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인 붓다] 40. 곤 사토시의 ‘퍼펙트 블루’ ‘천년여우’
욕망과 자본이 빚어낸 ‘우상’들 日아이돌 시스템 명암 다룬 애니메이션 주인공들 통해 ‘나는 누구인가’ 고찰해
한 기자회견 현장이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 됐다. 생중계 현장에는 기자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거칠 것 없는 막말과 폭로, 욕설과 눈물, 폭로 되는 사안의 당사자들끼리 주고받은 메신저 내용까지 까발리며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 다툼은 단박에 그 현장에 있던 기자들의 손을 거친 기사가 되기도 전에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뉴진스’라는 아이돌 그룹 하나를 두고 벌어진 천문학적 금액에 대한 서로의 권리를 주장하는 돌발적인 이 사태에서 논란의 당사자인 뉴진스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일주일 내내 TV는 아이돌을 위한, 아이돌에 의한, 아이돌의 매체였다. 연예계를 아이돌 천하로 만든 것은 뮤지션보다는 종합연예상품을 만들어서 대박 이익을 보려는 매니지먼트사의 기획과 아이돌을 출연시켜 높인 시청률로 최대한 많은 광고를 따내려는 방송사의 셈속, 그런 기획이나 셈속에 장단 맞춰 열광하는 우리 사회다. 아이돌은 대중문화가 산업적으로 성공했을 때 거둘 수 있는 최대치의 이익을 뽑아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고, 이런 거위를 찾기 위해서는 각 엔터테인먼트 회사 자체 오디션도 많고, 아예 공개적으로 방송을 통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들도 즐비하다.
아이돌은 자신들이 이미 준비된 뮤지션도 아니고, 스스로 음반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아이돌은 소속사가 기획하는 대로 춤과 노래, 음반뿐 아니라 얼굴과 몸매, 이미지까지 맞춤으로 다듬어져 시장에 나오게 되고, 이런 준비 과정이 연습생 제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연습생은 빠르면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되는데 이때는 별도의 계약 없이 어느어느 기획사 연습생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학교 정규 수업보다 소속사의 연습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데뷔를 꿈꾼다. 그러다가 소속사의 판단에 따라 상품성이 무르익었다고 생각될 때 데뷔를 하게 되고 그때서야 제대로 계약이 이루어진다.
연습생 기간이 몇 년씩 걸리고, 각 기획사마다 수많은 연습생을 관리하다보니 막상 데뷔 시점에 이르게 되면 누적된 시간이며 금전적인 비용 때문에 갑과 을 사이에 정당한 계약이 이루어지기 어렵게 된다. 미성년 시절부터 관리를 맡아온 기획사는 본격적인 계약을 할 때 가능한 한 긴 계약조건에서 최대의 이익을 뽑아내려 할 것이고, 수많은 연습생 가운데 모처럼 데뷔할 기회를 갖게 된 신인 연예인은 성공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계약 자체를 하게 된다는 것만 해도 다행스럽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이돌 시장이 커지고, 스타성이 만들어내는 시장 효과가 확대되고,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자라나면서 애초의 계약 자체가 안고 있던 불공정의 문제가 불만이 될 수밖에 없다. 하이브 이전 이런 시스템을 최초로 만들어낸 SM 엔터테인먼트와 이 기획사의 간판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 사이의 다툼이 불거지면서 연예계뿐 아니라 주식시장까지 들썩거리게 만들었던 소위 ‘노예계약’ 문제가 있었다.
동방신기 이후로 위험관리를 위해 대형기획사는 하위 계열사를 통해 분산투자와 분산관리를 하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이 시기, 엠넷(M.net)에서 런칭한 오디션 프로그램‘슈퍼스타K’를 통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찾아내는 과정까지 상품으로 만들어낼 수 있으며, 일단 거위를 찾아낸 다음 자기 회사가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까지 일원화해내는 방식을 체계화하면서 이제 2조 단위 재벌의 반열에 들게 된 하이브의 방시혁 대표나, 그 하이브의 자회사 시스템으로 기획과 관리의 재능에 대한 보상을 최대치로 받아야겠다는 어도브의 민희진 대표도 다 SM 출신이다.
