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의 Media In Buddha]43. 창작극 〈만신: 페이퍼 샤먼〉
그래, 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불전 사물이 소리로 중생제도 발원 전하듯 四대륙 샤먼들 ‘굿’을 통해 희망을 노래해
아침저녁으로 예불과 더불어 울리는 불전의 사물 소리는 삼라만상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사물들을 울리는 까닭은 말과 글로 소통하는 사람만이 아닌 삼라만상 저마다에게 지극한 정성이 닿도록 하기 위해서다. 땅에 깃든 중생 가죽으로 만든 법고의 소리가, 물을 터로 사는 중생에게는 물고기 모양의 목어가, 하늘을 나는 중생에게는 구름 모양의 운판이, 이미 죽어 지옥불에서 고통 받는 중생에게는 용광로를 거쳐 두드려 만든 쇠로 만든 범종이 아침저녁으로 ‘소리’를 울려 제도의 발원을 전한다. 그렇다. 소리는 힘이 있다.
국립창극단이 6월 26일부터 30일까지 무대에 올린 창작극 〈만신: 페이퍼 샤먼〉은 불전사물의 뜻을 담은 지극한 기원과도 같았다. 어릴 때부터 불교 집안에서 자란 국악 전공자로서 공동 극작, 음악감독까지 맡은 박칼린 연출이 코로나 사태가 한창이던 2021년 평창 월정사에서 열인 오대산 불교문화축전에서 〈리파카 무량〉이라는 창작 뮤지컬을 공연했던 이력을 생각하면 〈만신: 페이퍼 샤먼〉이 무속의 얼개에 불교의 뜻을 담는 형식이 앞으로도 더 이어질 수 있겠다는 기대도 생긴다.
“치유사, 힐러, 무당, 마녀, 마법사, 수호자, 위치 닥터, 드루이드, 투앗드다나안, 만신, 샤먼…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예민한 자들이여”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는 다른 대륙에서 온 영험한 자들이 모여 아시아 동북쪽 한국을 찾은 까닭은 어떤 치성이 닿았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넘어 다른 대륙의 예민한 자들에게까지 닿은 치성은 아주 평범한 것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아이 하나 점지해 주소서”라는 소박한 기원. 등장하면서부터 기후위기며 가자지구의 폭격과, 우크라이나의 전쟁에 대한 소리로 관객의 기대치를 높인 예민한 자들 앞에서 삼신굿을 올리고 아이를 바라는 첫 시작은 아주 소박하다. 삼신굿에 답해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는 팔자가 평범하지 않으니 감추어 키워야한다는 무당의 예언도 글로벌 재난과 위기에 비하면 별 것 아닌 듯하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계곡처럼 많은 것을 품으라는 이름 ‘실’을 받고 담장 안에 꽁꽁 숨겨져 자란다. 집 밖을 나설 수 없는 실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오직 ‘소리’ 뿐이다. 담장 밖을 오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사정들. 그 사람들의 푸념이나 궁금한 것들도 별 것 아니다. 좋아하는 이웃 오빠, 가족의 건강 따위 사소한 일상들. 고만고만한 일들에 대해 덕담처럼 건네지는 실의 목소리가 용하다며 밖으로 이끌려 나가기까지는 다른 대륙의 예민한 자들이 쏟아낸 재난과 위기에 비해 한국적 무속의 스케일은 참 소박하다 싶다.
용하다고 반기던 이웃들이 길한 일 뿐 아니라 흉사도 가리지 않고 전하는 실에게 보내는 적대 앞에서 실의 가야할 길이 험한 들 얼마나 험하랴 싶을 정도로 어린 실이 강신무가 되기 전까지는 고민도 갈등도 소박하다.
자신이 남과 다르게 앞날을 알고, 죽은 존재들을 보고, 사람 아닌 뭇 생명들과 통하는 것을 알게 된 실이 내림굿을 받고 강신무가 되는 과정은 창과 소리, 춤과 놀이를 아우르는 한국 전통예술의 바탕에 무속이 있고, 그 바탕을 제대로 익힌 연희자들의 소리와 사위에 실리니 멋과 흥을 한껏 돋운다.
