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마나의 시절인연] 독서로 지장보살을 만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을 들어본 지가 까마득하다. 언제부터 스마트폰이 시도 때도 없이 정보를 쏟아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자아(自我)는 무분별하게 흘러드는 정보의 바다에 잠겨 서서히 익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독서는 정신에 파문을 일으킨다. 물 위로 뛰어오른 물고기처럼 솟구치는 언어는 우리를 기습하고, 우리를 덮치고, 우리를 변모시킨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면서 새로운 빛을 띠게 한다.
독서는 날씨마저 바꾼다고 한다. 독일의 작은 마을 숲속에서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하이데거는 폭풍이 치고 눈이 오면 그때가 철학자의 시간이라고 했다. 인간은 폭우로부터 가뭄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시커먼 구름을 바라보면서 그 너머의 청명한 하늘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의 날씨는 바꿀 수 있지 않은가. 우리 마음은 어둠 속에서도 햇살이 비쳐야하고, 가뭄 속에서도 빗소리가 들려야 한다. 모든 변화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여름 내내 불타올랐던 뜨거운 날씨를 바꾸려고 하이데거의 책을 읽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출간한 이후, ‘진리의 본질에 관하여’란 제목으로 프라이부르크대학 겨울학기 강의를 했다. 그는 마음의 고향으로 삼아온 그리스 철학, 그중에서도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로 강의를 풀어 나갔다.
동굴에 갇힌 죄수들은 온몸이 결박되어 동굴 앞쪽 벽면만을 볼 수 있다. 죄수들 뒤로는 담장이 있고, 그 위로 사람과 동물과 사물의 상들이 지나가는데, 그것의 그림자가 앞쪽 벽면에 비치고 있다. 그 그림자는 동굴 위에서 타오르는 불빛을 받아 생긴 것이다. 죄수들은 평생 포박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그림자를 참된 것, 진짜라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동굴에 결박된 죄수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들, 현실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죄수 중 한 사람이 풀려나 담장 위로 올라와 실체를 보고, 빛나는 불빛을 보게 된다. 풀려난 죄수는 불빛을 보고 눈이 부셔 고통스러워하며 실물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다. 진리가 드러나 있음에도 기뻐하기는커녕 그림자를 여전히 진리라고 믿고 있다. 고뇌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이전 상태로 그냥 머물러 있고 싶어 한다. 몸이 해방되었다고 정신까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동굴 밖으로 나온 죄수는 차츰 빛에 익숙해져 마침내 태양을 쳐다보고, 실제 사물들을 바라본다. 결단을 통한 본래적인 실존을 획득한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동굴 안에 결박되어 있는 동료들이 불쌍하여 견딜 수 없게 된다.
자유로운 자는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비-진리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려고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동굴 안 사람들은 돌아온 그를 비웃는다. 동굴 밖으로 나가더니 눈이 상했다고, 그가 동료들의 쇠사슬을 풀어 위로 데려간다면 죽여 버릴 것이라고 으르렁거린다.
나는 ‘동굴의 비유’, 이 마지막 단계에서 마음에 큰 파문이 일었다. 죽임 당할 것을 알면서도 동굴로 다시 들어간 그가 바로 지장보살이 아닌가.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깨달음을 이루지 아니하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던 지장보살.
독서를 통하여 새롭게 만났던 지장보살의 보살행, 폭염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