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 경주 남산을 오르다] 12. 두 번의 기적 열암곡 석불좌상과 마애불상 (上)
40m 아래서 불두 찾아 기적적 복원 이루다 2005년 남산연구소가 불두 발견 석불 목 부분과 깨진 틈이 일치해 복원해보니 근엄한 위용 돋보여
열암곡 석불좌상은 개인적으로 화려한 광배와 웅장한 모습을 간직한 삼릉계, 미륵곡 불상과 함께 경주 남산을 대표하는 3대 석조여래좌상으로 뽑는다. 그런데 왜 열암곡 불상만 석불좌상일까? 명칭이 다양해서 헷갈린다.
열암곡은 예전에는 거의 찾는 사람도 없고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남산 동남쪽 끝에 치우쳐 있으며, 그쪽으로는 포장된 도로가 없어 서남산 도로를 따라 ‘새갓골 주차장’으로 가야 한다. ‘새갓골’을 ‘새갓곡’이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네비게에션에는 꼭 ‘새갓골 주차장’이라고 해야 찾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열암곡 주차장’도 영원히 찾을 수 없으니 주의해야 한다. 주차장에서 열암곡 석불좌상까지 지도상 직선거리는 709m가 나오는데 걸어서 오르면 여유롭게 1시간 정도 걸리는 오르막길이다. 첫걸음이면 쉬엄쉬엄 갈 생각으로 느긋하게 오른다면 무리 없는 참배 길이 될 것이다.
열암곡은 남산 남쪽 고위봉에서 흘러나온 가장 큰 계곡인 백운계의 한 지류이다. 현재 새갓골과 열암곡을 혼용해서 부르고 있다. 혼용하여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하다 보니 힌트가 하나 보였다. 2003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행한 ‘경주 남산 정밀학술조사 보고서’에 보면 백운계에 ‘새갓곡’이 있다고 나와 있다. 열암곡이란 명칭은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다만 갓 사이의 골짜기라는 뜻의 새갓곡이 과거에는 ‘열암곡(列巖谷)’이라고 불렸다는 설명이 있을 뿐이다.
2003년은 파괴된 열암곡 석불좌상이 복원되기 전이었고 열암곡 마애불상은 존재를 알지 못하던 시기였다. 또한 보고서에는 새갓골 제1, 2, 3 사지로 표현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도 한자인 곡과 한글인 골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열암곡은 전문 연구자나 관심이 있는 몇몇 사람이 아니면 접근도 힘든 곳이었다. 지금처럼 주차장과 진입로가 만들어지기 전이다. 2005년 이곳에 열암곡 석불좌상의 불두가 발견되어 복원사업이 시작되고 이어 열암곡 마애불상이 발견되고, 언론사 지면에 누군가에 의해 열암곡으로 일반화되면서 열암곡의 명칭이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새갓골을 사용하며 한글의 이름을 지키려는 누군가 있었기에 주차장 이름은 새갓골 주차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남산의 지명과 불교 유적의 이름에는 새갓골과 열암곡의 혼용처럼 혼돈을 주는 경우가 많다. 빠른 시기에 하나의 공식 이름으로 확정되었으면 좋겠다.
명칭에 관한 아쉬움 하나만 더 말해야겠다. 일반적으로 선을 공부하면 선종의 스님이며 경전을 공부하면 교종의 스님이다. 선종의 스님을 선사라 하며 입적(사망)을 하면 부도를 만들어 세운다. 예전 화엄사 성보박물관에서 부관장의 소임을 살던 시절에 부도탑을 승탑이라고 공식화했다는 문서를 보았다. ‘왜?’라는 심정이었다.
불교학을 조금만 안다면 깨달은 선사는 부처님과 동급의 위치를 점하기 때문에 부처를 뜻하는 부도의 명칭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의 박사 연구 논문 중 중심 자료가 남북국 통일신라시대 선사의 비문이었다. 선사의 부도를 세울 때는 일대기를 적어놓은 비문도 함께 세운다. 산청 단속사에 있는 신행(神行, 704~779)의 비문에는 ‘입적 후 다비를 하고 이후 부도를 세워 사리를 보존했다’라는 글이 나온다. 곡성 태안사에 있는 적인 혜철(寂忍惠哲, 785~861)의 비문에도 ‘돌을 세워 부도를 만들었다’라는 글이 있다. 그 외 통일신라시대 선사의 비문에는 부도란 명칭이 없다면 ‘돌탑을 세웠다’라는 부도에 관한 설명의 내용이 확인된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교종 스님들은 부도 탑과 비문을 세우지 않았다. 부도 탑과 비문을 세우는 것은 선종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부도 탑은 교종과 선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승탑이라니? 승탑은 교종과 선종을 통합한 모든 스님들의 탑이란 뜻이다. 교종의 스님이 입적하고 언제 부도를 세웠던가? 이것은 잘못된 명칭이다. 다만 조선 후기가 되면 교종은 사라지고 선종 단일교단만 남는다. 이 시기 스님들은 모두 선사였기에 부도를 세울 수 있었다. 교종의 스님까지 포함한 명칭인 승탑은 오류인 것이다.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화유산 명칭의 통일이 빨리 이뤄졌으면 한다.
