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 경주 남산을 오르다] 11. 미륵곡 석조여래좌상과 보리사 마애석불

완벽 보존 신라 불상… 남산과 낮은 연결성 ‘아쉬움’  신라 석조여래상 중 원상태 유지 포장된 도로들 여유로움 빼앗아 낭산 바라보는 보리사 마애석불 접근성 떨어지는 것은 보완해야

2024-05-22     무진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경기 광주 빛고운절 회주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은 광배의 화려함이 불상의 웅장함을 받쳐준다. 남산에는 이러한 광배의 화려함이 웅장함을 돋보이게 하는 불상이 더 있다. 신라 석조여래좌상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이다.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은 동남산 초입에서 언덕길을 200m 오르면 나오는 보리사 대웅전 좌측의 축대 위에 화려하면서 당당하게 앉아 있다. 직접 본다면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을 나타내는 말에 화려함과 웅장함이란 표현 말고 더한 표현이 있나 싶을 것이다.

광배에는 불꽃이 밖으로 타오르며 둥근 연꽃이 두른 두광과 신광이 새겨져 있다. 불꽃 밑에는 7구의 부처님이 연꽃으로 장엄하고 있고, 광배 뒷면에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약사여래가 새겨져 있다. 거기에 듬직하고 당당한 부처님이 항마의 손을 하고 연화 좌대에 앉아 있다. 참으로 멋진 불상이다. 그런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을 참배할 때마다 드는 아쉬움이 있다.

경주 남산이라는 불국토는 명승지 같은 자연환경에 안겨 있다. 그렇기에 남산의 불상을 참배하는 길은 자연과 함께하는 고즈넉함이 품어준다. 그런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을 참배하는 길은 이질감을 준다. 차가 없이 걷기에는 포장된 길이 여유로움을 빼앗는다. 버스는 보리사 주차장까지 갈 수 없고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접근하기에 좋다. 모르면 어쩔 수 없이 걸어서 오르겠지만, 알고 간다면 차를 타게 된다. 포장된 길을 걸어서 오르기엔 남산 불국토 순례의 멋이 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섬에 갇힌 것 마냥 이곳과 연결된 남산의 불국토를 참배하기 위한 길이 없다. 이것이 첫 번째 아쉬움이다. 

또 다른 아쉬움은 보리사 석조여래좌상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미륵곡이라 했을까 싶은 것이다. 미륵곡이 어딘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륵곡을 꼭 써야 한다면 미륵곡 보리사 석조여래좌상이라고 정하면 될 것을. 소유자는 국가이고 관리자는 경주시여서 명칭에 보리사를 뺀 것인가 싶은데 좀 그렇다. 보리사라 하면 찾기도 쉽고 또한 보리사 경내에 있는 불상이라 스님과 신도분들이 잘 지켜주실 건데. 참배의 대상을 문화재로 접근하는 당국의 처신이 아쉽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은 보리사 마애석불에 있다. 보리사 마애석불은 아담한 마애불상이다. 마애불이란 비탈진 바위의 절벽에 불상을 쪼거나 다듬어서 만든 불상이란 의미이다. 즉 석불은 부처님의 형태를 3차원으로 온전하게 만들었다면 마애불은 형태를 2차원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마애불은 보리사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에서 왼쪽으로 좀 힘들다 싶게 가면 흙 언덕길에서 갑자기 거의 2m 정도의 바위가 나타난다. 이 바위에 광배 형태의 감실 홈을 152cm 높이로 파고, 양각으로 도드라지게 110cm의 불상을 새겨 만든 마애불이다. 

보리사 마애석불을 보면 ‘여기에 왜’란 생각이 든다. 그냥 한적한 산중에 뜬금없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리사 마애석불의 시선으로 낭산을 바라보면 의미심장함을 느끼게 된다. 건너 낭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낭산은 신라불교에서 도리천으로 불리던 곳이다. 1215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각훈이 지은 <해동고승전>이나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묻힌 곳은 도리천으로 나온다. 선덕여왕릉 밑에 사천왕사가 있는 것에서도 낭산이 도리천임을 알 수 있다. 도리천은 수미산 꼭대기 제석천이 있는 곳이며 사천왕이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도리천은 부처님께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하시는 곳이다. 마애석불 밑 앉기 편한 곳에 앉아서 고요히 있으면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법을 설하시는 부처님의 음성이 바람결이 나뭇잎을 건들듯이 소곤소곤 들리는 것 같다. 이러한 도리천을 지켜보고 계신 부처님이 보리사 마애석불이다. 

