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중계] "졸리면 자라···내 집착 찾는게 참선 시작"

경허 선사 게송 '저두상수면' '잘 조는 게 수행' 의미 담겨 집착과 惡見이 자신을 얽매어 하루 15분 자신을 관조해보길 

2024-09-05     정리= 신중일 · 김민재 기자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주경 스님이 '저두상수면'을 주제로 법문을 설하고 있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소장 정도 스님)는 8월 23~26일까지 동국대 대각전 이해랑 예술 극장 2층에서 '선지식 · 지성인과의 만남' 초청 강연을 개최했다. 이 프로그램은 제5회 서울국제명상엑스포 연계 프로그램으로 마련됐다. 첫날인 8월 23일 오후 2시부터는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주경 스님이 '저두상수면(명상, 고개를 숙이고 졸고 앉아 있는 것)'을 주제로 법문을 설했다. 이날 강의 내용을 정리·게재한다. 

전통적인 대승불교에서 가장 빠르게 깨닫는 방법은 간화선(看話禪)이다. 선은 전문가의 영역이다. 명상은 영어로 메디테이션(meditation)이라고도 하고 묵상(默想)이라고도 한다. 명상은 일반인들을 위로, 휴식, 재충전을 위한 것이다. 이를 합쳐서 선명상이라 한다. 선명상은 잘 수행해서 부처가 되어 깨달음에 이를 수도 있고, 삶에 서도 고통을 치유하는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오늘 주제는 저두상수면(低頭常睡眠)이다. ‘고개를 숙이고 졸고 앉아 있다’라는 경허 스님(1849~1912)의 게송이다. ‘저두상수면 수외갱무사 수외갱무사 저두상수면’(低頭常睡眠 睡外更無事 睡外更無事 低頭常睡眠) 고개를 숙이고 항상 졸고 있고 졸고 앉아 있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없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대선사가 왜 이런 게송을 만들었을까. 아주 간단하다. 잘 조는 것이 잘 수행하는 것이다. 

대부분 참선하면서 조는 것을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한다. 자세와 마음이 집중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는 사람이 오히려 잘 버틴다. 졸지 못하는 사람은 불면증에 빠져 온몸에 피로가 쌓여도 잠을 자지 못한다는 지경에 이른다. 불면증은 사람들에게 큰 고통, 아픔, 피로다. 참선하면서 졸지 못하는 사람도 똑같다. 어금니, 잇몸이 모두 헤어질 정도로 8시간, 10시간씩 참선에 정진하면 몸이 녹아난다. 도반의 하소연을 듣고 ‘잘 조는 것이 진짜 도를 잘 닦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을 자지 않고 정신이 집중되고 개운하다면 문제가 없지만 몸을 괴롭히는 수행을 한 달, 석 달 하는 것은 고행 중의 고행이다.

많은 사람의 ‘이익(복지)’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이유고 목적이다. 더 나아가면 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상의 신들까지 포섭된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생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세상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 불법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의 수행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참선 명상이다. <열반경>에 따르면 사념처를 수행하라고 가르치셨다. 사념처가 참선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경전에 따르면 두 가지의 ‘화살의 비유’가 있다. 두 번째 화살과 독화살의 비유가 그것이다. 내가 몸이 아프면 마음으로 근심, 걱정, 슬픔을 가지게 된다. 몸이 아픈 것은 첫 번째 화살이다. 이건 누구나 맞을 수 있다. 문제는 두 번째 화살이다. 교통사고가 나거나 뜻밖에 병이 들 수도 있다. 여기에 마음의 병이 겹치는 것이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는 이제 중요치 않다. 원인조차 모를 정도로 보복이 거듭될 뿐이다.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계속 맞는 거다. 누구라도 불현듯 오는 사고, 사건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불행을, 사건·사고를 잘 헤쳐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 방법은 바로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다. 내가 쉽게 설명하는 방법의 하나가 ‘나한테 닥친 일을 옆집 사람한테 생긴 일처럼 생각하라’이다. 우리 집 자식이 시험에 떨어지면 밉고 원망스럽지만, 옆집 자식 일이면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다. 담담하게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지혜는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생겨난다. 고통이,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한 번 생긴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은 독화살에 맞은 사람이 독화살을 쏜 사람, 재료를 알기 전에 치료받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또 첫 번째 화살에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반복해 맞는 것이다. 

세상의 아픔과 슬픔을 쉽게 잊으라는 것이 아니다. 치유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나만 바라보게 됐을 때 ‘나’만큼 세상에 슬프고 아프고 괴로운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옛날 사람들은 내 인생을 쓰면 두툼한 백과사전이 여러 권 나올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납골당 가면 딱 두 줄 나온다. 이름과 태어난 날짜와 죽은 날짜다. 묘비명조차 없는 경우도 많다. 

