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국수 기행 스님이 웃는다] 13. 수덕사 반결제 산행과 승보공양 ‘메밀국수’
반철 산행 ‘국수 한 그릇’에 정진의 힘 얻다
분명 거센 장맛비가 예고된 날이었다. 일 년 중 가장 길고, 지루한 장마가 그렇게 시작될 거라고. 올해로 18회를 맞는 덕숭총림 수덕사 반결제 산행과 승보공양 의식은 그처럼 비와 함께 시작될 참이었다. 하지만 당일 아침 세상은 맑고, 밝고, 또 눈부셨다. 전날만 해도 하늘을 꽉 채우던 먹구름 떼마저 감쪽같이 사라진 아침이었다.
오래전 광포한 개발주의의 폭풍이 저 내포 가야산을 무참히 허물려 하던 때. 거대한 산과 그 안의 뭇 생명, 그 산의 품에서 살아 빛나던 문화유산을 지키겠노라 모두 함께 길을 나선 것이 수덕사 반결제 산행의 시작이다. 스님과 재가자 수백 명이 함께 걷는 여름날의 하루. 그 길에 모진 빗줄기가 쏟아질 것이라 했는데, 그 아침은 그저 청명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순간, 우리는 ‘가피’를 떠올린다.
안거의 시간
지난 5월 22일, 전국의 총림과 선원에서 일제히 하안거(夏安居) 결제를 알렸다. 선원에 든 수행자들은 8월의 백중까지 3개월에 걸쳐 용맹정진에 들어설 것이고, 재가불자들은 그 치열한 참구(參究)의 계절을 함께 지키며 응원할 것이다.
‘안거(安居)’
현대까지 이어지는 안거의 전통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출가수행자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인도의 길고 긴 우기와 자연환경은 수행 공동체의 규칙마저 바꾸어 놓았다.
땅속에 숨어있던 숱한 동식물이 가쁜 숨을 내쉬며 지상의 세계로 쏟아져 나오는 여름. 무심코 내딛는 걸음만으로 살생을 범하기 쉬운 그 계절에 부처님과 제자들은 잠시 유행(遊行)을 멈춘다. 뭇 생명을 보호하고, 질병이 돌기 쉬운 시기에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선택. 부처님은 자신의 발아래 스러질지도 모를 작은 생명을 위해 위대한 여정을 스스로 거두었다. 1년 중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진리를 참구(參究)하고, 수행에 전념하는 ‘안거’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북방불교권에서는 기후적 여건에 따라 여름 석 달과 겨울 석 달을 각각 하안거와 동안거로 나누어 진행한다. 그 시간 동안 스님들을 비롯해 외부인의 산문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오롯이 수행 정진에 힘을 쏟는 것이다.
스님들이 결제에 들어설 때 외우는 <범망경보살계본>의 10가지 큰 계율과 48가지 계율은 안거의 목적이 그저 개인의 깨달음에 있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덕과 지혜를 닦아 끝내 중생을 위한 자비행으로 회향 될 것을 다짐하는 시간. 안거는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머무름의 이름이다.
반결제 산행의 시작
숨 쉬는 모든 순간이 삿되지 않도록 분투하는 시간. 하루의 어느 틈새에 깨달음을 향한 단초가 숨어있을지 모르기에 안거 중의 모든 날은 귀하고 귀하다. 그런 하루를 오롯이 꺼내어 수행자와 대중이 함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수덕사의 ‘반결제산행 및 승보공양’ 의식은 지난 2004년, 내포 가야산이 무분별한 개발계획으로 훼손될 위기에 처하며 그 태동을 시작한다. 북으로는 서산 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 서쪽으로는 서산의 개심사, 동으로는 예산 가야사지(현 남연군묘), 남에는 예산 수덕사. 그 외에도 100여 개의 유서 깊은 폐사지와 1700년 한국불교의 보물, 옛 선승들의 전설이 굽이굽이 서려 있는 이 땅의 영산.
