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마나의 시절인연] 피어있는 꽃, 마음 속에 심어라
화들짝 놀란 벚꽃이 와르르 깨어나 4월의 빛을 거리에 흩뿌린다. 오종종한 개나리꽃이 반짝반짝 노란별이 되어 담장 밑을 밝힌다. 중량감을 어찌할 수 없는 목련꽃은 주먹만한 하얀 등불을 처마 위 높이 걸어둔다. 젊은이들은 무거운 코트를 벗어던지고 밝고 경쾌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봄, 봄, 봄이 넘쳐흐르고 있다.
‘사시장춘(四時長春)’이라는 말이 그냥 생겨났을 리 없다. 봄같이 좋은 때가 어디 있으랴. 겨울을 뚫고 꽃들이 활짝 피어난 자연의 봄, 싱싱한 젊음이 들끓는 인생의 봄, 이보다 좋은 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의 봄과 인생의 봄 외에 또 하나의 봄을 덧붙이고 싶다. 바로 정신의 봄이다.
봄(見)을 가져야만 참다운 봄을 가진 것 아닐까?
당나라 때, <금강경> 박사라고 자부했던 덕산(德山)이 점심을 먹으러 길가 떡집으로 들어갔다. 떡 파는 할머니가 “당신은 점심(點心)을 먹으려고 하는데 도대체 과거, 현재, 미래의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하는 것이요?”라고 물었다. 덕산은 그 질문에 답변을 못하고 부끄러워 유명하다는 용담(龍潭)에 살고 있는 숭신(崇信) 스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찾아간 그곳에는 개울물이 졸졸 흐르고, 어떤 남루한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용담, 용담하고 사람들이 떠들어 굉장한 곳인 줄 알고 찾아와 보니 큰 계곡도 아니고 용이 있는 것도 아니로구나”라고 덕산은 중얼거렸다.
그러자 노인이 일어서서 말했다. “네가 찾아온 이곳이 용담이요, 네 앞에 있는 내가 용이로다.”
덕산은 또 한 번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천하가 담이요, 모든 만물이 용인데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일념으로 숭신 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던 어느 날, 덕산은 밤늦도록 스님의 강의를 들은 후 자기 암자로 가려고 밖으로 나왔다. 너무 깜깜해서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스승께 촛불 하나 켜달라고 했더니 그렇게 해줬다. 촛불을 들고 길을 찾아가려는데 스님이 훅, 촛불을 꺼버렸다. 덕산은 당황했지만 어찌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세상이 차차 밝아졌다. 멀리 별빛이 보이고, 산등성이가 보이고, 시냇물이 보이고, 길이 보였다. 덕산이 견성(見性)해 진리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촛불은 끌 수 있지만 진리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산수유, 개나리, 벚꽃이 시들지 않고 영원히 피어있겠는가. 아름다운 청춘이 늙지 않고 영원하겠는가. 꽃 피는 봄, 인생의 봄은 촛불을 불면 꺼지듯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봄을 영원히 붙들어 둘 수 있을까. 그것은 밖에 피어있는 꽃을 마음속으로 옮겨 심는 것이다. 밖에 있는 꽃이 시들어도 마음 안에 있는 꽃은 시들지 않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청춘을 마음 안에 옮겨 두면 세월이 지나도 마음속의 청춘은 사라지지 않는다. 즉 내가 나를 보는 것이다. 눈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아야 한다. 부처님은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눈이 아닌 마음의 눈을 뜨라고 말씀하신다. 나뭇가지에 눈이 트이듯, 마음의 눈이 트이면 영원한 봄을 볼(見) 수 있다. 봄이 봄을 만나는 법열이다. 이것이 참 봄(見性)이요, 진리(眞理)의 봄이다.