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탐사대] 나한 위신력 전해지는 관음보살 성지

10 강화 보문사 관음도량에 가득한 나한 이야기 곤경에 처한 스님들을 도와주고 도둑에는 위신력으로 반성케 해 눈썹바위 아래 관음보살 친견을

2024-05-14     목경찬/불교학자
보문사 석굴법당에 모셔진 불보살과 나한.

낚시그물에 걸린 불보살님들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석모도에는 낙가산 보문사가 있다. 이전에는 배를 타고 갔지만 2017년 석모대교가 놓인 이후로 육로를 통해 간다. 낙가산 보문사라는 산과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양양 낙산사,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이다. 특히 총 419개 계단을 오르면 눈썹바위 아래에 새겨진 관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가 장관이다. 순간 온 세상이 관세음보살이 계신 도량이다.

낙가산 보문사는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회정 대사가 선덕여왕 4년(635년) 창건하였다.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보타낙가산의 이름을 따서 낙가산이라 하였고,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보문시현(普門示現)]을 상징하여 보문사라 하였다. 석굴법당과 관련한 이야기는 창건 설화로 유명하다.

635년(선덕여왕 4년)[또는 649년(진덕여왕 3년)] 4월이었다. 삼산면에 사는 어부들이 바다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가 22개나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들은 돌덩이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다음 그물에도 그 돌덩이가 걸려 올라왔다. 다시 돌덩이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또 다음 그물에도 역시 돌덩이가 걸려 올라왔다. 어부들은 실망한 채 돌덩이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 어부들 꿈에 노스님이 나타나 당부하였다. “낮에 그 돌은 돌이 아니라 먼 천축(인도)에서 오신 불보살님과 나한들이다. 내일 다시 불보살님이 그물에 걸려 올라오면 명산에 잘 모셔 달라.”

그물로 건져 올린 석상을 표현한 그림.

어부들은 새벽녘부터 일어나 간밤의 꿈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감탄하였다. 그들은 배를 띄워 어제 석상을 던져버린 그 바다에 그물을 쳤다. 역시 22분의 석상이 올라왔다. 노스님의 당부대로 불보살님을 낙가산으로 옮겼다. 그런데 지금의 석굴 부근에 이르자 석상이 갑자기 무거워 옮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굴 안에서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 내음이 굴 밖으로 스며 나오고 있었다. 굴 안으로 들어가 보니, 굴 안은 마치 어떤 사람이 일부러 다듬은 것처럼 천연 좌대가 있었다. 22분의 석상을 그 좌대에 차례로 올려 모셨다. 이후 어부들은 불보살님의 가피로 옥동자를 얻거나 큰 부자가 되었다.

이 22분을 모신 석굴은 현재 보문사 나한전이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제27호로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석굴사원이다. 그런데 나한전에는 22분이 아니라 23분이 모셔져 있다. 자세히 보면 한 분은 다른 22분과 차이가 난다. 그 한 분은 1900년대 초반(1928년?)에 조성된 보살이다. 또 살펴보면, 불보살님은 연꽃 좌대에 앉아 계시지만, 나한들은 구름 좌대에 앉아 계신다. 불보살님만이 연꽃 좌대에 앉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깨진 옥등을 밝히고 불씨 구해
석굴법당에는 고려 왕실에서 왕후가 헌정한 옥등(玉燈)이 있었다. 어느 날 석굴법당을 청소하던 동자승이 옥등을 닦다가 실수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옥등은 칼로 자른 것처럼 두 조각이 나버렸다. 옥등은 절에서 중히 여기는 보물이므로 동자승은 어쩔 줄 몰라 울고 있었다. 지나가던 노스님이 동자승에게 우는 이유를 물었다. 이야기를 들은 노스님은 동자승과 함께 법당으로 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두 조각이 난 옥등은 멀쩡하고 오히려 불이 켜져 있었다. 노스님은 옥등을 만지고 또 만져보았다. 깨졌다고 생각하니 깨진 듯이 옥등에 금이 나 보였다. 노스님은 석불 바닥에 흘려있을 기름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동자승이 가리킨 곳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그리고 옥등의 불은 전보다 더 밝고, 기름은 가득 차 있었다. 노스님은 나한에게 예를 올렸다. ‘나한성중, 나한성중!’

