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선 거두 종달 이희익, ‘불교언론인’이었다

[주목! 이 논문] 종달 이희익의 행적과 언론 활동 선도회 창립… 재가선 수행 이끌어 비구 측 신문 ‘대한불교’ 창간 주도 13년간 ‘법시’ 발간하며 언론인 활동 첫 禪 잡지 ‘선문화’ 창간 선풍 진작

2024-09-05     정리=신중일 기자

선도회를 창립한 종달 이희익 거사는 백봉 김기추 거사와 더불어 근현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재가 선사로 이름을 알렸다. 그간 종달 이희익에 대해서는 선수행과 수행법에 대한 조명이 이뤄졌을 뿐 ‘불교언론인’으로서의 면모는 부각되지 못했다. 이상호 서강대 종교연구원 연구원이 〈보조사상〉 제69집에 ‘종달 이희익의 행적과 언론활동’ 논문을 게재했다. 이를 정리해 게재한다.〈편집자 주〉 

노년의 종달 이희익 선사. 목동 자택에서 촬영됐다. 이희익 선사는 백봉 김기추와 더불어 재가선의 양대 산맥이었다. 그는 선수행자 뿐만 아나라 불교언론인으로서의 면모도 가졌다.

종달(宗達) 이희익(李喜益, 1905~1990) 선사(禪師)는 한국의 대표적인 재가선(在家禪)의 달인이다. 

그의 활동 시기는 한국 근현대 격동의 시대였으며, 근대불교에서 현대불교로 발전해 나가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비구승과 대처승 간 분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대중들이 어려워하던 선(禪)을 평생의 전공으로 여기며 선포교(禪布敎)에 힘썼으므로 그의 행적을 통해 당시 대중적인 선포교 과정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입적 후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선도회와 그 문인들의 활동이 언론계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학술회에서 연구 발표 및 학위논문도 있었지만, 그에게 집중한 학문적 연구는 최근에 이르러 비로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그의 선사상과 수행법에 대한 박사논문 1편과 학술지 논문 2편이 있고, 자서전인 〈인생의 계단〉을 토대로 그의 행적을 다룬 박사논문 1편이 있다. 

그간의 연구들은 대부분 선사로서의 면모에 집중하고 있으며, 불교계 언론인으로서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았다. 

불교 입문
종달의 본관은 전주 이씨이고, 1905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부유한 집안의 12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1990년 서울에서 입적했다. 1917년(12세)에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6년 만에 졸업하고, 1923년(18세)에 함흥상업학교에 입학하여 3년 후 졸업했다.  

그 후, 이틀 만에 일본으로 가서 대학 정과에 입학할 수 있는 갑종 중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고자 대판(오사카)의 나니와 상업학교 4학년에 편입(1926년)했다. 그곳을 1년 만에 졸업하고, 법정대학 상과에 입학(1927년, 22세)하였으나 성격에 맞지 않아 1년 만에 그만두고, 곧바로 일본대학 철학과에 입학(1928년, 23세)했다. 

일본대학을 졸업한 연도는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데, 일본유학 기간이 대판에서 1년, 동경에서 4년이라고 했으므로 오사카 나니와 상업학교 1년 및 동경 법정대학 1년을 제외하면, 동경 일본대학은 3년 동안 수학한 셈이다. 그래서 1930년(25세)까지 일본대학에서 수학하고, 그 다음 해인 1931년(26세)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 함남일보사에 한두 달간 다녔으나 그만두고, 일본대학 시절에 만나 같이 졸업한 조선불교단 후원 유학생인 안종호(동경 대정대학)로부터 불교청년회관 건립모임 참여를 제안받았다. 그는 조선불교단과 아무 관련이 없고 불교도 몰라서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거듭된 요청에 다시는 고향을 찾지 않겠노라 맹세하고 경성으로 올라가 불교청년회에 가입했다. 막상 그 모임에 참가하면서 불교를 만나고는 오히려 바른길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불교와 인연을 맺고 난 후 그의 인생행로는 실존적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종교적 본능에 따랐다. 후일 자서전에서 ‘선(禪)이 전공’이라고 한 말은 그의 전 인생을 통해 증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郞, 1881~1969)가 뒤에서 조선불교단을 지도했다고 하므로 이때 나카무라를 만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나카무라는 〈조선불교〉의 편집인이자 발행인이었다. 조선불교단에서 〈조선불교〉의 폐간이 논의되자 나카무라가 1928년 9월부터 인수하여 사장이 되었다. 

조선불교잡지사로부터 일을 해달라고 요청받았을 때는 1932년(27세) 전후로 추정된다. 자서전에서 “한두 해 하는 동안 잡지 발행에 익숙해졌고”라는 표현이 있으므로 1934년(29세)에 출가하기 전에 재직 기간은 최소 2년 이상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불교〉에서 잡지 발간을 위한 원고 모집 요청, 발송 등 기본적인 업무를 보다가 나중에는 편집도 배우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때 경험을 해방 후 〈대한불교〉 〈법시〉 〈선문화〉 등의 언론 및 출판 업무에 활용할 수 있었다. 

출가
종달을 출가의 길로 이끈 사람은 나카무라였다. 그는 나카무라에 대하여 ‘선에 조예가 깊은 고사(高士)’라 하였고, “특히 조선 사람 입장에 서서 많이 애쓴 분으로 유명했다”고 기억하였다. 

