록 배달음식을 먹던 습관을 템플스테이의 단 며칠 동안도 멈추지 못해 가방 가득 간식거리를 챙겨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음 맞는 벗들과 산사에서 맛있는 간식을 먹는 재미도 크겠지만 몸이 세속에서 빠져나왔다해도 마음은 여전히 세속에서의 습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으니 템플스테이의 효과가 생각만큼 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데에서 온다고 하지요. 비교대상을 타인이 아닌, 어제의 나로 삼아보면 어떨까요? 나는 어떤 사람일까를 자꾸 돌아본다는 것은 어제의 나로 계속 머물러 맴돌지 않고 한 걸음 나아가고 인생이 업그레이드하는 원동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