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국수 기행] 9. 육통 스님의 수박동치미 국수

달달한 수박에 짭짤아삭한 무 ‘식감 콜라보’

2024-05-14     장보배

가끔은 하루가 꿈처럼 달고, 때로는 너무나 맵짜다. 달콤함은 쉽게 질리고, 맵고 짜기만 하면 입안에 머금는 것조차 고되다. 그러니 우리의 삶도, 맛도 그만큼의 균형이 필요한 법.  삶이 지닌 무한대의 변수 속에서 적절한 조화를 이루어 낸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로 경이롭고, 또 아름답다. 그러니 달고, 짜고, 시고, 맵고, 쓰디쓴 맛의 조화 속에서 인생의 지혜를 찾는 것은 당연한 일. ‘단짠단짠’의 지혜를 담은 오늘의 국수, 육통 스님의 수박동치미 국수에서 삶의 묘미를 맛본다.

홍성 가는 길
“이런 참~ 서울에서도 두 시간이면 갈 길을 이렇게 돌아서 가는겨?”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충남 홍성행 시외버스를 타고 달리는 길. 몇몇 정거장을 에둘러 돌아가는 완행버스의 느릿한 여정에 한 어르신의 궁금함과 투정이 뒤섞인 혼잣말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어르신의 말씀도 딱히 맞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 서울에서 홍성까지는 자동차로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어르신의 뿔 오른 목소리도, 차에 타자마자 익숙한 듯 머리를 기대어 잠이 드는 아주머니도, 쉼 없이 타고 내리는 승객들을 세어 보는 기사님의 바쁜 눈동자도 이내 하나가 되어 버스는 달린다. 

완연한 봄의 계절, 맑고 푸른 하늘이 차창 밖으로 가득 찬다. 산과 들이 교차하며 펼쳐지는 녹음의 세상, 덜컹거리는 버스가 휘어진 옛길을 달릴 때면, 여지없이 함께 흔들리며 춤추는 사람들의 몸사위까지. 모두 같은 버스에 몸을 실은 이상 이 투박한 로드무비의 일부가 되어 봄날의 여정을 즐길 수밖에. 그렇게 돌고 돌아 내달리던 버스가 어느새 마지막 종착지에 다다르면, 비로소 이 우연한 동반도 끝이 난다.

“아이고, 기사님. 수고하셨소. 덕분에 잘 왔소.” “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예상치 못한 긴 여정이었지만, 그 시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던 듯 어르신의 인사에 웃음이 머문다. 처음 만난 홍성의 얼굴도 그렇게 따뜻하다. 

담장 낮은 절, 세심사
홍성터미널을 나서서 자분자분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도착하는 세심사. 

단아한 벚나무 한그루, 누구라도 앉아 쉴 수 있는 작은 정자가 앞을 지키고, 키 낮은 담장이 동그랗게 감싸 안은 다정한 도량. 이곳에서 세심사의 주지이자, 홍성군종합노인복지관의 수장으로 든든히 자리를 지키는 육통 스님을 만났다. 유난히 더웠던 그날, 땀이 송골송골 맺혀 절집을 찾아온 이방인을 위해 스님이 내민 것은 이른 아침부터 준비해 두신 유부초밥과 머위 쌈밥. 

“오시느라 수고 많았어요. 혹시 시장할까 봐 만들어 두었어요. 어서 먹어봐요.” 

다디단 쌈밥 한입에 취한 것도 잠시, 마음이 급한 객은 스님께 오늘의 목적인 국수를 먼저 재촉한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이렇게 더워질 때 먹으면 참 좋은 국수예요. 지금 한번 준비해 볼까요?”

시원시원한 웃음과 함께 스님이 꺼내신 재료는 바로 잘 익은 수박과 금방 김칫독에서 꺼낸 동치미 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수박동치미 국수’의 메인 재료들이다. 얼핏 봐선 쉬이 그려지지 않는 국수의 맛, 과연 이 두 재료가 만들어내는 국수는 어떤 맛일까? 

더울 때 더 귀한 별미
“보덕사 선방에서 공부도 하고, 스님들 시봉도 들며 7년 가까이 머물렀어요. 그때 대중공양 준비를 하며 만들었던 국수입니다. 처음에는 생무를 갈아서 넣었는데, 맛은 좋지만 먹고 난 후에 속이 쓰렸어요. 생각해 보니 절집에는 소금에 절인 동치미 무가 항상 있거든요. 그래서 무를 채 썰어 넣었더니 더 좋아하시더라고요(웃음).”

시원하고 달달한 수박에 짭짤하고 아작아작한 무의 식감이라니! 말 그대로 ‘단짠단짠’의 매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별미다.  소면 대신 냉면을 쓰거나, 수박 대신 오미자즙 또는 배를 넣어도 좋다고. 또 동치미 무가 없으면 열무김치를 넣는 등 있는 재료로 얼마든지 변주를 줄 수 있는 것이 이 달콤짭짤한 국수의 매력이다. 

