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 스님의 불국토 경주 남산에 오르다] 19. 늠비봉 오층석탑

‘호국불교’ 서원 담긴 석탑 아니었을까  포석곡 오르면 만나는 오층석탑 용장사곡 석탑 비견되는 ‘명작’ ‘백제계 석탑’ 소개, 이해 안돼 고려 중기 괴임돌 양식 보여줘 거란 침략 막아낼 서원 담겼단 스토리텔링이 석탑 의미 살려

2024-10-02     무진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경기 광주 빛고운절 회주
경주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 일명 ‘늠비봉 오층석탑’으로 불린다. 남산연구소 자료사진

남산의 정상 금오봉과 멀지 않은 곳에는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같은 남산을 기단으로 경주 시내를 내다보는 멋진 석탑이 또 하나 있다. 보통 삼릉계곡을 올라 금오봉에서 용장사곡의 삼층석탑과 불상을 참배하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그렇기에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비견되지만 발길이 닿지 않는 것이 늠비봉 오층석탑이다. 늠비봉 오층석탑의 공식 명칭은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늠비봉 오층석탑’으로 불리고 있다. 

포석곡은 남산 포석정에서 시작하여 늠비봉까지의 계곡을 말한다. 이 계곡을 따라 6개의 사찰터가 있는데, 제6사지는 ‘늠비봉 오층석탑’이 포함된 사찰터로 근래에 건립된 부흥사의 자리로 보고 있다. 부흥사는 포석정에서 남산의 비포장 소방도로(남산순환도로)를 약 1.6km 정도 오르다 보면 나온다. 부흥사에서 보면 우뚝 솟은 능선 위의 늠비봉 오층석탑이 보이는데, 직선거리로는 120m 정도 된다. 

반대로 남산 정상에서 늠비봉 오층석탑을 가려면 금오봉 밑에 있는 화장실에서 남산의 비포장 소방도로(남산순환도로)를 따라 포석정 쪽으로 가야 한다. 가다 보면 상사바위가 나오고 왼쪽으로 금오정 가는 등산로 길이 나온다. 금오정이 보이고, 금오정 왼쪽의 등산로로 내려가다 보면, 훤하게 탁 트인 늠비봉 정상에 오층석탑이 웅장하게 서 있다. 6m가 가까운 높이의 오층석탑과 저 멀리 경주 시내의 환상적 경치는 ‘와’ 소리가 절로 나온다.

흩어져 있던 탑의 부속 석재들을 모아서 2022년에 복원한 늠비봉 오층석탑은, 260m의 높이인 늠비봉의 암반을 기단으로 하여 남산 유일의 오층석탑으로 세워져 있다. 경주 남산을 기단으로 사용한 것은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같은 모습이다. 특이하게 기단부 판석 밑에 자연적인 돌을 알맞게 껴맞춘 그랭이 공법을 보여준다. 석재가 많이 소실되어 있어서 새롭게 재현한 부속 석재도 있지만, 경주 시내가 보이는 경관은 일품이다. 늠비봉 오층석탑은 비파곡 제2사지 삼층석탑,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함께 남산 능선 부근에 세워져 있는 경관이 아름다운 삼대 석탑이다.

보통 불교 상식으로 금당 앞에 탑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산에 있는 사찰에서는 전망이 좋고 산 아래가 잘 보이는 곳에 탑을 세우기도 한다. 경주 남산에서는 용장사지에서 위쪽 전망 좋은 곳에 있는 용장사곡 삼층석탑이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늠비봉 오층석탑도 제6사지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2004년 발간된 ‘경주 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를 보면 부흥사 법당 앞에는 석탑의 지붕돌인 옥개석 1매와 상당수의 탑 부재가 확인되고 있다. 제6사지 금당 앞에는 석탑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부흥사의 제6사지에서 직선으로 120m 거리에 있는 늠비봉 오층석탑이 정말 제6사지인 현재의 부흥사와 관련된 석탑일까 싶다.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에 보면 ‘경주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은 백제계 석탑이라고 짤막하게 안내되어 있다. 제작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라고 하는데 나말여초 시기가 된다. 그런데 어떤 모습과 어떤 이유로 백제계 석탑으로 보는지 해설은 나와 있지 않다. 2004년 발간한 ‘경주 남산 정밀학술조사보고서’에도 단층 기단 위의 오층석탑이 경상도 지역 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벗어난 백제계 양식이라 하고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늠비봉 오층석탑은 단층 기단이 아니라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같은 남산을 하층 기단으로 하는 2층 기단의 석탑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럼 용장사곡 삼층석탑도 백제계 석탑이란 말인지?