이런 아이돌 양성 시스템이 시장 자체를 키우자 트로트 분야나 댄스 분야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방식을 도입했고, 한동안 ‘성인가요’라는 이름으로 방송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트로트가 모든 채널 황금 시간대에 편성되었고, 아이돌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을 하던 댄서들도 스스로 스타가 되고 있다.
곤 사토시 감독의 〈퍼펙트 블루〉(1997년)와 〈천년여우〉(2002년)는 이 같은 아이돌 시스템을 먼저 시작했던 일본에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곤 사토시는 아이돌 출신 연예인을 두고 벌어지는 미스테리 스릴러 〈퍼펙트 블루〉와 젊은 시절 은막을 주름잡다가 스스로 모습을 감추고 늙어 가는 여배우의 일대기를 짚어 가는 〈천년여우〉에서 대중의 주목을 받는 여성과 그 여성에 집착하는 열성 팬, 그리고 미디어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이 관계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를 아는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이런 정체성의 문제가 영화 속 영화, 이야기 속 이야기, 사람 속의 사람으로 켜켜이 쌓여 있다.
〈퍼펙트 블루〉의 주인공 미마는 아이돌 그룹 멤버에서 배우로 모습을 바꾸려한다.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에이전시의 기획 때문이다. 아이돌의 원뜻은 우상, 곧 금속이나 돌, 나무 따위 자연물로 초자연적인 존재의 형태로 만들어진 섬김의 대상이다. 아이돌의 어원인 그리스어 ‘에이들론’은 인간과 실재하는 대상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 있는 영상을 뜻하며, 그래서 베이컨에 따르면 진리를 인식하는 데 방해되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 우상이다. 미마가 이 우상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옮아가려고 하는 순간 방해와 협박, 살인이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미마’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스릴러의 플롯과 시점을 따라 파국으로 치닫는다.
〈천년여우〉는 다큐멘터리 형식에 실린 판타지 속에서 한 여배우의 끝나지 않는 삶을 펼쳐 보인다. 열쇠 하나와 그림 한 점만을 남기고 사라진 첫사랑을 찾아 배우의 길을 걷게 된 십대 소녀 지요코의 긴긴 여정으로 이끌려 들어가다 보면 한창 전쟁 중이던 일본에서 만주로, 저주 속에 불타 무너지는 천 년 전의 고성에서 숨 가쁘게 내달리는 현재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최고 스타의 화려한 삶에서 잊힌 여배우의 적막한 노년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게 된다. 종횡무진 누비는 카메라는 스타와 팬, 영화와 현실, 꿈과 좌절까지 모두 아울러 하나의 진실을 향해 쏘아 올려진 우주선을 비춘다.
곤 사토시 감독은 〈퍼펙트 블루〉에서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존재를 통해 스타와 팬, 영화와 현실, 미디어와 진실의 관계에 대해 던졌던 질문에 대해 〈천년여우〉에서 자신있게 대답한다. 한 인간의 치열한 삶은 천년의 세월과도 맞먹을 만한 역사라고.
어도브와 하이브, 민희진과 방시혁의 목소리는 논란이 된 인터뷰 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가 되고 있는데 정작 뉴진스 멤버들의 의견이나 생각은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미 대중들도 그들을 인격체가 아닌 상품으로만 보는 것이거나, 자기 판단능력 없이 관리와 통제를 받아야만 하는 미성년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아이돌의 어원은 우상, 진짜 신이나 붓다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고 경배와 찬양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번 하이브-어도브 사태에서 보듯 모든 이들이 뉴진스의 의지와 생각은 없는 것으로 취급하며 그들을 만든 우상제조자들만 진실 공방을 하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품은 5월, 이 아이돌들에게 우상의 자리가 아닌 자기정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깨달음이 전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