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 경주 남산에 오르다] 14. 약수곡 석조여래좌상

불두 없는 부처님, 왜 복원되지 못할까  청와대 불상 같은 방형대좌 가진 경주 남산 약수곡 석조여래좌상 불두 발견됐지만 복원은 ‘하세월’ 보존에 갇히지 말고 복원 나서야

2024-07-05     무진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경기 광주 빛고운절 회주
경주 남산의 약수곡 석조여래좌상

올해 6월, 7개의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유명한 중앙승가대 교수 자현 스님의 붓다순례에 참여하여 ‘피서산장’으로 유명한 중국 ‘열하’에 다녀왔다. 자현 스님은 개인적으로 박사학위 지도교수이기도 하고, 박사학위 1호 제자가 되는 영광을 얻기도 한 인연이 있다. 조선시대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의 장소이기도 한 열하는 중국 청나라 황제의 여름 쉼터여서 ‘피서산장’이라고 한다. 

박지원은 아웃사이더여서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는 성향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열하일기〉는 조선 사회의 틀을 깨고 싶어 한 글이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발전을 보면서 경쟁을 통한 발전이 사라진 조선 사회의 낙후를 지적했고, 경쟁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조선 사회에서 〈열하일기〉는 금서가 되었다. 

〈열하일기〉는 조선의 낙후된 모습을 보여준다.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박지원을 포함한 조선의 사신단은 한양에서 출발한다. 청나라 황제는 매년 5월 15일 북경을 출발하여 ‘피서산장’인 ‘열하’에서 생활하다가 9월이 되면 북경으로 돌아온다. 
조선의 사신단은 이러한 정보도 모르고 황제가 없는 북경에 도착했다가, 건륭제가 ‘피서산장’인 ‘열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정신없이 발길을 ‘열하’로 돌려가고 있다.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면서, 청나라의 황제가 매년 여름 휴양을 떠난다는 것조차 몰랐을 정도로 조선은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진 우물 안 개구리였다. 

조선은 이후에도 계속 외부에 관심이 없기는 여전했다. 1840년 일어난 아편전쟁으로 청나라는 영국군 병력 4천 명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전 세계가 그리고 일본도 중국의 현실을 인식하고 얕잡아 보기 시작했는데, 조선만이 여전히 이런 사실을 모르고 중국이 세계 중심이란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조선은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영국에 진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으며, 이겼다고 생각하려 노력하였다. 

10년 전 유학(儒學)을 공부할 때 주자나 공자의 고향에 두 번 다녀온 적은 있었다. 유학을 공부한 것은 조선불교를 이해하려면 필요하다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출가한 내가 중국에 사찰 순례가 아닌 유학의 시조 탐방을 먼저 다녀온 것이 이상하기도 하다. 

10년 만이다. 북경을 거쳐 ‘피서산장’이 있는 도시 ‘열하’를 바라보면서 턱이 빠졌다. 이렇게나 발전하다니. 겨우 10년 만에. 여타 관광지도 그렇지만 특히나 사찰 또한 깨끗하게 단장이 잘 되어있었다. 

현재 한국 사찰들은 조선 중기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사찰들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사찰은 현재의 모습이 아니다. 전문가만이 폐사지의 초석을 보면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을 가면 ‘조선 중기 이전 우리의 사찰 모습은 이런 모습이었구나’라고 추정이 가능하다. 

중국은 한국이 불교문화를 받아들인 곳이고, 일본은 한국이 불교문화를 전래한 곳이다. 일본과 중국은 시대별로 사찰의 변화상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잃어버린 고려 이전 사찰의 모습이 일본과 중국에는 남아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불교는 1592년 임진년과 1630년 병자년 두 전란의 영향과 억불로 불교학이 사라진 종교가 됐다. 조선 후기가 되면 한국불교 문화의 수준은 1700년 한국불교 역사상 가장 수준이 떨어진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자기만의 리그에 빠진 조선사회의 분위기와 겹쳐서 조선불교 또한 다양성이 상실된 단일화된 모습이 된 것이다. 

불상 부재 중 ‘방형대좌’라는 것이 있다. ‘방형’은 사각을 말하는 것이고, ‘대좌’는 부처님께서 앉아계신 좌대를 말한다. 즉 사각의 대좌가 ‘방형대좌’인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조선 중기 이후에 조성된 불상을 많이 보기 때문에, 둥근 연화대좌에 앉아 계신 불상이 눈에 익숙하다. 연화대좌는 둥근 타원형의 연꽃 문양 대좌이다. 그런데 고려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엔 사각의 대좌에 부처님이 앉아계신 모습이 종종 보인다. 