어디 그뿐이랴, 이 우직한 산은 조선 독립운동과 동학농민운동 등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살아온 흔적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이러한 가야산 일대의 문화재에 관한 조사, 생태계 보전의 대안도 없이 관광산업이라는 명목으로 산허리를 자르는 관통 도로와 고압송전탑, 골프장 건설 계획 등이 난립하던 때. 수덕사를 비롯한 가야산 일대의 불교계와 시민단체는 ‘가야산 지키기 시민연대’를 조직하고, 본·말사와 전국 각지에서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여 산길에 올랐다. 가야산의 훼손을 멈추고, 생태와 문화의 가치를 지키는 새로운 대안을 만드는 것. 모두의 간절한 바람을 동력으로 함께 기도하고, 걷기 시작한 것이 반결제 산행의 시작이다.
오래전 석가모니 부처님과 제자들이 뭇 생명을 돌아보며 자신들의 걸음을 멈추었듯, 같은 이유로 다시 일어나 걷는 여름. 그렇게 과거와 현재, 내일은 하나의 길로 이어져 간다.
길에서 길로
지난 2007년 가야산 연대가 첫 산행을 시작하던 날, 사람들은 가야사지에서 보원사지까지 이어지는 옛 순례길을 ‘백제의 미소길’이라 부를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3년 뒤, 마침내 국토해상부는 길이 10.059km에 이르는 관통 도로 구간이었던 그곳을 생태탐방로 ‘백제의 미소길’로 공식 변경·승인했다. 기존 도로보다 겨우 십여 분을 단축하기 위해 산허리를 자르고, 삼존불과 겨우 100m 떨어져 있는 곳에 터널을 뚫으려 한 계획을 막아낸 것이다. 이제 가야산에는 내포불교순례길을 비롯한 다양한 생태문화길이 조성되어 사람들과 함께한다.
유난히 청명했던 산행의 날. 대중들은 수덕사 큰스님들의 덕담과 법문을 들을 뒤, 남은 하안거의 무탈한 해제를 기원하며 승보공양 의식을 올렸다. 마침내 수덕사 방장스님을 필두로 가야사지를 출발하는 시간. 잣나무 길과 퉁퉁고개, 휴양림 구간을 거쳐 보원사까지 총 7km 구간의 백제의 미소 길을 걸으며 모든 생명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제는 모두의 축제이자, 수행의 자리가 된 이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통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산행을 마친 뒤 먹는 시원한 메밀국수 공양이다. 매년 반결제 산행에 동참하는 이들은 이 국수의 맛을 잊지 못해 산행을 더욱 기다리기도 한다고.
수덕사 신도회는 이날을 위해 한 달 전부터 준비를 시작한다. 봉사자를 꾸리고, 김치를 담거나, 재료 손질과 국수를 마련하는 시간까지 반결제 산행의 일부인 셈이다. 700여 명 분량의 국수를 준비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매년 함께 한 터라 이제는 눈만 마주쳐도 손발이 척척 맞는다. 7월의 한낮에 더운 불 앞에서 연신 국수를 삶아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봉사자들. 시원한 국물에 열무김치, 오이채, 무절임, 김가루까지 더한 풍성한 국수에 넉넉한 웃음이 더해졌으니 그 맛이 좋지 않을 리 없다.
7월 햇살 아래 2시간여의 산행을 마치고 온 스님들과 재가자들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저 푸르른 초원 위에 남은 보원사지의 신비로운 풍경. 그리고 오래전 가야산 지키기 시민연대의 시작을 이끈 정범 스님(수덕사 종회의원)의 환한 웃음이다. 이제 다시 산문을 넘어 선방으로 향할 스님들도, 그 뒤를 따라 함께 걷던 사람들도 그 초록의 풍경 속에서 땀을 식히고 다시 길을 떠날 힘을 얻을 것이다.
이날 법회를 이끌고,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배웅하던 정경 스님(간월암 주지)의 인사에도 그 마음은 담겨있다.
“이날을 통해 가야산을 지키는 마음도, 또 다가올 백중과 안거에 들어선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의미도 다시 새기게 됩니다. 다들 맛있게 드시고 남은 하안거도 건강하게, 힘을 내어 정진하시길 기원합니다. 국수는 단순하지만 언제나 스님들을 웃게 하는 별식이니까요.”
산은 생명, 우리는 그 품에서 무한한 생의 기운을 빌어 살아간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요히 머무는 것, 그리고 걸어야 할 때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는 시간. 반결제 산행은 그렇게 다시 생명으로 돌아가는 뜨거운 회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