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경전에세이] 18. 숫타니파타 ①

가장 오래된 붓다의 노래 초기불교 향취 듬뿍 담아낸 ‘最古’ 경전 온전하게 한문 번역되지 않아 덜 친숙해 “佛說 가장 가까운 시구 집대성한 성전” 속세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나침반 역할

2024-09-06     이미령 경전이야기꾼
삽화= 최주현

조금 낯설지만 매우 특별한 경
오래되었다는 것은 특별합니다. 그 수명이 길다는 점은 수많은 세대를 거쳐 내려오면서도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뜻일 테니까요. 와인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푹 무르익는 인고의 시간들을 거쳐 깊은 향기를 품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불교경전들은 대체로 오래되었습니다. 경전마다 다릅니다만 대략 2000년 정도의 나이를 가지고 있지요. 수많은 경전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경전은 〈숫타니파타〉입니다.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인정하는 바입니다. 

〈숫타니파타〉는 초기경전인 니까야 속에 들어 있습니다. 다섯 종류 니까야 가운데 〈쿳다카 니까야〉 속에 들어 있지요. 일본의 남전대장경에서는 〈쿳다카 니까야〉를 소부경전(小部經典)이라 부릅니다. 따로 독립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경전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숫타니파타〉와 비슷한 경이 있습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법구경(담마빠다)〉입니다. 제가 〈법구경〉 앞에 ‘그 이름도 유명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법구경〉은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매우 친숙한데 〈숫타니파타〉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법구경〉은 중국으로 전해져 한문으로 번역되었고, 대체로 중국으로부터 경전을 입수한 우리나라는 한문 〈법구경〉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숫타니파타〉는 온전하게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이 없고, 일부분만이 ‘의족경(義足經)’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다보니 동아시아 불자들에게 〈숫타니파타〉는 그 이름 자체가 낯선 경이 되었고, 〈법구경(담마빠다)〉보다는 덜 사랑받게 되었지요.  하지만 학자들은 〈숫타니파타〉가 부처님의 원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경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법구경〉보다 가치 있는 초기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구경〉 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전재성, 〈숫타니파타〉 해제에서)

“아쇼카 왕의 비문에는 이 〈숫타니파타〉 속에 들어 있는 경 가운데 세 개를 인용하고 있다.”(전재성, 일아 스님)

“〈숫따니빠따〉는 전체 빠알리 삼장 중에서 그 성립연대가 가장 오래된 경전이다.(중략) 이 경전을 읽으면 마치 승원이 존재하기도 전, 아주 초창기 출가자의 삶을 보는 것 같다.”(일아, 〈숫따니빠다〉 머리말)

“불교의 많은 성전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것이고, 역사적 인물로서 고따마 붓다(석존)의 말씀에 가장 가까운 시구를 집성한 성전이다.”(구모이 쇼젠, 〈붓다와의 대화, 초기불경 숫타니파타를 읽다〉 37쪽 재인용)


어느 해설서를 보더라도 〈숫타니파타〉에 대해서는 가장 오래되었고 초기불교의 분위기를 가장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으며 간소한 가르침 속에서 진지한 구도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초기경전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라고 묻는 입문자들에게 〈숫타니파타〉를 천천히 읽어가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무소의 뿔처럼 가야 하는 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이 글귀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작가 공지영이 1993년에 쓴 소설 제목입니다. 내용은 대학 동창인 세 여성이 인생의 파란을 견디면서 좌초하거나 꿋꿋하게 서는 과정을 그린 것인데, 당시 베스트셀러였고 스테디셀러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지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제목이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자는 “홀로 서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빗대서 쓰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제목을 정했지만 출판사에서는 난색을 표했고, 당시 신인 작가 공지영의 고집으로 이 제목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위키백과에서 인용).

이 제목이 바로 〈숫타니파타〉에 들어 있는 ‘무소의 뿔의 경’에 담긴 41개의 시 마지막 구절에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목, 멋지지 않나요? 바른 길을 걸어갈 때 벗의 존재는 절실하지만 참다운 벗을 구하지 못하면 그대 혼자서 가라는 것이지요. 눈치도 보지 말고 주눅도 들지 말고 타협하거나 머뭇거리지도 말고 외로워도 힘들어도 그 길이 나의 길이라 생각한다면 혼자서라도 걸어가라는 가르침! 