이번 순례에서 만난 1000년대 거란의 요나라가 중심 사찰인 ‘계대사’, 1700년대 강희제와 건륭제가 100년에 걸쳐 완성한 ‘피서산장’ 주위의 ‘보녕사’ 등 사찰들 대부분이 사각의 좌대인 ‘방형대좌’가 불상 좌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사각의 ‘방형대좌’는 수미산을 의미한다. 수미산은 정상이 사각으로 평평하게 되어있다. 또한 사각의 모서리 끝에는 4개의 봉우리가 있고, 중앙에 1개의 봉우리가 있어서 총 5개가 세워져 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생각하면 된다. 이 수미산의 사각 중앙에 부처님이 계신 것을 형상화한 모습이 사각 방형의 대좌에 앉은 불상인 것이다. 

방형대좌 관련 대표적인 불상은 청와대 불상으로 알려진, 보물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다. 지금도 청와대 뒤편에 모셔져 있다. 1912년 경주의 일본인(도다이라 료조)이 조선 총독(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선물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1939년 조선총독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옮기면서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불상은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의 폐사지 절터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려지지 않았었다. 최근에는 경주 남산 서쪽 건너편에 있던 ‘이거사지’ 터가 원래의 자리라고 하는데, 이 또한 명확하지는 않다. 

청와대 ‘방형대좌’의 불상과 똑같은 쌍둥이 불상이 경주 남산에 복원되지 못한 모습으로 지금도 쓰러져 있기 때문이다. 2020년 불두가 발견된 ‘방형대좌’의 경주 남산 ‘약수곡 석조여래좌상’이 그것이다. 개인적으로 두 불상은 이곳 약사곡 사지에 있었지 않았나 싶다. 두 불상은 불두의 모습도, 불상의 모습도, 방형좌대의 모양도, 모두 똑같기 때문이다.

2020년 발견된 경주 남산 약수곡 석조여래좌상 불두.

2004년 ‘경주남산 정밀학술조사 보고서’를 보면 약수곡 제4사지 석조여래좌상이 있던 곳에는 4곳의 건물지가 확인된다. 그리고 대좌는 상대석·중대석·하대석 모두 방형의 사각 모습을 갖추고 있다. 특히나 하대석은 24개의 연화문의 문양을 하고 있는데, 상대석은 연화문이 아닌 두 개의 고사리 문양이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다. 이 또한 청와대 불상의 ‘방형대좌’ 상대석의 문양과 같아서 둘의 깊은 연관성을 알려주는 듯하다. 불상의 오른손은 수하항마의 수인을 하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결가부좌 한 오른발 위에 올려놓았다. 석굴암 불상처럼 풍만한 가슴과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듯 뽐내고 있으며, 법의는 오른 어깨를 내놓은 우단편견을 하고 있다. 

이번 중국 사찰순례 5일 일정 동안 부러운 것이 있었다. 만리장성과 접한 곳에 ‘고북수진’이라는, 우리로 치면 민속촌 같은 곳을 갔었다. 일반 사람들은 옛 중국의 마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잘 만들어 놓았다. ‘고북수진’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만리장성 밑에까지 갈 수 있었다. 잘 닦여진 잔도를 좀 걸으면 산꼭대기에 있는 만리장성에 오를 수 있었다. 열하의 ‘쌍탑산’과 ‘경추봉’ 등 산 위의 멋진 문화유산에는 리프트를 설치해서 누구나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문화혁명 시기 파괴되었을 문화유산 모두 완벽하게 수리를 하거나 복원을 해놓았다. 이번 순례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이러한 복원과 재현을 못하고 있을까?’ 

경주 남산에는 1300년 전 원형의 불상 모습을 간직한 마애불상이 열암곡에 지금도 누워있다. 약사곡에는 불두가 2020년 발견된 ‘방형대좌’의 청와대 불상과 똑같은 쌍둥이 불상이 지금도 파괴된 모습으로 방치돼 있다. 중국과 일본은 복원과 재현을 통해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보여주려 노력하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나 보존의 틀에 갇혀 훼손된 모습 그대로 놔두기만 하는 것일까? 경주 남산의 불국토 문화유산을 순례할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