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중의 깨달음의 노래] 9. 진묵대사의 오도송
천지자연과 하나됨을 노래하다 임진왜란 고통 받던 대중 치유 오도송 ‘호연지기’ 詩 중 절창 민중 희망 주는 제2 진묵 기대
하늘을 이불 삼아 땅 위에 누웠노라
하늘을 이불, 산을 베개 삼아 땅 위에 누웠노라(天衾地席山爲枕)
달빛 등불 구름 병풍 아래서 바닷물을 술로 생각하고 마시네(月燭雲屛海作樽)
거나하게 취하여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니(大醉居然仍起舞)
긴 소매 곤륜산에 걸릴까봐 저어되네(却嫌長袖掛崑崙)
임진왜란이 끝나고 처절하게 고통 받는 민중을 구원한 조선의 소석가(小釋迦) 진묵 대사의 오도송이다. 그가 남긴 유일한 이 깨달음의 노래가 부여 무량사 법당 앞의 주련(柱聯)으로 걸려있다.
진묵 대사(震默大師, 1562~1633)는 김제군 만경면 불거촌(佛居村)에서 태어났다. 불거촌은 진묵 대사와 같은 고승을 낳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어린 나이에 전주 봉서사에 출가하였다.
진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과 사명과 같이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호국불교의 대열에 서지 않았다. 전란 후 인구는 3할이 감소했고, 토지는 7할이 황폐화된 나라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그들의 아픔을 보듬고 치유해준 대승보살이었다. 부처의 자비를 현실사회에서 몸소 실천한 민중들에게 희망의 등불이었다. 명리와 격식의 옷을 벗어버린 걸림이 없는 탈속(脫俗)한 자유인으로 진정한 출가 수행자의 모습이다. 그래서 고려 말 나옹 선사와 더불어 석가모니의 후신불로 평가받고 있다.
진묵 대사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의 기록이 없다. 구전으로 전설과 설화문학으로 전해오다 그의 사후 200여 년이 지나 조선말에 초의 의순 선사(1786~1866)에 의해서 그의 삶의 궤적을 모아 최초로 편찬한 〈진묵조사유적고〉에 의해서 진묵 설화가 문자화되었다.
진묵 대사의 오도송은 승속을 망라하여 대장부의 호탕한 마음인 호연지기를 읊은 시 가운데 최고 절창이다. 기구(起句) “하늘을 이불 삼고 산을 베개 삼아 땅 위에 누웠노라”는 깨달음의 마음이 천지자연과 하나가 된 우주심, 대아심(大我心)의 경계를 읊은 것이다.
고려 때 혜심의 〈무의자시집〉(우리나라 최초의 선시집)의 “하늘을 천막 삼고, 땅을 자리 삼아, 산으로 병풍 삼고 바위로 벽을 삼는다(天幕山爲席 山屛石爲壁)”의 시구를 용사(用事)하였다. 진묵 대사의 우주 천지심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승조 스님이 〈장자〉를 읽고 “천지와 땅은 같은 뿌리이고, 세상 만물은 하나”이라고 용해·요약한 것과 같은 내용이다.
진묵 대사의 고향 김제 금산사에서 깨달음의 사회화를 주창하고, 지구촌공생회를 창립하여 동남아와 아프리카 주민에게 우물물을 파줘서 그들의 갈증을 해결해 세계일화(世界一花)의 모습을 보여준 월주 스님의 좌우명이기도 한다.
오도송은 불립문자를 주장하여 고정관념이나 격식에서 벗어난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일반 한시처럼 운율이나 고사(故事) 등에 얽매이지 않고, 구애되지 않는다.
승전결구에서 “바닷물을 술동이 삼아서 마시고 취하여 춤을 추니 긴 소매가 중국에서 제일 높은 곤륜산에 걸릴까 봐서 염려된다”고 대장부의 자적(自適)하고, 걸림이 없는 무애심(無碍心)을 읊고 있다.
우리 사회가 출산율이 급격이 감소하고 코로나19 이후 경제가 어렵다. 나라의 위기요 불교의 위기이다. 지금 국민은 한 마음으로 공명조(共命鳥) 의식으로 고통 받는 백성과 함께 하여 용기와 희망을 주는 제2의 진묵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