오층의 석탑이기에 백제계 석탑이라 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9세기 조성된 오층의 석탑은 경주에도 보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경주 나원리와 장항리의 오층석탑이 있다. 늠비봉 오층석탑이 경주 중심의 남산에 세워진 유일의 백제계 석탑이라면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클 것이다. 그러나 백제계 석탑이 8∼9세기 경주 남산에 세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라의 옛 영토에는 백제계 석탑이 세워질 수도 세워진 적도 없기 때문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 삼한을 정벌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인지 몰라도 백제가 멸망한 660년 이후 백제의 땅에서는 불사를 일으킨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옛 백제 땅에 불사가 일어나는 것은 8세기 중반 경덕왕이 화엄종의 힘으로 지방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한 불사를 일으키기 시작하면서다. 이후 원종과 애노의 내란이 시작되는 889년부터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936년까지, 나말여초 시기에 거대한 석탑의 건립과 같은 불사는 없었다. 이처럼 백제계의 석탑이 나말여초 시기 경주 남산의 불국정토에 조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백제가 석탑으로 보이는 부분은 무엇일까? 정형화된 신라 석탑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각 몸돌 탑신을 받치는 괴임돌이다. 늠비봉 오층석탑은 2층부터 지붕돌인 옥개석 위에 몸돌인 탑신의 받침으로 2단의 층급이 있는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몸돌인 탑신을 올려놓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에는 이러한 형식은 없으며, 1층 몸돌인 탑신석과 기단 사이에 괴임돌을 넣는 경우는 있다. 

1층 몸돌인 탑신석과 기단 사이의 괴임돌은 9세기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성주사지의 금당 앞높
이 6m 중반의 오층석탑이 있다. 석탑 1층 몸돌인 탑신석과 기단 사이에 별도의 별석 받침의 석판인 괴임돌을 넣어 놓고 있다. 10세기에는 고려 초 조성된 높이 9m의 보원사지 오층석탑도 이에 해당한다. 

보령 성주사는 616년 창건된 백제의 사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주사는 중국과의 무역로의 길목인 보령에 위치하며,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 폐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지에 있는 ‘낭혜화상탑비’를 보면, 847년 무렵 신라 구산선문 중 성주산문의 개산조 낭혜무염(800~888)이 무너진 옛 사찰인 성주사에 거주하며 중건하고 있다. 이후 신라 문성왕은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흥륜사에 소속시켜준다. 이것은 성주사를 왕실 직할 사찰로 하여 보령지역을 관리하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낭혜무염이 머물면서 불사를 하기 시작하는 9세기 중반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1998년 발간된 성주사의 발굴조사서 72쪽을 보면 백제시대 목탑의 기초 위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847년 무렵 낭혜무염이 폐사된 사찰을 재건하면서 백제 목탑 자리에 세운 석탑이 된다.

보원사지에는 ‘법인국사탑비’가 있다. 내용을 보면 법인 국사 탄문(坦文, 900∼975)의 부도탑은 고려 광종(재위 949∼975) 26년인 975년에 건립되고, 탑비는 978년에 건립된다. 법인 국사는 화엄종 스님으로 975년 고려 광종의 보살핌으로 보원사에 내려온다.

보원사는 가야산사라고도 하며 통일신라시대부터 중국과의 무역로인 서산지역을 아우르는 중심 사찰이었다. 또한 화엄종 사찰은 통일신라 이후부터 지방을 다스리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렇기에 고려의 왕권을 확립한 광종이 화엄종의 대표 스님인 법인 국사를 보원사에 기거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법인 국사 이후 975년부터 대단위의 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에, 오층 석탑도 975년 어느 때 건립된 것으로 보인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 된다. 

늠비봉 오층석탑은 성주사나 보원사 오층석탑과 같은 1층 몸돌 밑에 괴임돌을 놓은 것이 아니라, 2층부터 5층까지의 몸돌 밑에 괴임돌을 넣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 중기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담양 남산리 오층석탑, 서울 홍제동 오층석탑, 곡성 가곡리 오층석탑에서 확인된다. 몸돌 받침의 괴임돌은 이처럼 9세기~10세기 성주사와 보원사 오층석탑의 1층 몸돌의 받침으로 시작하여, 고려 중기 2~5층의 몸돌 받침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것이 한국 오층석탑 괴임돌의 양식 변화과정이다.

늠비봉 오층석탑을 9세기 경상도 지역과 경주 남산에 세워진 유일한 백제계 석탑으로 볼 이유가 없다. 이보다는 더 멋진 이야기가 담겨 있는 오층석탑으로 보인다. 앞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처럼, 고려 1022년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구층석탑을 조성하고, 남산의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에 명문을 새기며, 거란이란 원적이 영원히 물러가기를 기원을 하였다. 이러한 기원과 함께 귀주대첩 승리를 자축하고,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앞으로도 원적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만천하가 내려 보이는 늠비봉에 오층석탑을 세운 것은 아닐까! 

멋진 전설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한다. 남산 늠비봉의 오층석탑은 다시는 이 땅에 원적이 침략하지 않도록 부처님께 기원을 올린 탑이라는, 풍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불교문화유산이 탄생한들 뭐 걸릴 것이 있을까. 백제계 석탑이란 내용보다는.

참 오층석탑은 왜 오층일까? 궁금해서 7개 박사학위의 자현 스님에게 문자로 물었다. ‘돈대로 짓는거죠’라는 답장이다. 즉 모른다는 것이다. 이럴 때 뇌피셜을 전제로 무궁한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 1년은 12달이다. 12년이 딱 떨어지려면 5을 곱해서 60을 만들면 된다. 그렇기에 60년은 환갑이 된다. 모든 우주가 한번 돌아간 것이 환갑이다. 즉 꽉 찼다는 것이다. 우주가 꽉 차게 하는 5를 상징하여 오층석탑을 세운 것은 아닐까! 문화유산의 현상으로 시대를 상상하는 나만의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