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중의 깨달음의 노래] 5. 무산 대종사의 오도송 ‘파도’
“천경 만론 모두가 바람에 이는 파도” 생업 현장인 바다 파도소리 듣고 깨달아 바람 인연 만나야 하는 파도는 ‘색즉시공’ 동해바다 파도소리가 곧 깨달음임을 전해
파도
밤늦도록 책을 보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설악 무산 대종사(1932~2018)는 설악산 백담사에서 “부처의 님은 중생”이라는 한용운의 불교정신을 가장 잘 계승 발전시킨 만해의 후예이다. 인제군 용대리 마을 노인들을 부처님 모시듯이 하여 부처를 중생 속에서 찾았다.
‘파도’는 무산 스님이 동해 낙산사에서 참선 수행 중에 깨달음을 얻고 읊은 오도송이다. 원래 선시나 오도송은 전통적으로 한시(게송) 형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쓰는 작자나 읽는 독자가 전문적인 시와 선적인 식견을 갖추지 않으면 접근하기 쉽지 않다. 무산 스님은 선가의 시를 현대시조 형식을 빌어서 표현하는 선시조를 창작한 한국문학사에서 최초로 한글로 선의 세계를 현대시조로 읊은 선시조의 창작자이다. 선시조집인 <심우도> <만악가타집>이 있다.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우리말로 읊은 한글 선시인 ‘아득한 성자’ ‘아지랑이’ ‘숲’ 등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파도’는 초장, 중장, 종장의 시조 형식(3장)과 규칙을 두루 갖추어 문학성도 뛰어난 현대시조이며, 선(禪)시조이다. 종장의 첫 음보를 보통사람이라면 “천경과”라고 할 텐데, “천경(千經) 그”라 하여 반드시 3음보여야 하는 규칙을 멋지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한시의 운율을 원용하여 “가” “가” “다”로 압운하여 시조의 음악적인 리듬까지 살리는 묘용을 부리고 있다.
선과 시는 공통점이 자연을 보고 느끼는 세계와 마음으로 깨닫는 경계를 고도의 압축된 문자와 직관으로 접근하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일치하므로 시선일여(詩禪一如)라고 한다.
특히 시조가 선비의 충절과 풍류 등 관념적인 주제를 노래한 정형시인 것이 선사가 선 수행과 깨달음 등 관념적인 내용을 읊는 선적인 시를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무산 스님은 선시를 현대시조 형식으로 창작하는 전범을 보인 시승(詩僧)이다.
초장과 중장에서 “밤늦도록 책을 보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은 투철한 구도와 수행의 과정을 읊고 있다. 나름대로 경전도 읽고 관법 수행도 해보다가 바다의 울음소리 즉, 파도소리를 듣고 종장에서 깨달음을 예약한다.
‘파도’의 주제는 종장의 “천경 그 만론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이다. 부처가 설한 팔만대장경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모든 관념이 바람이 만들어 낸 파도처럼 실체가 없는 주장과 주의(主義)란 뜻이다. 그러니 절대적으로 매달려서 집착할 것이 못 된다(應無所住)는 <금강경>의 공사상을 나타낸 선사의 깨달음의 노래이다.
무산 스님은 하늘의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어부가 생업으로 삶의 현장인 바다의 파도소리, 해조음(海潮音)을 듣고 깨달았다. 파도는 바닷물이 바람이란 인연을 만나야 나타나는 실체가 없는 자연계의 현상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해조음은 부처님의 설법을 상징하는 말이다. 스님은 법상에서 자신의 설법보다 동해바다의 파도소리를 듣는 것이 더 낫다고 설하였다.
며칠 전 아내와 낙산사를 다녀왔다. 해수관음상 곁에서 동해바다를 바라보시는 무산 스님 동상에 합장하고 스님의 무언설법을 들었다. 끝없이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파도소리 “철얼석 철얼석 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