세심사 차방에 앉아 훌훌 국수를 들이켜자니, 때 이른 더위에 올랐던 열기가 어느새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수박은 갈증을 없애고 열을 내리는 성질이, 또 무는 소화를 돕고 해독작용이 탁월해 우리 민족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식재료. 게다가 맛까지 더했으니 더운 날에 이만한 별미가 없을 것이다.

“선방에서 지낼 때 별좌 소임을 맡았던 적이 있어요. 신심이 나서 요리책을 이만큼씩 가져다 놓고, 혼자 응용해 가며 사찰 식으로 바꿔서 많이 해드렸어요. 스님들께서 맛있다고 하시면 그게 최고의 보람이었죠(웃음).” 

그러고 보니 이 생경한 재료의 조합을 생각한 아이디어도, 식감이 살아있는 머위 쌈밥과 곁들임 쌈장의 맛까지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은 솜씨. 알고 보니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스님의 손맛에 사찰음식 교육기관에서 초청 강연을 할 정도라고.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모아놓은 스님만의 레시피와 직접 기록한 사찰음식 사진들도 언젠가 세상에 나올 때를 기다리며 잠시 잠들어 있는 중이다. 

다시 앞으로 
“이 국수는 일요법회 때 신도들에게 해드리면 참 좋아하세요. 특히 이 동치미 무 같은 경우는 입맛을 살려주고, 속을 가라앉혀 암 투병을 하셨던 속가의 어머니께서도 즐겨 드셨지요.” 

딸의 출가를 반대하셨던 어머니. 하지만 막상 출가하자 가장 먼저 수행자를 향한 예우를 갖추고, 주변의 편견 어린 시선마저 당당히 막아주신 어른이었다. 지난해 돌아가시기 전까지 항암 치료로 부대끼던 어머니의 속을 유독 이 짠 무가 가라앉혀 주었다니, 이만큼 귀한 약이 또 있을까. 

현재 스님이 관장으로 역임하고 있는 홍성군종합노인복지관에서는 디지털 웰다잉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자신의 유언, 또는 자녀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디지털화하는 이 프로그램을 정작 어르신들이 꺼렸다고. 

“막상 죽음을 직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외면하고 싶고, 무섭기도 하지요. 하지만 어르신들께 자신이 아니라 자녀들을 위해 도전해 보시라고 권했어요. 나중에 엄마 보고 싶을 때 이렇게 영상이 남아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했더니 나중에는 하길 잘했다고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 

어쩌면 스님의 바람일지 모를 그 진심을 통해, 어떤 이들은 생과 사를 넘어 그리운 이들과 함께할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올해 초 몸과 마음의 소진으로 힘들었던 시기 ‘대만 세계비구니대회’에 참석하며 다시 충전할 수 있었다는 육통 스님. 

“여법하게 살아가는 우리 스님들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머무를 때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수행의 여정임을 다시 깨달았어요. 다시 기도할 힘을 얻었으니 핑계 대지 않고 또 열심히 기도하며 살아갈 겁니다.”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짜디짠 모든 날을 잘 삼키고 음미할 것. 그러면 잔뜩 올랐던 열도, 이유 없이 차오르는 갈증도 어느새 가라앉을 것이라는 걸. 또 술술 넘어가는 국수처럼 편안한 어떤 날도 반드시 오고야 말 거라는 것을, 오늘도 이 한 그릇 ‘승소’에서 배운다.

▶한줄 요약 
수박은 갈증을 없애고 열을 내리는 성질이, 또 무는 소화를 돕고 해독작용이 탁월해 우리 민족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식재료. 게다가 맛까지 더했으니 더운 날에 이만한 별미가 없을 것이다.

육통 스님의 수박동치미 국수


재료  
국수 2~3인분, 수박 반 통, 동치미 무 작은 것 1개, 물, 깨소금, 청양고추(선택)

만드는 법
1. 잘 익은 동치미 무를 길게 채 썰고, 물에 담가 짠맛을 뺀다. 
2. 국수를 삶아 잘 비벼 씻어준 뒤, 채반에 받쳐 물기를 빼준다.
3. 수박 한두 조각은 먹기 좋게 깍둑썰기하고, 나머지는 믹서기에 곱게 갈아준다. 
4. 3에 2의 채 썬 무를 넣어주고, 짠맛이 배어든 물을 조금 넣어 간을 맞춰준다. 
5. 그릇에 담아둔 국수에 4의 수박동치미물을 적당히 부어준다.
6. 썰어놓은 수박 조각과 깨소금을 넉넉히 뿌리고, 입맛에 따라 잘게 썬 청양고추를 넣어주면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