그래도 갓 신 내림받은 어린 무당이 4대륙 샤먼들을 두루 불러들여놓고 앞으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려고 하는 걸까 싶다. 오랜 세월 길흉 점치고, 아이 점지하고, 돌아가신 조상의 넋을 위로하는 토속 신앙으로서의 무속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것 말고 또 뭐가 있으려나 싶을 때 친어머니와 신어머니가 실을 떠나보낸다. 큰 신이 내린 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너의 길을 찾으라면서.
실의 길에 함께 하는 이들이 바로 처음부터 지켜본 다른 대륙에서 온 예민한 자들이다. 영화 〈서편제〉에서 이미 대중적인 소릿길을 펼쳐보인 안숙선은 소리꾼으로는 드물게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완창한 대명창으로서 지금까지 국립창극단 무대의 작창을 맡아왔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국립창극단 소속으로 스타가 된 젊은 소리꾼 유태평양이 작창을 함께 했다. 이 둘이 어찌 다른 대륙의 샤먼을 그려낼까, 한국적 소리가 문화적 배경이 다른 지역의 무속을 표현할 수는 있을까 싶었는데, 새로운 창극의 시대는 이제부터 시작일 듯하다.
무릇 무당이란 다른 존재를 보고, 듣고, 느끼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아주 특별하고 ‘예민한 자’들이라는 처음의 정체성 선언은 창극단 연희자들의 신들린 무대에서 관객을 휘몰아친다. 백인 노예무역상에게 잡혀가다 깊은 바다 속에 수장된 아프리카의 희생자들,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몰리고, 뺏기고, 죽어간 아메리카 원주민과 버팔로들, 비무장지대 DMZ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수습도 못되고 낡은 군화로 굴러다니는 넋들, 제국주의 백인들 발길이 닿은 후로 무성하던 아마존 열대우림에서 멸종되는 짐승들과 부족들….
다른 역사 다른 대륙의 샤먼들을 통해 그 처절한 한이 무대에 넘치고 넘쳐 관객에게로 흘러들 때, 그저 자기가 왜 남들과 달라서 숨어 살아야하냐고 투정부리던 실이 그 한에 아파하고 절절한 씻김굿을 펼칠 때, 우리는 모두 하나요, 이 세상 어느 고통 어느 희생도 내 것이 아닌 것이 없으며, 지구적 차원의 전쟁과 재앙이 켜켜이 쌓여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되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는다.
한국의 소리는 ‘한’을 담고 있다고 한다. 한국의 무속은 무당의 목소리와 몸짓을 빌어 ‘한을 풀어주는 굿’으로 펼쳐진다. 어떤 간절함을 이루기 위해 바리데기가 길을 떠나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었듯 실이 전세계의 과거와 현재의 한 서린 기운을 따라가는 씻김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실 혼자만이 아니라 아직도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까지.
국립창극단의 예술감독으로 이번 무대를 이끈 유은선 감독은 한국 전통 무속에서 종이로 꽃을 만들던 전통, 어릴 때부터 종이접기를 하던 놀이 문화와 임상현장에서 실제 치료에 활용되는 종이접기 사례 등을 생각하며 무대 위의 모든 것을 종이로 만들 수는 없지만 세트와 소품, 의상의 일부를 종이로 만들면서 ‘페이퍼 샤먼’을 기획했다고 설명한다.
박칼린 감독은 그동안 미신이라고 억압하고 천대하던 샤먼에 ‘땅과 물, 바다와 바람에 깃든 슬픔을 예민하게 느끼고 풀어주는 역할’을 부여했다. 이들은 한국 전통 삼신굿, 용왕굿, 내림굿, 씻김굿을 통해 희망을 말한다.
박칼린 감독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지하 대피소에서 한 소녀가 노래 부르는 모습이 전해져 세상을 울리는 모습에서 “이 나라와 사람들은 여전히 꿋꿋하구나, 아직 희망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노래의 힘을 믿는다고 했다.
그렇구나. 노래는, 소리는 힘이 있구나. 그래서 절에서 예불을 소리 내서 하는구나. 사람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삼라만상에게도 소리는 희망을 전하는 힘이 있겠구나. 법고식이 내 마음을 울리는 까닭이 사물을 울리는 스님들의 정성된 움직임과 정교한 소리 때문만이 아니라 그 희망과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구나. 새로운 깨달음을 준 창극 〈만신: 페이퍼 샤먼〉, 뮤지컬 〈리파카 무량〉과 같은 시도들이 앞으로도 계속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