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탐사대] ‘三無’ 문턱 낮춘 선암사, 그래서 더 정겹다

14. 조계산 선암사

2024-07-16     현불뉴스
선암사 승선교와 강선루.

선암사에서 해천사로, 다시 선암사로
전남 순천 조계산 서쪽 골짜기에는 송광사, 동쪽 골짜기에는 선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두 절 모두 본사에 해당하는 대찰이다. 한때 송광사스님과 선암사스님은 산길을 통해 두 절을 왕래하여 불법을 구하기도 하였다. 요즈음에는 그러한 구도길을 나선 스님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대신 조계산 고개를 넘어 송광사와 선암사를 순례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듣는다.

선암사는 신라 법흥왕 때 아도화상이 산 이름을 청량산(淸涼山), 절 이름을 해천사(海川寺)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신라에서 활동하던 아도화상이 백제 땅인 이곳으로 와서 절을 창건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또는 통일신라시대 9세기경 도선국사가 비보(裨補)도량의 하나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선암사라는 절 이름을 언제부터 사용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우선 절 주변에 있는 큰 바위에서 선인들이 바둑을 두었다 하여 선암이라 하였단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조선 숙종 때 호암 선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조계산 장군봉 배바위에 올라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자 낙심하여 몸을 바위 아래로 날렸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선사를 받아 배바위에 올려놓았다. “나를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은 보리심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여인은 사라졌다. 호암 선사는 그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지었다. 그때 보았던 관음보살의 모습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원통전에 봉안하였다. 그 후에 사람들은 신선이 내린 곳이라 하여 선암사로 불렀다.

그런데 선암사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자 1761년 상월 스님이 산의 이름을 청량산, 절의 이름을 해천사로 바꾸었다. ‘淸(청)’, ‘ 涼(량)’, ‘海(해)’, ‘川(천)’으로 모두 물 천지다. 산 이름과 절 이름에 담긴 수기(水氣)로써 화기(火氣)를 제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름을 바꾼 보람도 없이 1823년 또 화재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중창 불사와 함께 1825년 다시 그전 이름인 조계산 선암사로 바꾸었다. 이름을 바꾸었지만 큰 영험이 없었나 보다.

현재 선암사 일주문 앞면에는 ‘曹溪山 仙巖寺(조계산 선암사)’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뒷면에는 ‘淸 涼山 海川寺(청량산 해천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웅전 전경.

선암사에는 천왕문·주련·어간 등이 없다
선암사는 화재 방지를 위한 상징이 곳곳에 있다. 대웅전 앞 심검당 환기창에는 ‘水(수)’자와 ‘海(해)’자를 창살처럼 장식하였다. 무엇보다 선암사 경내에는 석등이 없다. 화재가 잦아 아예 불을 상징하는 물건은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로 오는 길옆에 몇몇 석등이 있다. 시주자들이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린 석등이다. 절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있지만, 시주자들의 마음을 마다할 수 없어 길옆에 석등을 두었다.

선암사는 석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삼무(三無)의 사찰로 유명하다. 선암사에는 사천왕문이 없고, 주련이 없고, 어간문이 없다. 어간문은 법당 가운데 문을 말한다. 보통 어간문은 스님이 다니고, 신자는 옆문을 이용한다. 그런데 선암사 대웅전에는 어간문이 없다. 그것은 불제자라면 출가자든 재가자든 모두 똑같이 자신을 낮추라는 뜻에서 그렇단다. 하심(下心)은 불제자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음이다. 주련은 법당 기둥에 세로로 글귀를 적어둔 판을 말한다. 깨달음의 경지는 말이 필요 없기에 주련을 달지 않았다. 선암사 뒷산이 조계산 장군봉이다. 그 장군봉의 기운이 워낙 좋아서 다른 장군은 필요 없다 하여 사천왕문을 세우지 않았다.

간혹 주련 대신 대웅전 부처님의 협시보살(본존불 좌우에 자리한 보살)이 없다는 점을 삼무 가운데 하나로 언급한다. 하지만 대웅전에 협시보살이 없는 사찰은 많다. 그러므로 삼무의 대상은 어간·주련·사천왕문이 나을 듯하다.

가장 아름다운 절 다리, 승선교
선암사는 참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절이다. 주차장에서 편안한 절길을 걷다 보면, 아름다운 승선교(昇仙橋)가 나온다. 승선교 밑에서 바라보는 강선루(降仙樓)와 함께하는 승선교 풍광은, 우리나라 절 다리 풍광 가운데 최고라 평하여도 이견이 없으리라.