저녁 강의를 마치고 지치고 허허로운 감정으로 귀가하는 길에 어둑한 도로, 차창에 비친 추레한 내 모습을 보면 문득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라는 회의가 슬금슬금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내 가슴 속 저 바닥에서부터 고개를 드는 구절이 바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숫타니파타〉의 구절입니다. 

종교적 차원에서 고독한 수행자를 격려하는 시구(詩句)이지만 이 구절은 일생을 살아가는 우리들 보통 사람들의 지치고 외롭고 두려워 잔뜩 움츠러든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언어입니다. 그런 걸 보면 〈숫타니파타〉는 출가 수행하는 구도자의 삶에 중점이 놓여 있지만 인생이라는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보통 사람들에게도 나침반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경입니다.

힙합에만 배틀이 있는 건 아니다
배틀(Battle)이란 말, 싸움, 전투, 다툼의 뜻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힙합에서의 배틀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청바지를 느슨하게 입은 젊은이들이 양편으로 갈라서서 상대방에게 도전합니다. 슬그머니 상대방 화를 돋우어 싸움을 거는데, 상대방보다 자신의 우위를 보여주기 위함이지만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자신들이 가진 기량과 기술, 예술적 가치를 한껏 뽐냅니다. 상대방을 경멸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디스(Disrespect 줄임말)’는 거칠어 보이고 매우 불쾌하게도 느껴지지만 그걸 아주 세련되게 받아서 더 멋진 모습으로 되받아칩니다. 전혀 동떨어진 노래나 춤이 아닌, 배틀의 라이벌과 라임을 맞추며 한결 멋진 가사를 춤과 선율에 실어냅니다. 두 팀은 라이벌이지만 한 무리의 멋진 힙합전사들로 관객의 박수를 끌어내지요.

좀 엉뚱하다 싶지만 〈숫타니파타〉를 읽을 때면 이 힙합 배틀이 떠오릅니다. 〈숫타니파타〉 앞부분에 등장하는 ‘다니야의 경’에서 도드라집니다.

다니야라는 목동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외로운 양치기 정도의 가난한 젊은이를 상상하시면 안 됩니다. 숫타니파타 주석서에 따르면, 다니야는 3만 마리의 황소를 지녔고, 2만 7천 마리의 소에서 젖을 짜며 7명의 아들과 7명의 딸, 그리고 수많은 하인을 거느리고 있는 어마어마한 축산업자라 해도 좋은 사람입니다. 당시에는 소가 재산의 척도였을 터, 그의 자부심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바로 이런 다니야가 부처님과 게송 배틀을 합니다. 부처님? 소가 몇 마리나 있을 것이며, 출가하셨으니 아들딸이나 하인은 몇 명이나 거느렸을까요? 가진 게 하나도 없는 부처님과 어마어마한 부를 지닌 축산업자의 배틀입니다.

먼저 다니야가 노래합니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고, 마히 강변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내 움막은 지붕이 덮이고 불이 켜져 있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부처님의 답가는 이렇습니다.
“분노하지 않아 마음의 황무지가 사라졌고,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내 움막은 열리고, 나의 불은 꺼져 버렸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다니야는 모든 것을 다 가졌고 완벽하게 챙겼으니 하늘에서 엄청난 비가 내려도 아무 걱정이 없다고 노래했고, 부처님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고 심지어 강변에서 지내면서 닫아 걸 문도 없고 비가 와서 행여 꺼질세라 염려할 불도 없으니 하늘에서 비가 내려도 상관없다는 입장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역시 다니야는 또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아내는 온순하고 탐욕스럽지 않아 오랜 세월 함께 살아도 내 마음에 들고, 그녀에게 그 어떤 악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이 운을 받아서 부처님도 노래합니다.
“내 마음은 내게 온순하여 해탈되었고 오랜 세월 잘 닦여지고 아주 잘 다스려져, 내게는 그 어떤 악도 찾아볼 수 없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면 웃음이 터집니다. 다니야는 순종적인 아내가 잘 길들었으니 그게 아주 행복하다고 말하는데, 출가한 까닭에 아내가 없는 부처님은 당신의 마음을 잘 길들어서 마음 속에 악이 사라져서 행복하다고 대답합니다.

여러분은 ‘저 사람’에게서 내 삶의 기준을 두겠습니까? 아니면 ‘나’에게서 내 삶의 기준을 두겠습니까? 다니야와 부처님, 누구의 손을 들어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