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인 붓다]49. 다큐멘터리 영화 〈1980 사북〉
광부는 왜 스님이 돼야 했을까? 잊혀진 역사 1980년 사북항쟁 조명 당시 린치 피해자 노조위원장 부인 항쟁 이후에 스님이 된 노동자 담아 사북항쟁, 그 시대를 비추는 ‘업경’
‘1980’이라는 숫자는 한국에서 특정한 역사적 환란이 벌어진 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쓰인다. 지역 봉기와 계엄령과 민간인 학살과 군사정권과 독재의 시대.
‘사북’이라는 지역은 특정한 시대를 지난 사람들에게만 느닷없이 익숙하다. 그곳을 가보아서가 아니라, 그 지역 어떤 볼거리가 잘 알려져서가 아니라, 언제였던가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뉴스 때문에.
그러니까 대중들에게 ‘1980 광주’라고 하면 아주 익숙한데 ‘1980 사북’은 그게 뭐였더라 잘 떠오르지 않는 막연한 조합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이 지역을 화두로 삼아 5년 동안 매달린 박봉남 감독은 ‘1980년 사북,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세월을 겪어냈는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국가라는 이름으로 공권력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악업의 무저갱을 열어 놓았는지 찬찬히 톺아보고 이 다큐멘터리 〈1980 사북〉을 기어코 세상에 내놓았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시도 군도 아닌 읍이라니.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대표 산업이 예전에는 탄광업, 지금은 국가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카지노가 있는 리조트 강원랜드. 그렇다면 영화 제목이 된 시기의 사북은 카지노나 스키 리조트 관광지 말고 탄광촌. 시기와 지역을 콕 짚어 앞세운 이런 영화 제목이 왜 나왔는지 잘 모를 만도 한 것이 당연한 걸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1980 사북〉이 지난 9월 26일부터 10월 2일까지 ‘우정과 연대를 위한 행동’을 주제로 개최된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한국경쟁 장편부문 대상과 더불어 올해 신설된 국제영화비평가 연맹상까지 국내 국외 심사위원들로부터 두 개 부문의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으니까.
방글라데시 외진 바닷가 마을을 찾아가 선박 해체를 업으로 하는 노동자들의 일상에서 지구적 차원의 노동과 자본의 업과 연을 만다라와도 같이 담아낸 영화 〈철까마귀〉로 한국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2009년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박봉남 감독의 시선과 만듦새가 뛰어났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발표되기 전에 이미 제목의 현장 지역인 사북읍이 속한 강원도와 정선군도 각각 지원하고, 지자체 영화기관인 강원영상위원회 뿐 아니라 정부 공공기관인 영화진흥위원회도 제작지원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것은 그만큼 이 영화가 다루는 사건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연대기적으로 훑어보고 지리적으로 찾아보면 1980이라는 숫자와 사북이라는 지역의 조합으로는 딱 하나만 나온다. ‘사북사건’.1980년 4월 21일강원도정선군사북읍에 위치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노사 간의 극심한 갈등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북탄광 노동항쟁. 그 사건은 당시에 정말 큰 충격이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보여주던 쿠데타 시기를 갓 지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노동자들이 항쟁을 벌였다는 것도, 그 와중에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아 경찰관이 죽었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당시 사건을 다룬 수많은 기사와 방송 가운데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남은 이미지는 내복 바람으로 시위대에 둘러싸여 기둥에 묶인 한 중년 여성의 사진과 그 상황을 정의하는 ‘린치’라는 무시무시한 헤드라인이었다.
광부들이 왜 화가 났는지, 그렇게 집단행동을 하게 된 까닭은 뭐였는지, 평범한 동네 아주머니 같은 저 여성은 왜 성난 노동자들에게 붙잡혀 치욕스러운 사진을 찍히고 있는지 궁금한 일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사람들은 곧 ‘사북’을 잊게 되었다. 그런 사건에 기함한지 한 달도 안 되어 터진 1980년 5월의 충격 때문에.