이러한 새갓골(열암곡) 계곡에는 2005년 10월 23일 경주남산연구소의 임희숙 회원이 불두를 기적적으로 발견하면서 복원된 열암곡 석불좌상이 있다. 열암곡 석불좌상은 파괴돼 불두는 사라지고 쓰러져 있었는데 약 40m 아래 계곡에서 불두를 발견한 것이다. 발견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부러움과 감사함 때문이다.
기존 경주남산의 소개 글이나 책자는 남산을 등산하는 코스의 소개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불교 유물이 있다고 소개하는 것이 대다수다. 그 외 남산의 불교 유적에 관한 책자들은 불교 문화재의 관점에서 찍은 예술적 사진 작품 위주의 책자다. 그런데 ‘경주남산연구소’에서 만든 책자는 내용도 충실하고 사진 또한 멋스럽고 훌륭했다. 이러한 책자를 만든 연구소장의 부인이 열암곡 석불좌상의 불두를 찾은 임희숙 회원이다. 나는 남산의 불국토를 참배할 때마다 잃어버린 불두를 찾는 꿈을 꾸는데, 그는 이런 꿈을 이뤘으니 부럽고도 부럽다.
발견한 불두와 불상의 결실 부분을 맞춰보니 불상의 것으로 확인되면서 복원이 시작됐다. 불두와 불상이 접해지는 두 결실 부분에 화강암을 가로지르는 짙은 색의 선이 있었는데 그 선이 일치했으며, 파괴된 석불좌상의 목 부분을 석고로 떠서 맞춰본 결과 사라진 불두가 확실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경주시에서 열암곡 석불좌상의 보수와 정비 계획을 수립하고 석불좌상의 복원뿐 아니라 열암곡 석불좌상이 있던 사찰 터의 정비 계획을 함께 세워 정비가 이뤄진다.
2007년까지 열암곡 석불좌상이 있던 사찰 터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12월부터 사찰 터에 간이 작업장을 만들어서 파괴되어 흩어져 있던 석불좌상의 보수와 보존과 복원을 위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석불좌상의 새로이 만들게 된 대좌의 중대석인 중간받침돌은 무게가 2t이었는데 헬기로 옮겨오기도 했다. 광배 또한 보수와 보존작업을 통해 불상의 연화대좌에 접합하여 복원하였다. 2008년 12월 열암곡 석불좌상과 사찰 터의 정비작업이 마무리되었으며 2009년 1월 29일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석불좌상은 나발이 큼직큼직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육계는 높게 솟아 있다. 불상의 얼굴은 코 밑으로는 훼손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지만, 눈 부분만으로도 근엄한 얼굴이 그려진다. 팔과 다리의 원통 형태의 곡선은 부드럽다. 균형 잡힌 어깨와 당당한 체격은 안정감 있는 균형미를 보여주며, 몸체의 윤곽은 뚜렷하고 가슴은 얼굴보다 앞으로 나와 있다. 가사는 양쪽 어깨에서 상반신을 다 덮으며 내려오는 ‘통견의’이다. 옷 주름도 부드럽게 표현되어 신체의 윤곽이 잘 보이게 조각되어 있다.
결가부좌한 두 다리의 윤곽 또한 뚜렷하며, 오른발을 올려 발바닥이 보이는 길상좌를 하고 있다. 왼손은 앉은 다리 중앙에 올려 손바닥을 보이는 선정인을 취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오른손은 불상의 균형감에 비해 크게 표현되었는데 항마촉지인을 강조한 것으로 손톱까지 세심하게 조각했다. 불상의 측면도 정면 못지않게 조형미가 뛰어나며 불두가 큰 것은 남산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조형미가 정형화되는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의 모습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 불상이다.
불상의 대좌인 상대석의 연화대는 위로 향한 연꽃인 앙련의 형상이고, 중간받침돌 밑에는 하대석이 있는데 3단의 8각 받침과 밑을 향한 연꽃인 복련으로 되어 있다. 광배는 10여 조각으로 깨져 나누어져 있었는데 좌우의 위가 중앙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광배의 화염 문양과 불상을 둘러 감싸고 있는 화불의 구름을 타고 있는 모습, 넝쿨 문양과 보상화 문양은 아름답다 못해 환희심을 느끼게 한다. 두광은 원형으로 문양을 넣었는데, 두광 주위로 보상화 문양을 연꽃의 문양처럼 둘렀다. 멋진 창작이다.
석불좌상에는 금당으로 보이는 전각이 있었는데, 석불좌상을 먼저 조성하고 금당을 조성하였다. 조선 이전에는 부처님을 모신 중심 전각을 금당이라고 하였다.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 돌로 불상을 조성할 때는 전각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상을 만들고 이후에 전각을 만든다. 또한 전각은 크지 않아서 안에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 불상을 참배하는 형식이다.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의 전각을 생각하면 된다. 전각은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이는데 전각이 먼저 무너진 이후 남아있던 석불좌상이 파괴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