승선교는 1698년(숙종 24년)에 호암 선사가 세웠다. 호암 선사는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선암사 중건에 힘을 쏟은 스님이다. 호암 선사 덕분에 지금의 선암사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한다.

산 너머 송광사 능허교처럼 선암사 승선교에도 엽전 이야기가 전해진다. 호암 선사는 다리 불사를 위해 예산을 세우고 한 푼 두 푼 시주를 받았다. 이렇게 모인 시줏돈으로 불사를 마치고 보니, 엽전 세 냥이 남았다. 시주받은 돈을 다른 일에 쓰면 호용죄(互用罪)로 계율에 어긋난다. 이에 선사는 다리에 엽전 세 냥을 남겨두었는데, 지금은 한 냥만 남았다고 한다. 어느 틈새에 엽전을 끼워두었는지, 필자가 다리 밑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지만 찾지를 못했다.

강선루는 승선교에서 100m 정도 거리에 있다. 승선교 아래로 내려와 다리 밑에서 승선교와 함께 보는 강선루는 참으로 멋있다. 신선들이 내려와 목욕재계하고 승선한다는 의미다. 누구라도 속계에서 선계로 들어와 열심히 수행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선암사 터는 지기가 강한 곳이라고 한다. 각황전 터가 특히 강하므로 각황전은 지기(地氣)를 어루만져 주는 역할을 하고, 절 입구에 있는 승선루는 지기가 빠져나감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단다.

강선루를 지나 조금만 가다 보면 알 모양의 연못을 만난다. 삼인당(三印塘)이다.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 국사가 축조하였다.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이다. 이 연못은 무상, 무아, 열반 등의 심오한 불교사상을 나타낸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뒷산이 거북이 형상의 구봉(龜峯)이므로 거북이에게 필요한 물을 주기 위해서 연못을 조성하고, 그 가운데 거북의 알을 상징하는 섬을 만들었단다. 거북이에게는 물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알이 없으면 자손이 끊기기 때문이라나.

선암사 화장실은 ‘뒤ㅅ간’이라 한다.

마을 같은 사찰 경내를 거닐다
선암사 경내는 마치 어린 시절 마을 모습 같다. 집마다 담이 둘러싸여 있고 그 담장 따라 마을 길이 이어지는 것처럼, 선암사 경내가 그렇다. 담마다 몇 개의 전각을 둘러싸고, 담과 담이 길을 만들어 하나의 사찰로 꾸며져 있다.

특히 원통전과 뒤깐(뒤ㅅ간)은 관심 있게 살펴볼 일이다. 대웅전 뒤편에 자리한 원통전은 호암 선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한 뒤 세운 법당이다. 기도 효험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정조 13년(1789년)에 임금이 후사가 없자 스님들이 원통전 등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 임금이 태어났다. 후에 순조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人(인), 天(천)’, ‘大福田(대복전)’이라는 친필 현판을 보내왔다. 대복전은 큰 복을 키우는 밭이라는 축원의 의미다. 불보살님에게 정성을 다함으로써 자신의 복을 자라게 한다는 의미에서 불보살님은 중생의 복밭(福田)이다. 현재 원통전에 걸려있다.

선암사 화장실에는 ‘뒤ㅅ간’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제 일반인도 잘 알듯이, 절에서는 화장실을 해우소(解憂所)라 한다. 통도사 극락암 경봉 스님(1892~1982)이 처음 사용하였다고 한다. ‘근심을 해결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혹은 화장실에서는 옷을 풀어헤치기 때문에 해의소(解衣所)라고 하는데 그 말이 변하여 해우소라 하였단다. 선암사 ‘뒤ㅅ간’ 현판을 보면, 해의소와 유사한 엉뚱한 듯 재미있는 풀이를 한다. 이 현판을 반대 방향으로 ‘ㅅ간뒤’로 읽으면서, 엉덩이를 ‘깐 뒤’에 볼일을 보기 때문에 ‘ㅅ간뒤’라고 한다나. 엉덩이를 까지 않고는 볼일을 볼 수 없으니 말이다. 해학이 넘치는 해석이다.

선암사는 참으로 정겨운 절이다. 불보살님을 뵈면 마을 어르신을 뵙는 듯하고, 담장 길을 걷다 보면 함께 놀던 동무들이 생각난다. 순간 어디선가 외치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찬아, 그만 놀고 밥 먹자.’

▶한줄 요약 
선암사 경내는 마치 어린 시절 마을 모습 같다. 집마다 담이 둘러싸여 있고 그 담장 따라 마을 길이 이어지는 것처럼, 선암사 경내가 그렇다. 담마다 몇 개의 전각을 둘러싸고, 담과 담이 길을 만들어 하나의 사찰로 꾸며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