아쉬움은 여기서 시작한다. 마애불 밑에 앉아서 바라보는 경치도 좋고 기원하기도 좋은데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보리사의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을 참배하고 보리사 마애석불을 처음 찾아갈 때의 당혹스러운 기억이 남아있다.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옆에서 바로 가도 되는 것 같은데 안내 팻말은 보리사 주차장에 있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옆으로 가는데 등산로라기보다 작은 샛길이 나왔다. 이 길이 맞나 싶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길을 잃었나 긴장도 하던 어느 순간 ‘저 바위구나’ 했었다. 보리사 마애석불은 소유와 관리자가 보리사로 되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데크 길이나 상식선의 산책길로 만들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불교 관련 상황을 비판한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 속에서 비판 없는 성숙은 없었으며, 비판이 사라진 집단은 썩어가거나 망해간 교훈은 여기저기 드러나 있을 뿐이다. 

부처님께선 비판에 익숙하시다. 여기서 비판과 비난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비난은 잘못을 지적질만 하는 행위이지만, 비판은 최선으로 나아가기 위한 반성이고 방향 제시이다. 한국불교는 비판에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왜 한국불교는 비판에 익숙하지 않게 됐을까.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던 조선불교의 현실 외면의 모습이 지금까지 전통처럼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경주 남산 보리사 마애석불

부처님의 불교는 현실 비판에서 시작한다. 비판을 통해 더 나은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렇기에 불교는 중국으로 전래되었을 때 삶의 지배 이념을 제시할 수 있었다. 즉 비판적 사고를 통해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 것이 불교였다. 이러한 불교가 오대십국 중 하나인 후주(951~960)의 폐불로 교종이 무너지고, 송나라(960~1279)시기에는 정형화된 선문답과 선어록이 정리되면서 경직된 선종만이 남게 된다. 이후 중국에서 선불교는 당나라 선사들의 일화만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현실 삶의 극복을 제시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면서 주자(1130~1200)가 나타난다. 주자에게 선불교는 사라져야 할 종교로 비판받는다. 유목 민족에게 중국이 지배당하거나 압박받는 시대 상황에서 현실을 외면한 선불교를 중국인이 숭상했기 때문에 강력했던 중국이 나약해졌다고 본 것이다. 주자의 주자학은 선불교의 현실 외면과 경직된 관념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주자학을 받아들여 나라를 세운 조선의 주자학자에게 불교가 억압해야 할 대상이 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불교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역할을 한 것으로 주창하는 신미대사(?∼?)와 조선 명종 대의 보우대사(1509∼1565)의 일대기를 보면 조선에서 스님의 현실 참여 금지의 과정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신미대사는 세종에게 혜각존자(慧覺尊者)라는 칭호를 받고 문종과 세조의 스승이 될 정도로 각별한 대우를 받는다. 

세종의 손자인 예종 1년 1469년이 되면 스님들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급변한다. 예종은 모든 승려를 <금강경>과 <법화경>을 강론하지 못하면 환속시키려 한다. 이에 신미 대사가 부당함의 글을 올렸으나 예종이 화를 내며 스님이 윗사람인 관리에게 잘잘못을 따지는 것을 금지한다. 또한 보우 대사는 조선 불교의 중흥을 위해 나섰다는 이유로 잡혀가 제주 목사 변협에 의해 깡패들에게 주먹으로 맞아 입적한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조선에서는 현실 참여의 법문을 하는 스님이 있다면 그 누구 하나 주자학자들에게 잡혀가지 않은 스님이 없게 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조선에서 불교는 건국 초기 불교의 종파는 통합되었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선종 단일 종파로 남게 된다. 이렇게 조선 500년을 지나며 조선 불교는 주자학자들의 탄압 속에 현실을 바라볼 눈을 키우는 교학은 사라지고, 현실 참여 또한 사라지며, 개인의 깨달음만 중요하게 여기는 수행체계만 남게 된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정신에 있다. 그런데 조선 500년을 지나면서 상구보리만 남고 하화중생인 현실 참여의 정신은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 불교의 체계가 지금의 한국 불교에 이어져 온 것은 아닌가 싶다. 

경기도 광주에서 일요일마다 짜장면 봉사를 다닌 적이 있다. 그런데 갈 곳이 없었다. 경기 광주에서 하루 동안 다녀올 거리에 있는 장애우 단체나 고아원은 모두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봉사 갈만한 불교 단체는 한 곳도 없었다. 대승의 하화중생인 보살행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와 비교하면 불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소외계층을 위한 단체가 제대로 없는 것이다. 한국 불교는 전반적으로 현실 참여의 적극성이 약해져 있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