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마나의 시절인연] 흰 고래와 ‘佛性’

2024-06-17     송마나 작가
그림·최주현

바다가 그리워지는 계절이 다가왔다. 아직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제주도의 바다를 찾았다. 야외 카페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는 아름답고 평온했다. 갑자기 종소리가 댕댕 울리고,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바닷가로 달려 나갔다. 고래가 흐릿하게 바다 위로 불쑥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바다로 뛰었다. 

한 무리 고래 떼가 바다 수면을 가르며 앞선 고래들을 따라 헤엄쳐 갔다. 그들 중 몇 마리가 물 위로 머리를 내미는데, 사람들은 그 모습에 환호하며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느라 분주했다. 나로부터 몇 미터 안 되는 거리에서 아기 고래 두 마리가 번쩍 머리를 들더니 이내 물속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고래들의 모습은 경쾌하고 발랄했다. 

허먼 멜빌(1819~1891)의 <모비딕>을 읽으면, 포경선 선장은 자신의 한쪽 다리를 물었던 고래를 리바이던(사악한 짐승)으로 여겨 온 바다를 헤매며 고래의 등에 작살과 창을 던진다. 태평양 최북단에서 잡힌 고래의 몸에서는 그린란드 바다에서 박힌 작살이 발견되곤 했다. 고래가 잡혔을 때 그 몸에는 작살 19개가 꽂혀 있기도 했다. 어떻든 예전에는 뿔뿔이 흩어져 다니는 고래가 이제는 무리를 지어 다닌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으로 고래가 멸종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나는 물속을 빠르게 헤엄치며 순간 솟구치는 고래의 머리만 언뜻 볼 뿐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하기야 향유고래를 정면에서 응시한다 해도 얼굴은 볼 수 없다고 한다. 눈도, 귀도, 코도, 입도 없는, 얼굴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이마가 넓은 하늘처럼 펼쳐있는데, 그 이마에서는 본래부터 갖추어진 신적 위엄이 느껴진다고 한다. 

모세가 유대교의 신에게 얼굴을 보여 달라 하자 신은 내 얼굴을 보고 살아남을 자가 없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했는데, 고래에게는 아예 얼굴이 없다는 것이다. 신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주에는 신이 없다는 뜻일까. 

멜빌은 모비딕의 특징이 흰색에 있다고 한다. 내 눈에도 내리쬐는 햇빛으로 반짝거리는 윤슬 속을 헤엄치는 고래들이 흰색으로 보였다. 

우리는 옛 조상들이 즐겨 입었던 흰옷에서 애잔한 순결함을 떠올린다. 세속의 오탁에서 벗어난 신성함과 권능도 떠올린다. 신화에서 신들은 흰옷을 걸치고, 성경에서 구원받은 무리들은 흰옷을 입는다. 하지만 흰색이 갖는 숭고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두려운 공포도 불러일으킨다.

시신에 감도는 차가운 대리석과 같은 섬뜩함이 떠오르고, 신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으면 무서운 벌을 받을 거라는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한다. 배내옷과 수의가 흰색인 것을 통하여 그 색이 탄생에서 죽음까지 이어져 있는 색이란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처럼 흰색은 무궁한 의미를 담고 있다. 

흰빛은 우리의 망막에서 원추세포가 감지하는 빨강, 파랑, 초록의 가시광선들이 합쳐지면 볼 수 있다. 하지만 흰색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그 흰빛을 통하여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흰색을 배제시켜야만 모든 사물이 드러난다. 흰색은 무(無)색이지만 색채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텅 빔(無)에서 만물(有)이 나오고, 만물은 무(無)로 돌아간다. 흰빛은 의미로 가득 차 있는 말 못 할 공허.

나는 윤슬로 반짝거리는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흰 고래를 바라보며 삼라만상에 가득 차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불성(佛性)’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