성철 스님은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법문집을 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은 내가 남을 바라보는 것과 병행된다. 나는 내가 소중하고 귀하고 비교할 바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의 5000만명 중 한 명이고 지구상 70억명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나에게만 천착하면 다른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하고 명상하고 불교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지만 두 번째 화살은 피하기 위함이다. 나에게 생긴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에서 내 마음으로 내 삶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그게 바로 고개를 숙이고 항상 졸고 앉아 있는 것이다. 중생들은 항상 좋은 것,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다. 또 남 이야기하고 망상에 빠져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반 이상이다. 한국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 미래를 장담할 수도 없고 집을 살 수도 없다. 옛날에는 대학교 졸업하면 바로 취직해서 일하게 됐다. 6개월 이상 노는 사람이 없었다. 근데 요즘은 취업 준비를 10년씩 한다. 노력한 만큼 좋은 곳으로 가고 싶은 것이다. 공부도 그렇다. 대학이 다가 아니다. 세계에서 보면 한국의 최고 대학도 100위권도 들지 못한다. 

삶에 천착 되고 자기 시선에만 고정되면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나도, 다른 사람도, 세상도 제대로 못 보는 것이다. 한 발자국 물러나서 나, 다른 사람, 세상을 제대로 보는 게 졸고 앉아 있는 것이다. 하나의 특별한 관점, 시점에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오랫동안 템플스테이 하면서 참선을 지도했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가슴속에 잡념이 일어 참선이 힘들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그게 첫 출발이다. 수많은 생각에서 어떤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가장 나를 힘들고 괴롭고 슬프게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러다 생각이 다 없어지면 경허 스님처럼 도인이 되면 앉아서 졸고 있는 거다. 

옛 선사들은 목마르면 차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잤다.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는 것은 중생의 번뇌, 집착 때문이다. 그걸 찾아내는 게 참선의 첫 출발이다. ‘내가 생각이 많구나’ 하는 때부터 참선이 시작된다. 이어 그 생각들을 하나하나 비춰보면 불필요한 생각, 잘못된 생각이 저절로 가라앉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 점차 나아진다. 나는 참선·명상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자기를 들여다보게 된다. 참선, 명상, 기도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이다. 자기의 상처를 계속 덧나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집착하고 애착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경전에 보면 사람 몸뚱이를 ‘비단 보자기’라 한다. 그 속에는 변(便)이 들어있다. 자기 속에 변 안 들어 있는 사람 없다. 그런데 이 몸뚱이가 귀한 줄 착각하고 집착한다. 내 삶에 있어 본질을 봐야 한다. 객관화하고 부처님의 안목으로 생각해 여실지견(如實知見) 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볼 때는 사람들이 굉장히 지혜롭다. 조언도 해주고 다른 방법도 설명해 준다. 그런데 막상 나에게 일이 닥치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여기서 나, 나의 자식, 내 가족에 대한 집착, 그 집착에서 멈추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야 한다. 그럼 자유로워진다. 졸고 앉아 있는 사람은 어떤 집착과 선입견이 없다. 그저 담담하게 있을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세 가지 악견(惡見)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첫째가 선입견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 선입견이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선입견들, 피부색, 신장, 외모로 차별을 만든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근사하고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은 사기꾼들이 많다. 60년대 ‘black is beautiful’이라는 표어가 유행했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고 흑인 운동가들이 선입견에 맞서 만든 것이다. 

두 번째 악견은 편견이다. 편견은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이다. 종교, 인종 등으로 사람을 재단한다. 마지막은 고정관념이다. 잘못된 줄 알면서 바꾸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안 되는 줄 알면서 고집을 피워서 사건·사고를 일으킨다. 때로는 술과 마약,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 취해서 어리석은 일을 벌인다. 

나는 참선을 15분을 하라고 권한다. 가만히 15분 동안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길 바란다. 싸우지 않고 시비하지 않는다. 내 속을 오랫동안 감고 있는 분노, 욕망, 슬픔을 모두 놓아야 한다.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끌어줘야 한다. 그게 참선하고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앉아서 참선하다가 잠을 잘 자고 있으면 내가 도를 잘 닦고 있다고 생각하라. 하지만 잠이 오지 않으면 나에게 어떤 번뇌가 있길래 15분조차 앉아 있을 수 없는지 스스로 되짚어봐야 한다. 분노와 원망과 세 가지 악견을 너그럽게 보고 부드럽게 하면 마음의 문을 열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이 부분을 여러분이 실천하면 아마 수행이 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