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법사의 안심뜰] 대가 바라지 않고 베푸는 마음

16. 무주상보시가 어려워요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생색 반응마저 내 만족임을 알라

2024-08-19     김영애 문사수법회 법사
김영애 문사수법회 법사

부처님 가르침의 으뜸은 ‘보시’다. 〈금강경〉에서도 가장 크게 배우는 것은 상에 머물지 않는 ‘무주상보시’인데, 주고 나서도 주었다는 생색을 내거나, 대가를 바라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다. 아침마다 온라인에서 함께하는 한탑 스님의 〈금강경법문〉 윤독시간에 정희님(가명)이 보시를 함에 있어 어려움을 토로했다. 

|“129페이지에 ‘생각으로 헤아리기 시작하면 나가 생기게 되고, 나가 생기면 너가 생기니 너와 나의 대립이 있는 상대 세계에 머물게 될 뿐입니다. 좀 더 나은 내가 모자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준다면 이는 상에 머무는 보시이기에 그런 보시의 복덕도 유한일 수밖에 없습니다.’를 읽으면서 저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상황이나 여건이 되면 베풀고 보시하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어떠한 이해관계가 없을 때는 바라는 바 없이 그냥 보시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하고는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가 힘들어요. 가령 명절이나 생신 같은 때에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아랫사람 입장에서 무언가를 해드렸는데, 받으신 분이 그걸 고맙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왜 넌 이거밖에 안 하니?’라고 하면 너무 힘들어요. 더 솔직하게는 보시했던 마음도 쏙 들어가고 다시 달라고 말하고 싶어져요. 제 딴에는 하느라 했는데 조금 더 바라거나 ‘이거밖에 안 하냐’는 식으로 말하면 ‘다시는 해드리나 봐라’하는 어깃장도 생기고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될까요?”

공감이 많이 가는 주제라 서현님(가명)도 법담을 이어갔다. “저도 얼마전에 친구하고 이런 주제를 얘기했었는데요. 자식된 도리로 무언가를 해드렸을 때 (내 기대치와 맞지 않는)부모님의 말이나 행동의 표현에 대해 응어리가 맺히는데, 내 마음을 내려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주는 쪽은 늘 부모님이었구나, 나이 들어가면서 어른들의 표현들이 세련되지 못해서 툭툭 튀어나오는 대로 고집대로 말하시는 게 강한 건데, 그런 말들에 먼저 마음이 상해서는 내쪽에서도 말이 곱게 안나가고 거기에 어른들이 또 섭섭해하시는 게 되풀이되는구나를 돌아본 적이 있어요. 일상에서 이렇게 감정이 상할 땐 얼른 ‘언제나 먼저 베풀고 주는 쪽은 부모님이었다’를 떠올려보자며 서로의 고충을 나눈 적이 있어요” 그러자 미영님(가명)도 “무주상보시가 참 어려워서 극복을 못하는 부분인데요. 불교를 믿는 저로서는 몸이 아프고 어려운 사람들한테는 무조건적으로 베풀게 되는데, 제가 불자인 것을 알고 그런 마음을 이용하려는 상황들도 제 경우엔 아주 많아요. 주는 것이 상대에게 독이 되는 경우에는 ‘베풀지 않을 때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어떻게 머물지 않는 보시가 될 수 있을까요? 결국 지혜로워지는 수밖에 없겠죠? 지혜롭게 대처해야 상대한테도 좋고 저한테도 좋은 거니까요. 주고 나서 상대의 반응 때문에 서운함이 밀려오지만,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한 걸로 되었다고, 내가 한 것은 그것으로 끝이다’라고 여기면서, 제 안에 일어나는 부수적인 생각들을 끊어내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하다보니 제 식으로 해석하고 따지면서 속상해하고 서운해하는 습관이 조금은 멈춰지는 걸 경험했어요.”  

종교를 빌미로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며 지영님(가명)은 “저도 제 생활이 있고 아이도 있으니 쪼개고 쪼개서 드린 건데, ‘너는 종교가 불교니까 무조건 보시하고 베풀어야 하는 사람 아니니?’라는 느낌을 받을 때 굉장히 화가 나고 상종하기가 싫을 정도에요. 어른이지만 존경심이 들지 않아요. 사실 누군가가 뭔가를 조금이라도 해주면 우선 먼저 감사하지 않나요? 그런데 또 돌이켜보면 상대방이 고마워하거나 서운해하는 것에 제가 휘둘린다는 건 (제 딴에는 없다고 생각했지만)크든 작든 어떤 바라는 마음이 제 안에 있었다는 증거겠죠?” 

그렇다. 〈금강경〉의 법문에 비추어보면 인정받고 싶은 내가 있기에 일어나는 감정들이다. 사실 누군가를 위해서 뭔가 준비할 때 굉장히 기쁘다. 기쁘게 준비하는 것까지만 하면 상관이 없는데, 받은 사람이 행복해하고 고마워할 것까지 기대를 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흡족하게 반응이 안 오니 ‘괜히 줬어, 아까워, 도로 뺏어오고 싶어’하는 마음이 든다. 나는 주는 것까지로만 끝내고, 나에게 기쁨을 주고 보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복을 지을 수 있게 해 주신 것으로 감사해하자. 내가 챙겨야 될 살림은 ‘서운한 마음과 도로 뺏어오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일 뿐, 그 사람의 반응까지 내가 관여할 건 아니다. 상대방도 서운해할 자유가 있다. ‘내 형편에 이렇게 해드리면 그냥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닌가’라고 내가 생각하듯이 ‘며느리가 돼가지고 이 정도밖에 못하는가’하는 마음을 시어른도 가질 수 있다고 받아들여보자. 

아이나 어른이나 다 자기 기준의 생각이 있는데 내 기준에서 나만 옳다고 하고 있진 않은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 마음만 돌아보자. 내 반응은 내 소관, 상대방의 반응은 그 사람의 소관일 뿐이다. 상대방이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여주길 바라는 것도 나의 욕심임을 알면 줄 때의 마음이 훨씬 편안해질 것이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