국내에서 나카무라는 조선불교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 일본인으로 평가하는 연구 결과가 있지만, 이와 다른 견해도 있다.

자서전에는 연도의 표기 없이 그가 27세 되던 해 9월 초순에 화산을 은사로 출가하여 ‘종달(宗達)’이라는 법명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나이 27세로 보면 1932년 정도로 추정 되지만, 〈조선불교〉제97권 1934년 2월호에 수록된 그의 기고문 ‘처음으로 참선(參禪)하며’에 따르면, 1월 10일에 경성별원 접심회(接心會)에 처음 입문했고. 자서전에서는 9월 초순경에 출가했다고 하였으므로 1934년(29세) 9월에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종달 이회익 선사가 운영한 월간 〈법시〉 제11호 중 일부. 종달 노사는 ‘백종의 유래’를 통해 효에 대한 의미를 되새겼다.

〈대한불교〉 창간 및 속간
해방 전 종달의 행적은 출가와 수행으로 요약할 수 있고, 해방 후에는 재가선 포교와 불교언론인으로서 활동으로 압축할 수 있다. 

1960년 초만 해도 조계종은 비구승과 대처승의 분규로 인해 아직 조직적인 체제가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종달은 일제강점기의 불교에 대하여 “우리 불교계는 대처승으로 변질됐다”는 입장이었으므로 불교정화운동 당시에는 비구 측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는 비구승 출신의 수행 경험에 따라 선수행을 전문도량에서 청규에 의해 진행해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대한불교〉 창간의 핵심 인물이었던 청담(靑潭, 1902~1971) 선사와 이미 해방 전에 만났던 인연이 있었던 그는 비구 측의 〈대한불교〉 창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대한불교〉는 비구 측의 의사를 전달하고 결집하는 소통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자료에서 1960년 창간 당시 종달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증언한다. 〈대한불교〉 창간 후 재정난으로 2개월 정도 중단됐을 때, 고향 선배인 추담(秋潭, 1898~1978) 스님의 소개로 한의사인 김춘강을 만나 〈대한불교〉를 속간(續刊)하기로 했다. 오경후에 따르면, “아울러 오늘날 불교신문의 전신인 대한불교가 경영난으로 폐간될 위기에 처하자, 김춘강·이희익 씨와 함께 정상화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법시〉 창간
종달이 활동한 언론 분야 중 가장 오랫동안 종사한 것은 〈법시〉 간행이었다. 〈무문관〉을 비롯한 여러 저서의 약력에는 ‘1964년 사단법인 법시사(法施舍) 상무이사 및 월간 〈법시〉 편집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서전에는 그가 법시사에 입사할 당시 상황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그는 〈법시〉 간행에 필요한 재정 때문에 동분서주하다가 정종원을 만났고, 도와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정종원은 법시사에서 두 번 일했는데, 1957년부터 1961년까지 그리고 1967년 4월부터 입적하기 전 1977년 3월까지 법시사를 이끌었다.

정종원이 종달을 만났을 때는 두 번째 일을 시작할 때였다. 그는 선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염불을 했던 정종원과 〈법시〉의 편집 방향이 다른 점에 아쉬움이 있었지만, 선불교 관련 기사가 편중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정종원과 합심하여 〈법시〉를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한편, 자서전에는 13년간 법시사에 상무이사로 근무하다가 1976년에 사임했다고 했는데, 10년이라고 말한 부분도 있다. 1975년 7월에는 〈선문화〉 창간에 전념하기 위해 〈법시〉 편집장에서 사임하였지만 이사직은 1976년 7월까지 유지했다. 

전체적으로 법시사에서 13년간 근무하면서 법시사 운영의 정상화와 〈법시〉 간행의 초석을 놓는 데 기여하였으므로 〈법시〉를 말할 때는 그를 빼놓을 수 없다. 

〈선문화〉 창간
법시사를 퇴임한 종달은 〈선문화〉를 1975년 5월호부터 창간해 7월호까지 두 번 발간 후, 1975년 10월호부터는 본격적으로 문공부에 등록한 잡지로 창간했다. 당시 선 관련 잡지의 불모지였던 한국 불교계에 현대 최초의 선(禪)전문 잡지로 알려진 〈선문화〉를 통해서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선포교의 교두보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창간 초기부터 발간을 책임지기로 한 인쇄소에서 갑자기 못하겠다고 중단하자, 선도회 회원들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17호까지 간행했다. 1976년 6월호까지는 정상적으로 매월 발간했으나, 재정과 건강상 문제로 계속할 수 없어 휴간했다. 1977년 11월부터 다시 계간지로 간행했으나 결국 1979년 3월에 완전히 중단하고 말았다. 비록 〈선문화〉 간행은 일찍 중단됐지만, 고령에도 선포교에 심혈을 기울인 그의 원력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1959년부터 1979년까지 20여 년 동안 〈대한불교〉와 〈법시〉 및 〈선문화〉 등을 통해서 불교 언론의 초석을 다졌던 그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것은 오직 선풍(禪風)을 일으키고자 한, 평생 원력 때문이었다. 
 

이상호 서강대 종교연구원 연구원

그의 행적 중에서 재가선 포교 외 또 하나의 기둥은 1959년부터 1979년까지 약 20여년간 매진하였던 불교 언론 활동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선포교를 위한 문서포교의 과정이었다. 비록 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지만, 문자나 설명 없이는 종지(宗旨)를 전할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