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테크놀로지, 불교로 읽다] 9. 항상성의 개념

생명 지속의 항상성, ‘업’의 다른 이름 業 개념은 항상성과 관성과  비견될 때 비로소 선명해진다

2024-10-07     공일 스님
봉은사 포교국장 공일 스님

유별난 여름의 무더운 날씨가 지나면 서늘한 바람이 불고, 겨울이 되면 추위가 유난을 떨 것이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 사이를 오가며 삶을 살아가는 것은 신비에 속한다. 환경에 대한 적응력인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이 생명현상을 가능하게 한다. 개체 자신의 상태를 최적화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개체적 생명을 넘어서 지구적 차원에서도 이 항상성은 추론된다.  

내년에도 새로운 가지가 돋아나리니, 소란스런 봄바람의 수고로움은 끝내 멈추지 않으리.(明年更有新條在 惱亂春風卒未休, 〈선문염송〉, H76, 165a12)

계절의 일정한 순환은 기지개를 켜며 체온을 높이고 활동하다가 활동을 그치고 잠을 자는 동물의 낮과 밤에 따르는 체온의 변화와 일정하게 대비가 된다. 이렇게 항상성 개념은 지구 환경으로 확대되어 적용되기도 한다. 지구를 뭇 생명의 어머니로 바라보는 가이아(Gaia) 이론의 배경이기도 하다. 지구를 생명 유기체로 인식하도록 작동하는 항상성 개념은 현상계를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체온조절 기능은 물론 섭식에 따른 혈당조절, 무더운 여름과 겨울의 찬바람에 이르기까지 생명과 환경을 볼 수 있게 한다. 

항상성이 생명과학의 이론이라면, 물리학에서는 관성(慣性, Inertia)의 법칙이 있다. 관성은 물체가 운동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성질을 말한다. 자기의 속성을 유지하려는 동력에 해당하는 자성(自性)이야말로 관성력의 핵심이다. 항상성과 관성은 업(業, karma) 개념에 의하여 보충 설명될 수 있다. 범어의 동사원형 k는 ‘그림자가 그 주인을 따르고’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는’ 것처럼 무언가를 끌고 다니는 형상이다. k는 문장에서 kar로 활용되며, 명사로 전환될 때 karma로 변형된다. 

업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의 하중을 책임지는 상속성을 의미한다. 〈종경록〉은 업력을 관(慣)과 연결하여 마음(心)으로 일관(貫)하는 항상성과 그 지속의 관성을 동시에 만족하는 기호로 풀이하고 있다. ‘관성의 습기는 되풀이 행하여 숙달된 기운으로 인하여 수면이라는 잠재의식에 따르는 것이며 집착의 씨앗’(慣習, 習氣隨眠, 執種子)이라고! 이처럼 업 개념은 항상성과 관성과 비견될 때 선명해진다. 사람의 마음자리를 곧장 가리키는 직지인심의 선적 경지는 현대의 생명과학이나 물리학의 입장으로 디플레이션된 것이다. 

생명의 지속을 위한 항상성, 물질 현상을 유지하는 관성, 시간의 발자취를 영속하는 까르마로서의 업, 이들은 동일한 현상계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다른 이름들이다. 부처와 도는 얼마나 다른가? 이에 대하여 마조 선사는 ‘도란 손을 펼치는 것과 같고, 부처는 주먹을 쥐는 것’(佛與道相去多少 馬祖答云 道如展手 佛似握拳)이라 답한다. 이런 점에서 각 이름의 기표(記票)적 차이를 불식하고 그 매끈거리는 표면에서 넘어지지 않는다면, 의미 그 자체인 기의(記意)에 도달할 수 있다. 

붓다의 깨달음은 부처님 당체(當體)를 지시하는 법신불이기도 하고, 깨달음으로 대체 표현되는 도의 당체는 진리 그 자체이다. 이제 가을이 무르익는 시간이다. 〈선문염송〉은 가을 달빛의 서늘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한 길(一丈)을 설명하는 것은 한 치(一寸)를 행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이 가운데 뜻을 깨닫는다면 비로소 달빛이 서늘함을 알리라. (說得一丈 不如行得一寸 會得箇中意 方知月色寒, H76, 173c11-12)

세상 시끄러운 말들에 귀 기울이다가 물들었다면 귀를 씻어야 한다. 창밖을 비추는 달빛에 마음을 헹구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