그렇다. 사북사건은 그냥저냥 지나가는 여러 사건사고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역사의 변곡점에서 불길한 시대를 예고하는 징조, 조짐, 증상, 예고였던 것이다. 그러니 단순 사건이 아니라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과 더불어 민주화 이행기의 ‘3대 사태’ 가운데 하나인 ‘사북항쟁’으로 재조명되고 있고, 당사자들로서는 1993년부터 지금까지 진상규명,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이 국가를 상대로 꾸준히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 제대로 아물만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국가폭력의 흉터다.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인 황인오 사북항쟁동지회장과 나레이터이자 화가인 황인욱 형제는 소년 시절 린치를 당하는 중년 여성의 아들과 같은 학교 친구였고, 대학 시절에는 영화를 만든 박봉남 감독의 선배였다. 황인오 씨는 당시 너무 어려 상황을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친구끼리도 이웃 사이도 험해졌고, 그보다 더 험해진 것은 소년 황인오가 대학생 황인오가 되어 맞은 80년대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그 험한 세월을 지나 어른이 된 이들이 40년이 넘도록 아물지 않은 상처의 업을 지고 후배인 박봉남 감독을 찾았고, 박봉남 감독은 ‘인연이 곧 업’이라고 받아들여 ‘사북’이라는 화두를 잡다 보니 5년이 훌쩍 지나게 된 것이다.
영화는 1980년 4월 이후 험한 고문으로 망가진 몸과 마음, 반국가세력이라는 낙인, 고문 후유증, 강압수사에 못 이긴 거짓 자백, 한 동네 사람들끼리 서로 원수가 되면서 새겨진 인간 불신 등으로 지금까지 고통 받고 있는 당사자들을 찾아간다. 박봉남 감독은 캐묻는 대신 귀를 기울인다. 진압 과정에서 머리에 돌을 맞아 죽을 뻔했던 경찰, 하지도 않은 폭력행위 가해자로 몰려 불구가 된 동지회 회원들뿐 아니라 당시 린치의 피해자가 되었던 노조지부장 부인과 그 가족의 고통도 담아낸다.
그렇게 사람들의 업과 인연을 따라 감독의 카메라가 당시 광부였던 천만성 씨를 찾아간 곳이 강경에 있는 태고종 사찰 수국사. 사건 이후 천만성 씨는 스님이 되었다. 고문으로 몸이 상해 일을 찾기도 쉽지 않았거니와, 어렵사리 일을 하다가도 사북 항쟁의 이력이 밝혀지면 내몰리기를 거듭하다가 불가에 귀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족을 부양하려 막장에 들어가는 광부가 되었는데 스님이 되겠다고 가족을 저버릴 수 없어 대처승으로 불문에 드는 것이 가능한 태고종을 찾게 되었다는 천만성 씨는 감독이 찾아갔을 때는 수국사 주지인 덕월 스님이 되어있었다. 덕월 스님은 영화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고, 영화제 첫 시사장에는 유족이 된 부인이 참석해서 회한어린 인사를 전했다.
〈1980 사북〉은 마치 우리 현대사에 대한 ‘업경(業鏡)’과도 같다. 이제는 폐광이 된 사북에 여리지만 고운 들꽃이 피어난 것을 놓치지 않으며 사람들의 악연 사이를 비추는 박봉남 감독의 이 업경을 스크린을 따라 함께 들여다보노라면 울컥울컥 시대가 아프고, 인연이 아프다. 머리에 피를 흘리는 자신을 병원까지 가는 동안 품에 안고 있었던 이가 시위대였다고 기억하는 경찰이 사상 사고가 일어날 것이 분명한 곳에 진입을 명령한 까닭을 묻는 장면, 참담한 고문에서 입은 수치와 상처를 내보이는 등장인물들의 상처는 단순한 인연의 업이 아니다.
박봉남 감독은 카메라에 없는 것들, 아직 업경에 비추어지지 않은 것들을 상기시킨다. 동원탄좌 기업주, 정보기관, 특전사, 고문경찰, 재판부, 최고권력자와 같이 드러나지 않는 악업들이 뭉친 악업. 이 업을 풀려면 국가의 사죄와 보상이 필요하다는 공감의 파장이 부디 한 영화제에서 그치지 않고 길게 멀리 퍼져나가는 업경의 소임을 다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