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 스님의 불국토 경주 남산에 오르다] 8. 서남산 선각육존불

채색으로 장엄됐을 여섯 불보살들 경주 남산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두 바위에 선각으로 불보살 조성 앞에 빗물 흐르지 않도록 설계해 불보살 채색해 신라인 신심 고양  

2024-04-08     무진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경기 광주 빛고운절 회주
일제강점기 당시 촬영된 경주 남산 선각육존불. 

우뚝 서 계신 관세음보살님을 뵙고 기원 올린 여러분은 즐거움과 환희에 찬 풍요로움이 가득 차오를 것이다. 그 이름을 들은 사람이나 그 이름을 봉독한 사람은 관세음보살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이다. 이제 행복한 마음으로 조금만 남산의 불국정토 품으로 들어서면 선각육존불이 여러분을 맞이해 준다. 선각육존불이면 여섯 분의 부처님이 계신가 싶지만 두 분의 부처님과 네 분의 보살님이 계신 선으로 새겨진 불상이다.

기본 상식 하나. 경주 남산은 계곡을 끼고 불국정토가 조성돼 있다. 아니, 전국의 모든 산사는 계곡을 끼고 있다. 이유는 계곡의 물 때문이다. 물이 없다면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곡이 아닌 구릉지에 절이 있다면 백이면 백 ‘깨끗한 샘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바꿔말하면 계곡에 물이 없거나 샘이 솟는 구릉이 아니라면 그곳엔 절이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은 웅장한 바위 두 면에 한 분의 부처님과 두 분의 보살님이 각 각의 면에 새겨져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왼쪽 바위 면의 부처님은 서 계신 입상이고 오른쪽 바위 면의 부처님은 앉아계신 좌상이다. 

또한 서 계신 부처님 좌우의 보살님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중앙의 부처님을 향하여 연꽃으로 보이는 공양물을 올리고 있으며, 오른쪽의 앉아계신 부처님 좌우의 보살님은 서서 살짝 고개를 돌려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다. 불상을 선각한 이름 모를 조각가의 창의력이 신선하다. 두 면에 비슷한 모양의 불보살님이 계셨다면 참배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오래도록 사로잡지 못했을 것이다. 두 면의 불보살님의 차이를 구분해보는 즐거움을 주는 선각이다.

선각육존불을 무진 스님이 설명하고 있다. 

왼쪽 면에 서 계신 부처님의 수인은 어디서도 보지 못한 모양새다. 오른손을 가슴 위까지 들고 손바닥은 밑을 향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배꼽 바로 밑에서 손바닥이 위로 향하고 있다. 이런 말 하면 좀 그런가 싶지만 ‘기운을 모으는 동작인가’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영화에서 도인이 단전이나 자연의 기운을 끌어올릴 때 자주 쓰는 동작이 기억나게 한다. 물론 더 깊은 의미가 있는 부처님의 수인일 것인데 어떤 수인인지 알 수가 없다. 남산에서만 보이는 수인이기 때문이다. 

오른 면 부처님은 왼손을 무릎에 놓고 손바닥은 하늘로 향해 펴고 있으며, 오른손은 살짝 오른쪽 가슴으로 기울어서 엄지와 중지를 맞닿고 있다. 이러한 모양새는 아미타부처님의 구품인 중 중품을 상징하는 수인이며, 왼손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대표하는 선정인이다. 이러한 모습이면 부처님이 누구신지 알기가 힘들어진다. 선각육존불 앞 설명에도 부처님 이름인 명칭이 없다. ‘경주남산연구소’에서 펴낸 안내서에 보면 오른쪽 앉아 계신 부처님은 석가모니 삼존불이며, 왼쪽의 서 계신 부처님은 아미타부처님으로 두 불상은 현생과 내생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오른쪽 부처님이 아미타부처님이 아닌가 싶다. 왼쪽 부처님은 어디서도 보지 못한 수인이라 누구신지 알 수 없지만, 오른쪽 부처님의 오른손이 아미타불의 수인이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여러 이야기를 품어 끝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비밀스러운 부처님이시다. 

