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 경주 남산에 오르다] 9. 삼릉곡 선각여래좌상

전법륜인 맺은 친근한 호상 가진 부처님  큰 바위에 새긴 5.2m 선각마애불상 수인은 부처님 법 상징하는 전법륜인 경외감 드는 모습 아니어서 더 ‘친근’ 중생들 이야기 조곤조곤 들어줄 듯해

2024-04-22     무진 스님/ 경기 광주 빛고운절 회주, 조계종교육아사리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상을 참배하고 그 위 등성이를 한 200m만 오르면 크고 넓은 바위가 나온다. 이 바위 면 중앙에 높이 5.2m의 마애불상이 새겨져 있다.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이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면 중간에 가로로 균열이 있는데 기가 막히게 좌대를 구분하고 있다. 균열 윗부분에 부처님이 앉아 계시고 균열 아래에 연화대좌를 새겨서 둘의 구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라의 불교 유물을 보면 볼수록 틀에 얽매이지 않는 창조성이 놀라움과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선각여래좌상 부처님의 손 모양인 수인은 ‘전법륜인’을 하고 있다. 전법륜은 오른손은 가슴 중앙에 대고 손바닥을 보이게 하여 엄지와 검지나 중지를 구부리며 맞대고 있고, 왼손은 오른손 밑에 살짝 내려 손등이 보이도록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수인이다. 전법이란 수레바퀴를 굴리듯이 법을 전한다는 의미를 상징한다. 그래서 인도의 불교 조각에서 나타나는 수레바퀴의 모양은 부처님의 전법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부처님의 법을 단순하게 정리한다면 중도,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연기가 대표할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법을 아울러 상징하는 수인이 전법륜인이다. 

부처님 그림인 불화를 그리거나, 조각으로 불상을 만들거나, 바위에 선각으로 마애불을 조성할 때, 어떤 부처님인지 상징하는 것이 수인이다. 불화나 불상을 참배할 때 부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대표적인 수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은 수하항마상의 수인이 대표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새벽 금성이 뜰 때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 상황을 상징한다. 부처님께서 모든 장애를 이겨내고 깨달음을 얻자 마왕 파순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증명하라며 대들고, 이때 부처님께서 오른손과 왼손을 배꼽에 두었던 선정인의 수인에서 오른손을 무릎에 내려 손등을 보이며 검지로 땅을 가리킨다. 그러자 모든 중생의 생명과 삶을 상징하는 ‘땅의 신’이 대답을 하면서 부처님의 깨달음이 증명된다. 이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의 과정을 상징하여 보여주는 수인이 수하항마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아미타 부처님의 수인이다.

아미타 부처님의 불상을 보면 마찬가지로 수하항마상의 수인을 하고 있기도 하다. 아미타 부처님을 상징하는 구품인의 수인이 있는데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래서 좌우에 보살님이 있는 경우 수하항마상을 중앙의 부처님이 취하고 있다고 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단정하면 안 된다. 수하항마상의 본존불 좌우에 관세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 또는 대세지보살상이 있다면 아미타 삼존불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수하항마상의 본존불 좌우에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이 있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분명하다. 여기서 궁금한 점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대표하는 수하항마상은 왜 아미타 불상의 수인이 된 것일까? 

경북 영주에는 한국불교 화엄을 대표하는 의상 스님이 창건한 부석사가 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모른다면 한국의 사찰을 모르는 것이고 한국의 사찰을 안다면 부석사 무량수전을 알 것이다. 고려시대인 1376년에 중수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 무량수전이다. 부석사는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에 왕명으로 창건한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를 대표하는 ‘화엄십찰’ 중 한 곳으로 부석사를 표현하고 있다. ‘화엄십찰’은 의상 스님의 화엄 정신을 전하는 사찰이라는 의미다. 즉 부석사는 화엄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각의 이름이 정토 아미타 신앙을 대표하는 무량수전으로 되어 있다. 

