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 경주 남산에 오르다] 10.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부처님처럼 살겠다’ 다짐케 되는 남산 불상  선각여래좌상서 나와 산길 오르면 만나는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늠름한 위용의 통일신라시대 석불 불상 앞 공간서 신도들과 참선도

2024-05-03     무진 스님/ 경기 광주 빛고운절 회주, 조계종 교육아사리
경주 남산 대표 석불인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의 모습.

선각여래좌상에서 산길을 따라가다 걸어가다 조금 힘들다 싶을 때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이제 이 길만 오르면 남산을 대표하는 석불 좌상이 여러분을 반겨줄 것이다. 큰 바위들이 나타날 때 고개를 살짝 들면 돌로 만든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광배가 등 뒤를 밝히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여러분을 내려다보고 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이 절로 든다. “부처님께서 남산의 계실 곳에 계시는구나!” 

남산의 정상은 아니지만, 눈의 시선에 꽉 차오는 바위들의 정상에 부처님께서 꼿꼿하게 앉아서 굽어보고 계신다. 감히 가까이 갈 생각이 들지 않고 지금 자리에서 합장 인사 올리고 자리에 앉아 바라보게 되는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이다. 

나는 혼자 오든 아니면 신도들과 순례의 참배를 오든 불상 밑 이 자리에 땀이 마르도록 앉아 조금 쉬었다 싶으면 호흡을 가다듬고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와보면 안다. 불상 밑 이곳은 20여 명이 와도 각자 좋은 자리를 찾아 앉기에 좋은 터이다. 남산의 자연과 부처님의 위신력을 느끼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이제 움직일 시간이 되었다 싶으면 일어서서 부처님을 향해 합장한다. 그리고 혼자든 함께든 반야심경을 독송한다. ‘부처님 부처님처럼 복된 사람이 되겠습니다. 누구든지 부처님 뵙고 복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기원 올리면 복 많이 주십시오. 부처님 복 많이 주세요.’ 나의 변함없는 기원이다. 

어떤 사람들은 불교는 ‘기복 불교’가 아니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불교를 모르고 겉만 보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깨달음만 생각하고 공부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뭐지 싶었다. 내가 옳고 그름에 빠져 자신의 못남은 보지 못하고 주위의 잘못만 지적하고 다그치고 있었다. 공부 많이 하고 한 소식 했다는 스님들에게 느꼈던 너그럽지 못하고 강압적인 모습이 내 모습이었다. 경전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부처님의 모습을 보았다. 깨달았으나 본인의 만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깨달았기에 중생을 위해 복덕을 나눠주시는 자비의 부처님이 보였다. 

조금 어렵겠지만 불교의 법은 대상과 함께한다. 아니 좀 더 쉽게 말한다면 내가 있기에 세상이 있고 세상이 있기에 내가 있다. 나라는 존재는 변화하는 존재다. ‘무아’는 ‘내가 없다’가 아니고 나는 변화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라는 존재는 ‘오온’인 ‘색’이라는 물질과 마음이라는 ‘수·상·행·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질은 마음과 함께 나를 이룬다. 나라는 물질은 ‘사대’인 ‘지·수·화·풍’이 구름처럼 뭉쳐서 변화하고 있을 뿐이다. 나라는 마음 또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구름 같은 감각이 뭉쳐서 이러쿵저러쿵 ‘인연과’에 휩싸이게 하는 기운이다. 이러한 이치를 아는 부처님 제자가 된다면 인과에 지지 않고 인과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부처님 말씀처럼 보살님 모습처럼 모든 생명에게 감사하고 베푸는 마음으로, 나의 세상 나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가는 주인이 될 수 있다. 

불자는 신에게 복을 기원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주인이기에 복을 지어가는 보살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가 복된 사람이 되기 위해, 나를 있게 해준 모든 존재에게 감사의 기원을 올리는 것 이것이 불교의 기도이다. 불교의 ‘기복’은 여기에 있다. 

인과를 안다면 악업에 조심스러우나 인과를 알기에 선업에 당당할 수 있다. 이러한 불제자라면 부처님께 당당하게 외칠 수 있다. ‘부처님 복 많이 주세요.’ 나는 신도분들과 남산 순례를 함께할 때는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서서 반야심경을 봉독하고 손을 하늘 높이 뻗으며 세 번 봉독한다. ‘부처님 복 많이 주세요.’ 그리고 속으로 다짐하자고 말한다. ‘부처님처럼 살기 위해 모든 중생에게 베풀고 감사해하며 살겠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복된 사람이 되기 위한 기복이며 이 기복의 실천이 ‘자비희사’이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앞에서 무진 스님의 설명을 신도들이 듣고 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법의 가피를 하늘에서 비처럼 뿌려주시는데 어떤 사람은 피하고, 어떤 사람은 깨진 바가지로 받고, 어떤 사람은 큰 바가지로 받는다.” 

