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탐사대] 일곱 도적이 나한된 신묘한 도량
8. 안성 칠장사 유년기 궁예의 활쏘기 장소이자 나옹 스님·임꺽정 설화도 가득 폐사·중창 거듭하며 시간 흘러 나라와 백성의 삶 모두 담고 있어
혜소 국사의 남다른 도력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극락마을을 지나면 칠현산 기슭에 자리한 칠장사(七長寺)가 있다. 칠장사는 선덕여왕 5년(636) 자장 스님(590?~658?)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지만, 불분명하다. 본격적인 역사는 고려 초 혜소 국사(972~1054)가 머물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폐사와 중창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 원통전, 명부전, 나한전, 사천왕문, 혜소국사비, 철당간(철로 된 깃대), 봉업사지석불입상 등 지정문화재가 있다.
칠장사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궁예가 10세까지 활쏘기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 나옹 스님이 심은 나옹송, 왜군 적장이 내리친 칼의 흔적이 있는 혜소국사비, 임꺽정이 스승 병해 대사를 위해 조성한 꺽정불, 암행어사 박문수의 과거시험에 도움을 준 나한 등에 관련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 중에 백미는 일곱 도적이 나한이 된 사연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로서 부처님 제자 가운데 깨달음을 얻은 이를 말한다. 보통 나한전에 십육나한, 십팔나한, 오백나한 등을 모신다. 그런데 칠장사 나한전에는 일곱 분의 나한을 모신다. 더욱이 이분들은 부처님 당시의 제자가 아니라 칠장사에서 성인이 된, 한때 이 땅의 도적이었다. 사연은 이렇다.
고려 제9대 덕종의 왕사였던 혜소 국사(972~1054)가 칠장사에 부임할 무렵, 인근에 일곱 명의 도적이 있었다. 새로 오신 스님으로 인해 운신의 폭이 염려되어 한 사람씩 절 사정을 알아보고자 왔다. 때마침 도적은 목이 말라 우물가로 갔다. 그곳에는 금으로 된 물바가지가 있었다. 도적은 물을 마시고는 금 바가지를 몰래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자신만의 비밀장소에 숨겨두었다. 다른 도적들도 각각 절에 왔다가 금 바가지를 보고 가지고 돌아와 자신만의 비밀장소에 숨겨두었다. 이들은 각각 다시 절 우물가에 가보았다. 자신이 가져갔는데도 그곳에는 또 금 바가지가 있었다. 하도 이상해서 비밀장소에 가보니 자신이 가져다 둔 금 바가지가 보이지 않았다. 한 도적이 이 사실을 다른 도적들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다른 도적들도 똑같은 사실을 실토하였다. 혜소 국사가 신통을 부린 것이다. 도적들은 혜소 국사의 도력에 두려움을 느꼈다. 곧 스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도를 이루었다. 그 뒤 혜소 국사가 열반하자 이들은 사람 형상을 한 일곱 개의 돌만 남기고 종적을 감췄다. 이때부터 산 이름을 칠현산(七賢山), 절 이름을 칠장사(七長寺)라 하였다. 이전에는 아미산(蛾嵋山) 칠장사(漆長寺)였다.
지금 나한전에 모신 나한은 이전에는 경내 노천에 있었다. 1703년 법당을 마련하였다. 한 평 정도로 작았지만, 좀 더 많은 이가 기도할 수 있게끔 법당 앞마당으로 기도 공간을 마련하였다. 이후 2015년 나한전을 새롭게 조성하여 지금은 다소 넓은 법당에서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박문수, 나한 가피로 장원급제
칠장사 나한전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공양물이 올려져 있다. 바로 유과다. 이 유과에는 암행어사 박문수의 사연이 있다.
박문수(1691~1756)는 32세가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어느 해 박문수가 과거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서는 날 아침, 어머니는 박문수에게 유과 보따리를 주며 당부하였다. “꼭 가는 길에 칠장사 나한전에 유과를 공양하고 기도를 드려라.” 어머니 말씀대로 박문수는 칠장사에 들러 나한전에 기도하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그런데 그날 꿈에 칠장사 나한이 나타났다. 나한은 이번 과거시험의 내용이라고 하면서 여덟 줄 중 일곱 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줄은 알아서 쓰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박문수의 뇌리에는 그 게송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며칠 후 과거 시험장에 들어간 박문수는 깜짝 놀랐다. 꿈속에서 나한이 가르쳐준 게송이 바로 과거시험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꿈속의 글을 기억하고 있던 박문수는 일곱 줄을 그대로 쓰고 나머지 한 줄은 본인이 덧붙여 제출하였다. 결과는 장원급제. 박문수가 써 내려간 시를 ‘꿈속에 나타난, 과거에 오른 시’라는 뜻에서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라 한다. 문헌마다 약간 차이가 있지만, 그 시는 이렇다.