무량수전에는 소조라 하여 흙으로 빚어 만든 아미타 불상이 모셔져 있다. 불상은 고려시대 조성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불상의 불단 아래에 있는 석조대좌가 통일신라시대 유구로 확인되면서 의상 스님의 생존한 7세기 후반의 불상은 아니지만, 학자들은 적어도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본존불상의 도상을 유지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홀로 모셔진 본존불은 당연히 아미타 불상으로 불리는데, 이러한 무량수전과 아미타 불상의 명칭은 고려시대 1054년에 부석사에 세워진 원융 국사(964∼1053)의 비문에서 확인된다. 비문의 내용을 보면 의상 스님의 제자가 부석사의 본당인 무량수전에 아미타불을 봉안한 이유를 묻자 ‘화엄경 입법계품’의 내용인 ‘화엄 일승(一乘)’의 정신으로 아미타불을 설명하고 있다. 즉 화엄은 일승의 정신으로 모든 종파와 모든 부처님을 종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운허 스님이 역경한 ‘80화엄경의 여래명호품’의 내용에서 확인된다. 

“여러 불자들이여, 여래가 이 사천하에서 혹은 일체의성(一切義成)이라 이름하고, 원만월(圓滿月)이라 이름하고, 사자후(獅子吼)라 이름하고, 석가모니(釋迦牟尼)라 이름하고, 제칠선(第七仙)이라 이름하고, 비로자나(毘盧遮那)라 이름하고, 구담씨(瞿曇氏)라 이름하고, 대사문(大沙門)이라 이름하고, 최승(最勝)이라 이름하고, 도사(導師)라 이름하나니, 이러한 이름하고 그 수효가 십천이라 중생들로 하여금 제각기 알고 보게 합니다.”

물론 화엄 본존불상을 대표하는 비로자나불상의 수인 지권인이 있다. 지권인은 한 손을 쥐고 검지를 펴고 있는 금강권에서 나머지 손이 검지를 붙잡으며 엄지로 쥐고 있는 모양의 수인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로자나불상의 지권인 수인은 서역의 스님인 불공(705~774)이 746년 당나라에 들어와 밀교 경전을 번역한 이후에 알려진 수인이다. 즉 의상 스님이 활동하던 7~8세기에는 화엄의 스님들은 지권인을 몰랐다. 그렇기에 이 시기 화엄 불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인인 수하항마상을 하면서 아미타불이라 칭하고 화엄의 본존불로 모셔진 것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수하항마상의 불상이 석가모니 불상이 되기도 하고 아미타 불상이 되기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직까지 학계에서 공인한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진 않았다. 

여기서 한국 불상의 상식 하나. 아미타 구품인 불상이나 비로자나 지권인 불상에서 왼손과 오른손의 위와 아래가 불상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비로자나 지권인 불상에서 어느 불상은 왼손이 위에 있고, 어느 불상은 오른손이 위에 있다. 이러한 이유는 문화권의 관습에 기인한다. 즉 인도는 유목민의 문화권에 있다. 유목민은 오른손을 숭상한다. 그렇기에 불상을 조성할 때 오른손이 왼손 위에 오도록 조성한다. 그런데 중국 문화권은 ‘좌상우하(左上右下)’라 해서 왼손을 숭상한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은 불상에서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는 불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른손이 위에 있으면 인도 불교, 왼손이 위에 있으면 중국 불교의 영향이구나 이해하면 된다.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은 얼굴 부분만 얕은 새김을 하였고 몸체부터는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불상을 새긴 기술이 남산의 다른 마애불과 비교해서 수준이 조금 떨어진다. 눈은 홈을 파기만 했고, 뭉툭한 코와 두툼한 입술은 부처님의 경외감이 아닌 그저 옆에 있을 만한 친근한 모습의 형상이다. 삼릉곡 선각여래좌상을 쳐다보면 경외감을 주는 부처님이 아닌 어딘가 못생겨서 인간적이다. 중생들 삶의 이야기를 하나부터 열까지 조곤조곤 들어주실 것 같은 친근감을 준다. 부처님 머리 위의 육계와 귀 부분을 보면 마무리가 안 되어 미완성의 불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경주 남산에서 가장 늦은 9세기 말쯤 불상으로 보인다. 부처님 광배는 둥글게 선을 그어 머리 뒤의 두광과 몸체 뒤의 신광을 새겨 놓았다. 이 또한 화려함과 멋이 사라진 밋밋한 광배다. 

광배는 흔히 말하는 아우라를 떠올리면 된다. 멋진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그 사람 뒤에 아우라가 보여’라고 하는데 이 아우라를 광배라고 생각하면 된다. 부처님은 일반 사람과는 다르다. 그렇기에 아우라도 일반 아우라가 아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아우라다. 여기서 조금만 힘을 내서 옆길을 타고 오르면 기묘한 바위 위에 활활 타오르는 너무나 멋진 광배를 한 불상이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