나는 어떤 바가지를 품고 있을까 스스로 살펴본다. 정진하고 기도하며 복덕으로 만들어진 큰 바가지를 품고 있다면 이 얼마나 행복할까. 

30세에 깨달음을 얻고 80세에 열반에 들 때까지 중생을 위해 베풀고 또 베푼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부처님처럼 중생을 위해 베푸는 삶의 행복이 그 얼마나 행복으로 충만될까. 부처님처럼 복된 삶을 살기 위해 기원하는 수행이 ‘불교의 기복’이다. 우리 모두 불국정토 남산의 순례길에 올라 기복하고 또 기복하자. ‘부처님. 부처님처럼 살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복 많이 주세요.’ 

불교는 ‘기복 불교’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깨달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겨우 그 정도의 깨달음이 목적이라면 어디에도 쓸모없다. 깨달아서 자기 잘난 맛에 거룩하게 앉아서 ‘허허’하고만 있다면 그 깨달음 어디에 써먹겠냐는 것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고 깨달음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실천과 행동은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자비희사’에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중생을 위해 살다 가신 그 정신이 진정한 불교의 정신이다. ‘자비희사’의 복덕은 깨달음의 기본이며 깨달음의 실천이고 행동이다. 부처님께 복된 삶을 살아가는 주인으로 ‘복 많이 주세요’하며 기복의 기도를 올리자. 그리고 실천하자. 복 많이 받는 불제자가 되기 위해 ‘자비희사’를 실천하고 행동하며 살자. 

〈반야심경〉을 동북아에서 봉독하는 이유가 있다. 물론 부처님 말씀을 아주 짧게 압축한 경전의 위대함이 〈반야심경〉을 봉독하는 이유겠지만, 손오공과 저팔계 그리고 사오정의 제자들과 구법의 순례를 다녀온 ‘서유기’의 ‘삼장법사’ 현장 스님과의 인연이 크다. 현장 스님은 600년대 중국 당나라 시대의 스님이다. 구법의 불심으로 사막을 건너고 산적들을 만나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인도의 나란다 사원에 도착하여 경전을 공부하였다. 이후 현장 스님이 가져온 경전으로 중국 불교 아니 동북아 대승불교는 시대를 풍미하며 우뚝 서게 된다. 이후 동북아에서 현장 스님은 누구나 존경하고 닮고 싶은 모범이 된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현장 스님이 인도를 다녀올 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반야심경〉을 봉독하여 역경을 이겨냈다는 일대기는, 우리 한국불교를 포함한 동북아 불교에서 〈반야심경〉을 중요하게 봉독하는 이유가 된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은 일제강점기 골짜기에 불두가 깨져 뒹굴고 있었고, 광배와 불신도 분리되어 있었는데 1923년에 보수하였다. 불두의 코 이하는 파괴되어 있었는데 1970년 이전에 누군가 시멘트로 조잡스럽게 코와 입을 만들어 놓아 괴상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2006년 보수의 의견이 제기되고 2007년 보수를 시작하여 얼굴에 부착된 시멘트를 벗겨내고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하여 2008년 12월에 지금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광배에는 일제강점기 윗부분이 깨져서 사라진 것을 보수하여 놓았는데, 1963년 누군가에 의해 쪼개졌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2008년에 함께 보수했다. 광배에는 두광과 신광이 둥글게 새겨져 있는데 밖에는 불꽃이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고 신광의 안쪽에는 넝쿨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대좌는 위를 향한 앙련의 연꽃무늬를 새긴 연화대좌이다.
 

중대석 8면에는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안상이란 코끼리 눈이란 의미다. 그런데 안상이란 코끼리 눈이 아니라 성인이 앉거나 성스러운 물건을 올려놓는 평상의 다리 받침을 새긴 것이다. 누군가 안상이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용어가 잘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하대석은 팔각의 문양만 있고 일반적인 밑을 향한 연꽃인 복련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불상은 늠름한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의 모습을 하고 있어 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