落照吐紅掛碧山(낙조토홍괘벽산) 낙조가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려있고
寒鴉尺盡白雲間(한아척진백운간) 까마귀는 흰 구름 자 모습을 그리며 날아가네.
問津客鞭應急(문진나객편응급) 나루터 묻는 나귀 탄 나그네의 채찍은 다급해지고
尋寺歸僧杖不閒(심사귀승장불한) 절로 찾아 돌아가는 스님의 지팡이는 한가롭지 않네.
放牧園中牛帶影(방목원중우대영) 방목하는 목장에는 소가 그림자를 두르고 있고
望夫臺上妾低(망부대상첩저환) 망부대 위 아낙네의 쪽이 뒤로 젖혀지네.
蒼煙古木溪南里(창연고목계남리) 푸른 연기 고목 사이로 피어오르는 시내 남쪽 마을에
短髮樵童弄笛還(단발초동농적환) 짧은 머리 나무꾼 아이가 풀피리를 불며 돌아오네.
이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칠장사 나한전은 각종 시험과 관련된 이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는다. 칠장사 나한전을 가실 때는 꼭 유과를 잊지 마시길. 그런데 필자가 알기로는 박문수가 올린 유과는 찹쌀유과로 한과인데, 대부분 유과사탕을 올린다. 또는 초코파이를 올리는 분도 있다. 무엇이면 어떻겠는가. 정성으로 기도하면 될 일이다. 유구필응(有求必應), 구하고자 하면 반드시 응한다. 혹시 유과를 준비하지 못했어도 걱정하지 마시라. 일주문 앞 가게에는 유과사탕이 준비되어 있다.
칠장사는 이러한 박문수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매년 10월에 ‘칠장사 어사 박문수 백일장’을 연다. 그리고 올해 3월 30일 ‘칠장사 비전 박문수체험관’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슬픈 눈의 사천왕
칠장사에는 오늘날에 더해진 새로운 이야기가 있다. 최명희의 대하예술소설 <혼불> 제9권에 묘사된 칠장사 사천왕 이야기다. 작가는 사천왕 중에서 가장 슬픈 얼굴은 경기도 칠장사 사천왕 존안이라 한다. 그리고 참 이상하게도 한번 눈빛이 깊이 남아 잊히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작가는 사천왕상의 눈동자에 주목하였다. 아무리 부리부리 부릅뜬 사천왕의 눈이라도 흰자위에 검은 동자의 모습인데, 칠장사의 사천왕 눈은 거꾸로 새까만 눈자위에 흰 고리눈이다. 흰자위가 아니라 검은 눈자위다. 작가는 검은 눈자위는 신비롭고 무궁한 우주의 광막한 어둠 같기도 하고, 반면에 무명의 깊은 바다 같기도 하다고 느꼈다. 그러한 눈동자는 말 못 할 고통과 비애를 다 빨아들이고도 남는다고 보았다. 이는 ‘내, 다 안다…. 내, 다 안다….’는 중생의 슬픔에 공감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보통 우리의 눈은 흰자위에 검은 눈동자다. 그런데 칠장사 사천왕 눈은 검은 눈자위에 흰 고리가 둘러싼 검은 눈동자다. 작가는 그 눈에서 슬픔을 읽었다. 그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중생의 슬픔이자, 가엾은 중생을 위해 사천왕으로 나타난 불보살의 연민이다. ‘내, 다 안다…. 내, 다 안다….’ 얼마나 따뜻하고 눈물 나는 말인가.
작가는 왜 슬픔으로 읽었을까. 칠장사의 역사와 관계되지 않을까.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 <임꺽정>에서 칠장사는 스승 병해 대사(갖바치 스님)를 만나 이봉학 등과 의형제를 맺은 장소다. 현재 칠장사에는 그 흔적들이 있다. 극락전에는 임꺽정이 모셨다고 하는 꺽정불이 있고, 명부전 벽면에는 임꺽정과 그의 의형제 그림이 근래 그려져 있다. 이처럼 그들의 역사가 남아 칠장사 사천왕의 눈이 슬프게 느껴진 것은 아닐까. 궁예 역시 칠장사와 인연이 있어서 벽면에 그려져 있다. 그의 삶 역시 우리 역사와 더불어 순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칠장사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절이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나라와 백성의 삶을 함께한 사찰이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