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의 Media In Buddha] 38. 독립·예술영화의 시간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공존을 꿈꾸며 영화관에만 있는 시간 ‘25시’ 독립영화를 위한 시간은 없다
영화관도 골라가는 시대, 전철역 근처나 사람 좀 들고나는 곳이면 영화관 하나씩은 있는 시대다. 영화관이 하나라도 스크린은 여럿인 복합상영관, 멀티플렉스. 그러면 그런 영화관에서 스크린 숫자만큼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장 흥행이 잘 되는 영화를 아무 때고 가도 볼 수 있게 같은 영화가 주르르,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는 있기는 한데 시간표가 평일 아침 첫 회 아니면 마지막 회, 그것도 아니면 한참 바쁜 낮 시간대에 퐁당퐁당.
이렇게 스크린이 많은데도 또 어떤 영화는 예매 시작하자마자 매진이 되어 볼 수가 없다. 그런 영화들을 위해 영화관들은 심야상영을 하는데 그 시간표 숫자가 참 초현실적이다. 25시. 우리가 아는 시간대가 아니다. 12진법을 기준인 시간 셈법이 보편적인데 영화관 심야시간대 상영에서만 쓰이는 이런 시간표를 볼 때면 좀 저항감이 생긴다. 아마도 영화 〈25시>(앙리 베르누이 감독, 1967년)를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때, 루마니아 산골 농부 요한(안소니 퀸)은 유대인도 아닌데 유대인으로 몰려 강제노동 수용소로 잡혀간다. 요한의 아름다운 아내를 욕망하는 경찰서장이 거짓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아내와도 강제 이혼을 당한 요한이 간신히 수용소를 탈출했더니 스파이 혐의로 잡혀 이번에는 독일로 끌려갔다가 독일 친위대 대령이 요한을 아리안족의 순수 혈통을 가진 영웅이라며 수용소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다가 독일이 패하자 이번에는 전범자로 미국포로가 되어 재판을 받게 되고 억울했던 상황에서 풀려나 석방된다. 요한을 돌아오게 하고자 그동안 애를 썼던 아내는 그 사이 침략군에게 능욕 당해 아이를 낳았다.
이 영화의 원작자인 소설가 비르질 게오르기우는 작중인물을 통해 25시의 의미는 하루 24시간이 모두 끝나고도 영원히 다음날 아침이 오지 않고 아무도 구원해줄 수 없는 최후의 시간을 의미하며, 그 시대 유럽 문명이 처한 시간이라고 했다. ‘25시’라는 시간이란 아주 야만적이고 불가항력적이며 폭력적이라는 의미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영화관 시간표에서 보는 25시도 어떤 폭력성을 떠오르게 한다.
가령, 독립다큐멘터리를 방영하던 EBS 다큐시네마가 폐지된 것이나, 영화제에서 소개돼 개봉을 기다리던 좋은 영화들이 몇 년째 개봉관을 찾지 못하고 있거나, 개봉관을 찾지 못해 OTT를 통해 풀리거나 하는 맥빠지는 일.
EIDF(EBS 국제다큐영화제)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와 같이 오직 다큐멘터리를 위한 영화제도 나름의 연혁을 쌓아오며 지속되고 있고,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크고 작은 여러 영화제들마다 다큐멘터리는 중요한 프로그램의 한 축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영화제들에서 소개된 영화들이 스크린에서 관객을 만나게 되는 경우는 그 기회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관도 늘고, 채널도 늘었는데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들에게는 ‘영화관은 멀고 방송은 대안’인 상황이다.
16mm니 35mm, 시네마스코프 같은 필름 기반 영화산업이 아니라 디지털 방식으로 촬영화고 편집하고 DCP로 상영하는 시대가 되면서 영화관과 가정용 OTT에서 동시에 같은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영화관은 멀티플렉스로 분화하며 스크린 수도 엄청난 속도와 범위로 늘어나고 있다. 늘어나는 것은 스크린 숫자만이 아니다. IMAX, 돌비스테레오, 4DX, 3D 등 상영방식에 따라 체험의 양상이 달라지게 한다.