그런데 이 옥등은 1980년 1027법난을 겪는 동안에 어디론지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혼란스러운 틈에 분실된 것으로 본다. 앞 이야기는 나한이 동자승을 도와준 것이라고 한다면, 나한이 동자승으로 나타난 이야기도 있다. 여러 절에서 비슷하게 전해지는 이야기다.

동자승과 옥등 이야기를 표현한 그림.

갑오년(1892년) 동짓날, 스님이 새벽에 일어나 팥죽을 쑤려고 부엌으로 나갔다. 아궁이에 불을 피우려고 불씨를 헤쳐 보니 불씨가 죽어 있었다. 스님은 당황했다.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 할 텐데 큰일이었다. 절 안에 불이 있을 만한 곳에는 다 갔지만, 불씨는 전혀 없었다. 날이 밝으면 다른 방도를 찾을 요량에 참회하는 마음으로 석굴법당에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 중에 이상한 느낌에 일어나 공양간으로 달려갔다. 아궁이에 장작이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나한성중”이라 외치며 감격했다. 부지런히 팥죽을 쒀서 시간에 맞게 각 단에 공양을 올렸다.

그날 오전에 스님은 아랫마을 어느 노인에게 볼일이 있어 들렸다. 노인은 스님에게 책망하듯 말하였다. “스님, 어째서 그 춥고 어두운 새벽에 불씨를 얻어오라고 그 어린아이를 보낸단 말입니까.” 스님은 말하였다. “어르신, 절에 어린아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불씨를 얻어오게 한 일이 없습니다.” “아니, 불씨를 얻으러 온 아이가 하도 추워하길래, 팥죽 한 그릇을 주었더니 다 먹던데요.”

스님은 상황을 짐작하고 급히 절로 돌아와 석굴에 갔다. 나한 한 분의 입에 팥죽이 묻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일이 있던 후로 동지만 되면 절에 올라와 팥죽을 쑤어 불단에 올리고 기도하였다.

눈썹바위 밑에 새겨진 마애관음보살.

절 살림을 지킨 나한
어느 날 보문사에 도둑이 들어왔다. 도둑은 촛대 등 불기(佛器)를 훔쳐 달아났다. 도둑은 밤새도록 도망을 쳤다. 아무리 달려도 길이 끝이 없었다. 새벽이 되어 보니, 보문사 마당을 빙빙 돌고 있었다. 나한이 도둑을 절 마당에 가둬둔 것이다. 결국에는 스님에게 덜미를 잡힌 도둑은 잘못을 빌었다. 도둑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딱한 사정이 있는지라, 스님은 자루에 쌀을 담고 약간의 노자를 주어 돌려보냈다. 이후 그 사람은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되고 보문사 신도가 되었다.

절 살림을 지켜내고 중생을 제도한 나한의 신통 이야기는 또 있다.

수십 년 전의 일이다. 화산 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보문사 인근 마을 사람들이 낙가산의 나무를 함부로 베어갔다. 처음에는 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몰래 베어가고, 나중에는 대낮에도 버젓이 베어갔다. 스님들이 말리러 가면 피하는 척하다가 다시 돌아와서 베었다. 그러다가 스님들에게 시비를 거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작당하여 스님들을 위압하고 심지어는 폭행도 하였다.

화산 스님은 궁리 끝에 석굴의 나한상을 업어다가 나무를 잘 베어가는 사람 집에 한 분씩 내려놨다. 마을 사람들은 나한의 신통이 무섭다는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에게 나한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을까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스님의 생각은 적중하였다. 아마 꿈자리도 뒤숭숭하였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주지스님을 찾아와 ‘제발 나한님을 다시 모셔가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낙가산의 나무를 베지 않기로 서약하였다. 이후 낙가산의 나무를 베는 일이 없었다. 화산 스님의 묘책과 나한의 신통력으로 낙가산의 울창한 살림이 보호된 결과, 보문사를 찾는 이들은 자연과 사찰이 주는 아늑함에 평온한 마음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