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인 붓다]47 . 영화 〈60만번의 트라이〉와 고시엔
스포츠, 세상을 바꾸다 재일한국계 학교 교토국제고 고시엔 우승 ‘감동’ 열약한 환경에도 쾌거…스포츠 통해 ‘꿈’ 이뤄 ‘60만번의 트라이’도 오사카 조고 실화 담아내
‘공포의 외인구단’은 이현세 만화가 작품의 제목이었다. 한국만화명작 100선 가운데 1위인 이 만화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들의 매력과 그들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는 서사가 주는 희망과 감동은 영화도 되고 드라마도 됐다. 이제는 주류도 아니고, 잘 나지도 못했고, 금수저 아니라 보통 수저도 타고 나지 못한 아웃사이더들이 모여 야구 하나로 꿈을 이룬다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현상을 일컫는다.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차별과 소외를 딛고 최고에 오르는 것은 워낙 기적같은 일이라서 만화나 영화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겠거니 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8월 일본에서, 그것도 야구 만화에서 늘 ‘꿈의 구장’으로 등장하던 일본 고교야구 고시엔 무대에서!
“동해바다 건너서야마도(大和)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아침 저녁 몸과 덕 닦는 우리의 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이라는 노랫말 교가가, 그것도 순 한국어 그대로 일본에서 야구장에서 울려 퍼졌다. 국제대회도 아니고, 한일 친선 경기도 아니고, 그냥 그 유명한 일본 고등학교 전국 야구 대회인 고시엔 대회에서는 우승팀 교가를 연주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우승팀 이름은 교토국제고등학교.
교토국제고는 중학교, 고교생을 다 해서 학생 수가 160명 정도의 작은 학교다. 재일한인들이 민족 정체성을 지키면서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해방 직후인 1947년 설립한 교토조선중학교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1945년 8.15 당시 일본에는 200만 명이 넘는 동포가 일상적인 박해와 민족 차별에 시달리며 살고 있었다. 이들이 귀국하는 문제에 대해서 패전국인 일본 정부나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총사령부는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었다. 1인당 1000원 이상을 갖고 나갈 수 없는 가혹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집도 절도 없는 고국으로 귀환할 엄두를 못내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분단이 고착화될 무렵까지도 60만여 명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일본에 남게 되었다.
그러다 남북이 분단된 상태로 남한과 북한의 국적을 선택할 수 없는 재일조선인들은 국적이 여전히 ‘조선’인 상태로 발이 묶였다. 교토조선중학교는 한국 정부의 인가를 받아 1961년부터는 교토한국중학교, 1965년에 한국고등학교로 중·고등학교 교육을 해오다가 2003년, 교토국제고로 이름을 바꾸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정식 학교 인가를 받고 국적에 상관없이 학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재적 학생의 65%는 일본인이고 한국계 학생은 30%가량이니 명실상부한 국제고가 맞다.
일본 정부의 인가를 받지 못했던 대안 학교에서 정식 학교가 되기까지 여러 세대를 이어오는 동안 재일조선인 국적의 1세대는 세상을 떠났고, 저출생 기조에서 인구가 줄면서 재일조선인의 수도 줄었으나 여전히 민족 교육을 하는 터전이 필요한 상황에서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국제고로의 전환과 더불어 야구부 창단은 좋은 선택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학교를 이어나가기 위해 1999년에 야구부를 창단했으나 처음에는 야구부 성적이 형편없다보니 정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0년 이후부터 꾸준히 야구부가 좋은 성과를 내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한다. 2020년대에만 세 번의 고시엔 진출에, 4강 진출 한 차례에 이어 올해는 우승까지 차지한 신흥 야구 명문고가 된 것이다. 야구를 하기 위해 학교에 지원하는 학생이 점차 늘어 이제는 교토국제고 전교생 160여 명 가운데 무려 60명가량이 야구부란다.
