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인 붓다] 41. 영화 〈송암동〉
1980년 그날, 11살 아이는 왜 죽었나 광주 송암동 학살 사건 조명한 영화 민간인 학살 과정, 입체적으로 재구성
5월, ‘계절의 여왕’ 딱 그 말처럼 덥지도 춥지도 않고 햇살 좋은 시절, 그래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과 같은 모든 좋은 관계성의 날들이 다 들어있는 달. 딱 그런 5월의 어느 날이었다.
광주시 외곽 한적한 마을 송암동, 사내아이들이 마을 어귀에 다리 아래 물가에 모여 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편을 나눠 전쟁놀이를 하기로 했다. 한쪽은 국군, 다른 한쪽은 적군. 자기는 적군 하기 싫다는 아이에게 전재수 어린이가 아주 당차게 말했다. “나는 커서 군인이 되어 우리나라를 지킬 거야. 그러니까 우리 편이 국군할거야!” 그렇게 아이들이 놀이를 하고 있는데 군인들이 지나갔다. 아이들은 군인들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자신이 크면 국군이 되겠다고 다짐한 전재수 어린이도 함께.
그 군인들은 아이들의 손 인사에 응답했다. ‘진짜 총’에 장전된 ‘진짜 총탄’으로 탕탕탕탕탕! 놀란 아이들은 달아나기 시작했고, 달아나는 아이들 등 뒤로도 군인들의 총질은 멈추지 않았다. 자라서 자랑스러운 국군이 되겠다던 전재수, 초등학교 4학년, 고작 11살. 형이 도시에 나가 벌어온 돈으로 사 준 고무신이 벗겨지자 그걸 집어들려고 하다가 자신이 롤 모델로 생각하던 국군들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한 아이. 망월동 묘역을 찾은 사람들이면 차마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참담한 어린 희생자.
어떤 역사든 그 피 흘림을 해결하고 책임을 지면 그 피는 희생이든, 영광이든, 오욕이든 과거의 업으로 잘 보내고 현재와 미래는 업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공덕을 쌓을 수 있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고, 바로 잡는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가 뒤틀리고, 미래를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는 역사가 아직 드리우고 있다면? 그 역사가 몇몇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권력과 정체성 자체의 문제라면? 그 역사를 해결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곡하거나 못된 혐의를 뒤집어씌워 당장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거름으로 써왔다면? 그런 악의의 현장에서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밝히고 역사적 진실을 바로 잡고자 하는 목소리가 나타난다면?
이조훈 감독의 〈송암동〉은 이런 진실과 용기로 역사를 지금까지 내내 발목 잡으며 뒤틀어 놓고 있는 국가적 범죄에 대해 밝히는 영화다.
1980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 폭거에 항의하는 목소리를 높인 지역 광주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기 위해 계엄군이 광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계엄군이 한 마을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심지어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과 총격을 벌였던 사건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송암동·효천역 민간인 학살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극영화 〈송암동〉은오랫동안 묻혀있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낸다. 광주에파견된특전사요원들,그동안 시민들이 저항하기 위해 들었던 총기를회수하고, 항쟁 과정에서 사망한 시신들을 집으로 운구하기 위해인근마을들을 하나씩 돌던시민군,인근에매복하던계엄군,그리고 송암동일대의주민들이겪은1980년5월24일오후2시부터 벌어진 아군끼리의 오인 사격으로 발생한 군인 희생자들과 그런 어처구니없는 착오에 대한 화풀이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은 현장에 있던 당시 현역 계엄군의 증언을 바탕으로 추측이 아닌 진실을 드러낸다.
개발독재 시대였던 1960년대, 서산 간척 사업 당시 강제 노역에 희생된 민간인들과 권력 비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서산개척단〉(2018년), 총탄에 맞아 쓰러진 시민을 찍은 사진 한 장 말고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1980년 5월 21일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의 전남도청 앞에서의 네 시간에 대해 광주를 제대로 알려보자고 마음먹었던 한인회 비디오, 사망한 시민은 한 명도 없다는 군의 목소리, 광주 비디오를 보고 인생이 바뀐 사람이 너무 많다는 시민의 목소리 등을 모아 광주 항쟁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다큐멘터리 〈광주 비디오: 사라진 4시간〉(2020년) 등 드러나지 않은 역사의 진실을 추적해온 이조훈 감독의 네 번째 장편영화다.
국가기구인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검증된 사실은 1980년 5월 24일, 광주 봉쇄를 위해 도심 외곽으로 향하던 11공수여단 소속 공수부대원들이 광주 재진입 작전을 위해 광주 비행장으로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남구 송암동을 지나던 상황에서 벌어졌다. 송암동에서 목포 방향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구축 중이던 보병학교 교도대 전투교육사령부대 소속 대원들이 공수부대원들을 시민군으로 착각, 오인사격이 이뤄졌다. 갑작스러운 교전으로 일부 공수부대원들이 사망했을 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 있던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됐다.
아군끼리의 오인사격으로 내부 사상자가 발생하자 공수부대원들은 송암동 인근 마을을 수색하며 화풀이로 마을주민들을 연행해 즉결 처분했다. 초등학생부터 6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화풀이로 보복학살을 감행했다. 이 사건으로 민간인 17명, 군인 10여 명이 숨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역 연극인들을 배우로 등장시켜 민간인 학살 과정을 세밀하고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당시 광주에 파견된 군인의 현장 상황에 대한 추가 증언을 확보해 극영화로 재현한 이조훈 감독은 “단순히 42년 전에 실재했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학살사건의 실체를 규명함으로써 ‘반인도적 범죄’로 책임자를 기소하는 과정까지 따라가고자 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1980년 당시 이조훈 감독은 광주효덕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학교가 휴교해서 집에 있었는데, 헬기가 지나가고 총소리가 들렸다”는 기억과 “산 하나 너머 동네에서 아이 2명이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른들이 나도 거기서 놀았다면 죽었을 것이라고 얘기하셨다”는 감독에게 오랫동안 5.18은 ‘어떤 연유로 벌어졌는지 모르지만 그저 공포의 대상’이었다.
〈광주 비디오: 사라진 4시간〉을 제작한 이후,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 합류하게 된 감독은 당시 현장에 있던 한 계엄군의 제보를 받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영화 〈송암동〉을 만들었다. 지난 1월에 있었던 국회 시사회에서는 전직 군인이 전화연결로 직접 관객에게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 감독은 “5·18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는 분들 중 80명은 봉분도 없는 행방불명자”라면서 “최소한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찾아내는 게 진실 찾기이고, 책임자들을 처벌받게 하는 것이 정의”이기 때문에 “그들을 잠들 수 있게 하는 것은 진실과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취재한 내용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스님들은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유가족들과 함께 지난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법련사에서 ‘광주 5·18 민주화운동 44주년 희생자 추모재’를 올렸다. 사노위스님들은“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고귀한 넋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자리를 만들고, 민주와 정의, 인권 등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정신이 올바르게 발현되는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봉행했다”고 밝혔다. 이날 추모재와 영화 〈송암동〉은 같은 발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같은 발원의 실현을 비는 마음으로 영화의 개봉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