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 논문 ] 탁효정의 '조선시대 불화 화기에 나타난 비구니 명단과 활동'
조선시대 불사, ‘화주’ 비구니스님이 이끌다 조선 불화 화기 니승 명단 분석 확인되는 니승 명단 총 1507건 대부분 19~20세기 초에 집중돼 화기 살펴보니 ‘화주’ 역할 맡아
본 논문은 조선시대 불화 화기에 기재된 니승(尼僧) 명단 DB를 토대로 전국에 분포한 비구니사찰을 분석한 연구이다.
조선 비구니사찰의 분포와 비구니의 활동은 오늘날 한국 비구니승가의 원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조선시대 비구니 연구는 불교사, 미술사, 문학사, 여성사 영역에서 수십년간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대부분 왕실 출신 비구니를 중심으로 하는 연구에 그쳤고, 일반 비구니 연구는 매우 단편적으로 진행되었다. 최근에 이르러 조선시대 비구니 활동을 파악하기 위해 사지에 실린 비구니 명단을 토대로 한 연구들이 일부 발표되었다.
본고에서 니승 명단을 수집하기 위해 참조한 자료는 〈한국의 불화 화기집〉 〈한국의 사찰문화재〉 〈조선시대 기록문화재 자료집〉 〈강화 사찰 문헌자료의 조사연구〉 등이다.
화기상의 니승 분포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1392~1945)에 제작된 불화 화기에 기재된 니승의 법명은 총 1507건이다. 그 중 조선시대에 활동한 니승의 명단은 총 758건이고, 일제강점기는 732건, 조선~근대에 제작된 것은 확실하나 정확한 제작 연대가 불분명한 것은 17건이다. 조선시대 불화 가운데 니승의 명단이 기재된 불화는 총211점이다. 조선시대 니승 758명 중 사미니(沙彌尼)는 21명, 행녀(行女)는 2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비구니(比丘尼, 比邱尼) 또는 니(尼), 니승(尼僧)으로 표기되었다. 758명 가운데 중복명을 제외하면 총 619명의 니승 활동이 확인되었다.
15세기 불화에서는 니승의 명단이 1건도 확인되지 않았으며, 16세기는 4명, 17세기는 0명, 18세기 43명, 19세기 472명, 20세기 초(~1910)는 239명으로 조사되었다. 16세기의 니승 명단은 모두 일본에 소장된 불화에서 확인되었다. 일본 지은원(知恩院), 청산문고(靑山文庫), 여래사(如來寺)등에 소장된 이 불화들은 모두 조선 왕실의 후원으로 제작된 것이다. 청산문고에 소장된 ‘서방구품용선접인회도(西方九品龍船接引會圖)’에는 혜원(慧圓)과 혜월(慧月) 두 비구니의 법명이 기재돼 있는데, 이 중 혜원은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부인 신씨가 출가한 후 받은 법명이다. 신씨는 비구니가 된 이후에도 외명부에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특정 사찰이 아닌 광평대군방에서 살았으며, 광평대군묘 부근에 있는 암자를 오가며 수행 생활을 영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광평대군 부인을 포함해 16세기 비구니들은 모두 소속 사찰이 기재되지 않은 채 법명만 기재되어 정확한 활동 내역을 파악하기 어렵다. 조선전기 내·외명부에 소속된 왕실여성들은 출가한 이후 사찰로 들어가는 대신 자신들의 궁을 불당으로 개조해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의 소속 사찰을 특정하기 힘들다.
국내에 남아있는 불화에서는 18세기 이전에 활동한 니승의 명단을 전혀 확인할 수 없었는데,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내에 남아있던 대부분의 불화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18세기의 니승 명단은 경북, 경남, 전남, 충남, 충북 등 다양한 지역에서 확인되지만 그 수는 43명에 불과하다. 이 시기에 제작된 불화 중에도 현전하는 것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니승 명단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집중돼 있다.
지역별로는 서울·경기 274명, 충청도 242명, 경상도 176명, 전라도 45명, 강원도 7명, 함경도 1명, 미상 13명으로 조사됐다. 서울 경기 중에서는 한양 도성 근방, 충청도 지역에서는 태화산과 계룡산 인근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비구니들의 활동이 확인되었다.