예전의 동시상영은 한 상영관에서 한 번의 관람료로 두 편 또는 세 편을 보는 방식이었다면, 요즘의 동시상영은 여러 스크린에서 하나의 DCP로 동시다발 또는 시간차로 릴레이 상영을 하는 방식이 되었다. 스크린은 늘어났지만 스크린을 확보할 작품의 기회는 늘지 않았다.
규모의 경제는 블록버스터에게만 풍요롭다. 〈아바타: 물의 길>이나 〈듄: 파트2> 같은 시리즈 영화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적으로 비싸고 차별화된 특수 상영관 예매부터가 경쟁이 되었고, 상영기업은 그 동력으로 멀티플렉스 스크린 점유율을 높이는 흥행방식으로 재미를 보았다. 그러나 이런 특수는 ‘영화관 자체’를 부흥시키는 전략은 아니었다.
관습적으로 영화의 상영관은 연극이나 무대예술의 극장과는 다르다고 여겨졌다. 관객들은 어느 자리에 앉든 같은 장면을 본다. 관객의 위치에 따라 무대의 미장센과 연희자들의 입체적 실체가 다르게 경험되는 극장과 달리 스크린에 비친 영상은 카메라의 시선을 어느 객석에나 똑같이 편재하게 한다. 다만 좌석의 위치에 따라 시야각이 좋고 나쁜 차이 정도가 있을 뿐.
영화관 쪽에서 선택한 것은 그 좋고 나쁜 차이를 관람료에 반영하는 것이었고, 관객들은 오른 요금을 부담스러워 했다. ‘극장의 위기’가 곧 ‘한국영화의 위기’처럼 얘기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관을 살린 것은 〈서울의 봄>이나 〈파묘>가 선택한 방식, ‘관객과의 대화’인 무대인사였다. 관객들은 영화‘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을 영화 제작진뿐 아니라 다른 관객들과 소통하고 싶어했다.
사실 이런 방식은 여러 영화제나 독립영화, 예술영화들이 꾸준히 지속해 온 GV의 연장선에서도 볼 수 있다. 영화제에서나 예술영화관을 찾는 관객들은 GV를 통한 참여와 소통을 작품 관람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지금 여러 영화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EBS 다큐시네마는 폐지됐지만 KBS독립영화관은 2011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작품마다 편차는 있겠지만 방송국이 공개한 시청률은 0.9%다. 관객수 집계를 내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영화관 관객 숫자보다 더 높은 시청률일지도 모른다.
KBS 독립영화관은 “〈독립영화관>은 독립영화가 가진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합니다.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특별하고도,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작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독립영화만이 갖고 있는 자유로운 사고와 강렬한 에너지를 〈독립영화관>이 보여드릴 것입니다. 영화관에서도, TV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독립영화와 시청자의 적극적 만남이 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기획의도를 밝히고 있다.
이렇듯 지금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는 관객과 만날 기회 자체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스크린이 아무리 늘어나고, 채널도 세 자릿수를 넘어 외울 수도 없는데. 이렇게 스크린 독점이 과도한 승자독식의 상황은 관람료 비싼 특수 상영관이 수익극대화를 추구하려고 끌어다 쓴 것과는 다른 영화적 25시다.
불교의 주요 교리와 사상을 대화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차근차근 설명하는 경전인 〈아함경>에는 갈대 묶음을 들어 공존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사리불 존자에게 “이 세계는 누가 만들었으며 만든 주인은 누구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사리불은 갈대 묶음 2개를 가져와 세워 보이면서 “이 세계는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만든 주인도 없다. 이것이 넘어지면 저것도 넘어지지 않는가? 서로 의지하고 있는 것”아라며 ‘공존’이 곧 세계 그 자체의 원리임을 깨우치게 한다. 이 깨우침이 영화관에도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