한국에서도 많은 기사와 SNS 포스팅이 쏟아졌고 한일 문제로 늘 다투던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공식적으로 축하를 전했다.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도 SNS를 통해 “교토국제고의 한국어 교가가 고시엔 결승전 구장에 힘차게 울려 퍼졌다.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면서 “열악한 여건에서 이뤄낸 기적 같은 쾌거는 재일교포들에게 자긍심과 용기를 안겨주었다. 야구를 통해 한일 양국이 더욱 가까워졌으면 좋겠다”고 축하를 보탰다.
여기까지 정말 재일조선인들은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그런 노력이 담긴 영화 가운데 박사유, 박돈사 감독이 만든 오사카 조고 럭비부 소년들을 통해 60만 재일조선인을 돌아보는 〈60만 번의 트라이〉도 있다.
‘트라이’는 럭비 용어다. 노력하다, 해보다, 시도하다, 하려고 하다라는 영어 기본 단어 말고, 그냥 그 용어 그대로의 상대편의 인골(ingoal) 안에 공을 찍는 일을 일컫는 스포츠 용어. 트라이가 성공하면 4점을 득점하고, 덤으로 골킥을 해서 추가득점을 할 권리를 얻는다.
그 트라이를 60만 번이나 한다는 〈60만 번의 트라이〉 라니! 럭비는 우리나라에서는 비인기종목이다. 그 비인기종목인 럭비를 하겠다고 일본에서, 그것도 지방도시 오사카에서, 재일조선인 3세들이 뛰고 구르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왜 60만 번이냐고?
‘자이니치(在日)’의 숫자가 60만 명이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들의 입장에서는 일본에 귀화하면 더 이상 핍박받는 일이 없어지는 대신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된다. 남쪽을 선택하면 말과 글을 배우기 힘들어 뿌리를 잊게 된다. 북쪽을 선택하면 전 세계에서 고립된 이방인이 된다. 어디를 선택하든 다른 반쪽을 포기해야 한다. 가령 부모 가운데 하나는 남쪽 출신이고 다른 하나는 북쪽 출신이라면? 그러니 그냥 ‘조선’ 국적을 유지하는 ‘자이니치(在日)’의 숫자가 60만 명이다.
〈60만 번의 트라이〉 그 60만 조선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뜨거운 응원가다. 어느 하나를 얻고자 다른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뛰고, 웃고, 서로를 믿는 가운데 어른들이 닫아 건 빗장을 아이들이 열어가는 세상을 보여준다. 학부모, 선생님뿐 아니라 오사카 조고 아이들은 시합 중에는 편이 갈리지만 끝나면 ‘네 편 내 편’이라는 사이드가 없이 함께 교류하고 즐기는 럭비의 ‘노사이드 정신’으로 함께 달리는 즐거움을 나눈다. 이렇게 일본 학교 아이들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럭비 한마당에서 한일관계와 남북분단 현실이 나아가야 할 길의 방향이 보인다.
〈60만 번의 트라이〉의 럭비 선생님은 ‘스포츠가 사회를 바꾸게 하라’고 한다.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우승은 ‘공포의 외인구단’이 사회를 바꾸고 있는 기적 같은 현실이다.
지난해, 조계종에서는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주최로 일본 도쿄 및 교토 일대를 돌며 ‘간토학살100주기 추도 및 재일조선인 역사문화순례’를 진행했다. 이때 해방 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지금도 살고 있는 마이즈루만과 우토로 마을을 차례로 방문하고 피해와 가해의 역사가 뒤섞인 ‘요코아미초 공원’부터, 일본 시민들 주도로 해마다 치러지는 ‘간토학살 추도행사’, 마이즈루 ‘순난의 비’ 등을 두루 돌아보고서 우리가 할 일이 “바르게 알고, 기억하고, 교류해서 다음 세대에게 새로운 기억을 안겨주자”라는 깨달음을 나누었다.
교토국제고의 우승과 한국어 교가는 또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한국에 살고 있는 숱한 이주민 이웃들이 방송에서 유창하게 한국말 하는 모습도 좋지만 자신들의 언어, 부모 나라의 언어로도 우리와 더불어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깨달음. 그것이 바로 교류를 통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기억’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