일제 강점기 경주 남산

이제 진정한 선각육존불의 신비로움이 남아있다. 아니 통일신라시대 화려했던 불교미술의 정수를 확인할 시간이다. 기대하시라. 지금 현재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교미술의 찬란함이 선각육존불을 통해 펼쳐지게 된다. 함께 그 옛날 신라시대 700년대로 가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아야 선각육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다.

선각육존불은 선으로 불상을 그린 마애불이다. 어찌 보면 정성이 부족해 보이기도 하다. 불상의 조각을 정성 들이지 않고 억지로 했든가 아니면 대충 조각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누구든 가까이 가서 보면 뭔가 아쉬움이 들게 하는 것은 조각의 완성도도 떨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신라인들만의 특별함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 옛날 선각육존불을 조각한 신라인들이 양각이나 음각을 깊게 하지 않은 이유는 채색을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그 어디에서도 화려하게 채색된 마애불을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좀 아쉽네’하며 지나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채색된 선각육존불을 본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화려하고 얼마나 존엄하며, 그 얼마나 환희로울까!

선도산에서 바라본 남산

신라의 남산은 지금처럼 빽빽하게 나무가 자라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남산의 사진을 보면 바위가 드러나 나무를 찾아보기 힘든 산이었다. 나무를 땔감으로 했던 시대에 도심 경주와 가까운 남산에서 나무는 눈 밝은 누군가가 벌써 벌목해 갔을 것이다. 옛 도심 근처의 산에는 나무들이 자랄 틈이 없었던 것은 당연한 시대적 상황이다. 그렇기에 남산 근처 마을에서 바라보면 남산의 큰 바위는 눈에 바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곳 큰 바위에 채색이 된 부처님이 계신다고 상상해보자. 신라시대로 가서 채색된 선각육존불을 참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 차오를 것이다.

선각육존불의 큰 바위 윗면에는 빗물의 앞이 불상으로 흐르지 않게 길게 홈이 파여있다. 비가 오면 불상 위의 좌우로 빗물이 흘러가게 홈을 판 것이다. 또한 목재를 고정한 사각의 홈도 보인다. 지붕을 덮은 흔적이다. 채색된 선각육존불의 앞쪽으로는 비가 와도 빗물이 흐리지 않게 한 것이다. 이것은 빗물을 막는 가리게 역할의 지붕 건물로 보인다. 그런데 선각육존불만 채색이 되어 있었을까? 아니다. 남산의 모든 불상과 마애불은 채색이 돼 있었다. 

지금 우리는 법당에 들어서면 부처님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신라시대엔 그렇지 않았다. 경주 도심의 사찰은 왕족만 들어갈 수 있거나 귀족만 들어갈 수 있는 사찰로 구분된다. 일반 백성이 도심의 사찰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남산은 일반 백성들이 참배할 수 있었다. 남산에는 돌담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문도 없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 법당 내부에 목재의 마루가 깔린다. 그 이전에는 지금의 보도블록처럼 전돌이 법당 내부에 깔려 있었다. 그런데 남산에는 전돌이 하나도 출토되지 않았다. 즉 남산의 전각은 채색된 불상에 빗물이 흐르지 않도록 지붕으로 가린 건물이 있었을 뿐이란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멀리서 누구나 부처님을 뵐 수 있도록 뻥 뚫린 건물이 채색된 불상을 보호하고 있었을 뿐이다. 신라시대 남산을 바라보면 울긋불긋하거나 화려하게 채색된 불상에 여기저기에 있었다. 얼마나 화려했을까! 얼마나 환희로울까! 그때의 찬란한 남산의 불상들을 볼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시야를 가리는 무엇도 없는 남산의 바위에 새겨진 붉은 가사를 두른 부처님과 채색된 석조불상이 가득한 남산이 고개만 돌리면 눈에 들어온다. 남산을 바라보며 환희에 찬 얼굴로 부처님께 기원을 드린다. 어디 멀리 갔다 경주로 돌아오면 남산의 부처님이 잘 다녀왔다고 반겨준다. 신라시대 불국정토 남산의 채색된 불보살님의 모습이 정말 보고 싶다. 지금보다 10배 아니 100배는 더 찬란한 신라시대 불국정토의 남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