화기에 나타난 비구니 사찰 특징
불화의 화기에 나타난 비구니들의 활동은 시기적으로는 19세기, 지역적으로는 서울과 경기, 충청도 지역에 집중돼 있다. 이는 화기가 갖고 있는 사료적 한계 때문인데, 불화는 화재 등의 외부 요인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전란의 피해가 극심했던 시대나 지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로 인해 전통적인 비구니 수행처로 전해지는 금강산과 오대산, 보개산 지역의 비구니 활동은 거의 확인할 수 없었다. 또한 불화는 종이나 비단에 그려져 정기적인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세가 계속 유지되어야 불화가 제대로 보전될 수 있고, 불화가 도난 될 경우 화기 부분을 고의로 훼손하는 경우가 많아 제작 연대가 높은 불화들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경우가 드물다. 이러한 여러 요인으로 인해 화기상 비구니들의 활동은 18세기 이후에서야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화기 상에 나타나는 비구니사찰 또는 암자는 서울·경기와 충청도 지역에 집중돼 있다. 서울에서는 도성 밖 4승방으로 불리던 청량사, 청룡사, 보문동 미타사, 보문사, 옥수동 미타사 등이 오늘날까지 비구니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경기에서는 강화도 지역에서 비구니 활동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충청도에서는 특히 마곡사에 압도적으로 많은 비구니들의 활동이 확인되었고, 경상도에서는 해인사에서 가장 많은 비구니들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단위 사찰별로 살펴보면 마곡사에서 활동한 니승이 122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 서울 옥수동 미타사가 109명, 합천 해인사 63명, 청주 안심사 28명, 강화 청련사 23명, 정수사 23명, 보은 법주사 21명, 강화 원통사 19명, 공주 동학사 18명, 문경 대승사 17명 순으로 나타났다.
화기상에서 큰 규모의 비구니승가를 확인할 수 있는 사찰들의 공통점은 전란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곡사와 해인사는 625한국전쟁 당시에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대표적인 사찰이다. 그로 인해 다수의 성보문화재가 보전되었고 불화의 화기 또한 온전하게 전해질 수 있었다.
전국 31개 비구니 사암 분포
조선시대 불화 화기상 비구니의 활동이 확인되는 사찰은 총 79곳이고, 비구니의 독립 사암 또는 비구니의 상주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암은 31곳이다.
화기를 비롯한 조선시대 사료상에 드러나는 비구니의 거주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비구니들만 거주하는 사찰에서 주지부터 말단 소임까지 모두 비구니가 맡는 독립사찰인 경우가 있고, 비구 중심의 사찰에서 산내암자 내지 말사의 형태로 비구니의 독립공간이 운영되는 경우이다. 비구니 독립사찰은 주로 대도시 주변에서 확인된다. 조선시대 도성밖 4승방으로 알려져 있는 청룡사, 청량사, 옥수동 미타사, 보문동 미타사, 보문사 등은 모두 비구니의 독립사찰로 운영되었다. 지방의 사찰들은 대부분 큰 사찰의 산내암자 형태로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삼남 지방에서도 가장 많은 비구니들이 확인된 사찰은 공주 마곡사, 합천 해인사인데 마곡사 청련암과 해인사 약수암에 소속된 비구니들이 다수 확인되었다.
즉 도심과 가까울수록 비구니들이 독립사찰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지방에서도 심산유곡에 위치한 사찰일수록 비구니와 비구가 공동 거주를 하거나 산내암자에서 독립 공간을 마련해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화기상에서 비구니들의 독립암자 혹은 독립사찰로 확인된 곳은 오늘날까지도 대부분 비구니사암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비구니승가의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비구니들의 적극적인 성보문화재 보호 및 관리로 인해 이들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화주 역할이 크게 부각
화기에 실린 니승들의 직책은 공사(供司) 12명, 공양주(供養主) 2명, 다각(茶角) 7명, 도감(都監) 29명, 별좌(別座) 24명, 별공(別供) 40명, 봉다(奉茶) 2명, 삼강(三綱) 1명, 인권(引勸) 8명, 정통(淨桶) 3명, 종두(鐘頭) 2명, 지전(持殿) 3명, 화주(化主) 167명이고 나머지는 시주로 참여하였다.
니승들이 맡은 소임 중 시주를 제외하고는 화주가 가장 많았고, 비구 사찰에서 비구니 1명이 화주를 단독으로 맡거나 혹은 2명이 도맡는 경우도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는 조선시대 사찰 경제에 있어서 비구니 화주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이 같은 내용은 불화의 화기뿐만 아니라 중창기 등의 여타 사료에서도 유사하게 확인되는데, 불사를 진행할 때 일반민 특히 여성신자들에게 불사 동참을 청하는 인권(引勸)으로서 비구니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려준다.
공사나 도감의 역할을 비구니가 맡는 경우는 대부분 비구니 독립사찰에 한정되었다. 도감은 불사 비용의 출입 관리뿐만 아니라 불사에 소요되는 건축자재, 노동력 등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대체로 비구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서울 근교나 강화도에 위치한 사찰에서는 비구니들이 자급자족을 하거나 불사의 주요 소임을 전담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공사나 지전, 도감 같은 실무직까지 모두 니승들이 담당했다.
비구니들은 소속 사찰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까지 폭넓게 화주 또는 시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법주사, 동학사 등에서 활동하던 비구니 경기 남부 지역(안성)이나 경북 서부 지역(예천)의 불사에 참여하였고, 서울 지역 비구니들은 서울의 대형 불사뿐만 아니라 금강산의 불사에 대거 참여한 경우가 많았다. 강화도 지역의 비구니들은 강화도 내에서 전등사와 같은 대찰의 불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그 지역의 대화주 혹은 대시주로 꼽히던 비구니들이 인근 지역의 불사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